과거를 이야기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법

<꽃을 던지고 싶다> 28.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너울 | 기사입력 2012/12/28 [11:27]

과거를 이야기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법

<꽃을 던지고 싶다> 28.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너울 | 입력 : 2012/12/28 [11:27]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30회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것은 (…) 생존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현재를 적절히 통제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환상을 다시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환상을 갖지 않고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수잔 브라이슨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누군가의 어둠을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치 깊은 어둠이 자신마저 끌고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더더욱 소중한 사람의 어둠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 어둠은 함께 나눌 수도, 대신 짊어지고 나아갈 수도 없기에, 오롯이 옆에 있어주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안겨준다.
 
처음 어린 시절 겪은 성폭력에 대한 꿈을 꾸고 상담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는 너무도 변해버린 내 상태와 불안정한 감정에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더 이상 상냥하게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고, 때때로 올라오는 기억들에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잡혀 사는 사람 같았다. 나의 시간은 9살, 혹은 12살의 시점에서 1초도 흐르지 않고 정지한 것 같았다. 그때의 공포, 그 순간의 두려움, 그 공간의 소리와 냄새가 나를 둘러싸고 있어 온 사방이 다 막혀있는 장소에 갇혀 있는 듯했다. 성폭력 생존자임을 직면하는 순간부터 나의 시간은 멈추어 버렸다.
 
과거에 갇혀 산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내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현실감각은 물론이고, 미래를 계획하고 나아가는 법을,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혀 현재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시간, 동생의 시간
 
▲ 트라우마의 여정.    © 박다위 그림
주변의 친근한 사람들에게 이해 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에 가장 친한 동생이 있었다. 그 동생은 나에게 ‘언니는 마치 엄마 같아.’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자신의 고민이며 많은 부분을 함께 했다. 혼자 사는 그 친구는 자주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기도 했고, 나는 반찬을 해서 건네기도 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나 생일 등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나의 집에서 사람들과 파티를 했고, 주말이면 등산을 가고 절에 찾아가는 등 시간을 함께 만들어 갔다.

 
상담을 받으면서 나는 전처럼 그 동생에게 많은 것들을 할애할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그 동생에게 나의 상태를 말하고 이해 받기로 결심했다.
 
동생과 마주 앉아 식사를 마치고 말을 꺼냈다.
‘나 사실을 어릴 적에 성폭력의 경험이 있어. 근데 요즘 그 사실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상담을 받고 있는데 쉽지가 않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동생은 나처럼 밝고 긍정적인 사람에게 그런 아픔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다른 날과 변함없이 서로를 염려하고 그 날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나도 어릴 적 성폭력의 경험이 있어. 근데 힘든 언니에게 내가 다시 나의 고민을 나누는 것이 미안해서 더는 못하겠어. 언니에게 힘이 되고 싶은데 나는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날을 마지막으로 그 동생은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나를 보는 것이 자신의 상처를 더 기억나게 하고 힘들게 했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그 마음도 사실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같이 나이를 먹고 세월을 함께 만들며 그 동생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그렇게 자매처럼 지내자던 약속은 서로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나의 밝고 영민한 모습만을 지켜보았던 동생이 나의 어둠과 우울함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동생에게는 든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은 헛된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성폭력 피해를 기억하고 살아가는 그 순간이 얼마나 힘들지 그 동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지켜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나의 상처를 드러낸 사람과 그렇게 멀어지고, 나는 나의 상처를 감추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상처는 애써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결국 나는 내 상처를 주변에 드러내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특히 글을 쓰면서 내가 생존자임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처의 회복을 위해서는 나의 감정의 변화들을 이해 받고 지지 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이야기되지 못했던 나의 경험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중요한 과정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안전한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을 드러내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생처럼 누군가는 나의 어둠을 들여다 보는 것이 두려워서 떠나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상처를 나눈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에.
 
그 후 그 동생은 결혼을 했고, 시집살이에 힘들다는 소식을 종종 문자로 전해왔다. 시간이 조금 흘러 동생이 임신 소식을 전해왔다. 일 년여 만의 통화였다.
 
‘언니, 나 딸아이를 가졌대.... 이 아이가 딸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나 기억이 너무 생생해졌어. 언니, 나 너무 힘들어. 내 아이가 나처럼 그런 피해를 경험하면 어떻게 하지? 나 딸아이 낳고 싶지 않아.’
 
울먹이는 동생에게 너의 딸은 그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에게 그런 피해가 없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지만, 설령 아이가 피해를 경험하더라도 너는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잖아. 피해를 말하는 아이에게 너희 엄마처럼 창피하다며 뺨을 때리는 엄마는 되지 않을 수 있잖아. 우리는 그럴 수 있잖아. 우리 그런 엄마, 그런 이모가 되어주자.’
 
동생은 힘든 순간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 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전화통화로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지만, 서로가 좀더 단단해져서 서로의 손을 잡아줄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도한 피로감을 느끼면서 서로 옆에 있어주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서로가 안전한 거리에서 서로의 안녕과 평온을 빌어주는 것도 삶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일임을 나는 믿는다.
 
트라우마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내가 불안전한 상황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함이다. 내가 어떤 기억으로 힘들어서 충실하지 못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억지로 관계를 지켜내기보다는 나의 시간을 인정하기 위해서이다.
 
트라우마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은 트라우마를 잊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을 가지고도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잃어버린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법을 배우고, 그 경험을 가지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터득하는 일이다.
 
치유를 결심하고 나의 시간은 1초, 2초 느리게 어느 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금 그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20대의 어느 순간에 정지해 있는 듯하다. 나는 나의 시간에 맞추어서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과거를 사는 나는 여전히 어설프고 때때로 성숙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폭력 생존자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사건이나 시점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누구나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 사건이 제대로 설명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 없는 기억들 때문에 낯선 표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사건이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금지되고, 피해자가 사회의 편견이나 가해자들에 의해 치욕을 뒤집어 쓸 때 시간은 더더욱 멈추게 된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야 하기에, 트라우마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도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터득하기 위해 트라우마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과거의 망령들이 창자가 끊어져라 서럽게 오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피해자의 관점에서 과거가 제대로 이야기되고 설명되어지기를, 그래서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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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힐링 2012/12/30 [03:02] 수정 | 삭제
  • 눈물을 흘리고 나면 조금 나아질까요?
    과거를 살아가야 하는 것, 우리는 모두 과거에 잡혀 사는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스트릿 2012/12/29 [14:19] 수정 | 삭제
  • 마음이 먹먹해져서 눈물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