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삼월이라 해태장도 일이 끝났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는 빈 갈대막만 훤히 빛난다.
굴뚝에서 꾸불거리는 연기가 힘없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아침에 넣은 불에 남은 숯덩이가 타는 것이고 사람이 있으렷다.
-계십니꺼……. 계십니꺼?-
틈을 주며 연이어 두 번을 불렀지만 아무 소리가 없다.
-계십니꺼!-
문 앞으로 한발 들어서며 큰 소리로 부르는 순간 문이 열리며 문고리에 길게 달린 줄을 손에 잡은 함씨가 마치 불강생이처럼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머리를 내민다.
-아지매, 돈 때문에 오신 거 내 아는데……. 매칠만 더 참아 주이소. 나도 여태 돈을 못 받았으이- 하고는 그냥 문을 닫아 버린다.
인정 없기로는 인근에 자자히 알려지고 항상 찌푸린 얼굴에 허연 머리도 빗질이라곤 영 하지 않는 환갑 넘긴 함씨집 일을 소향어미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이 다녔지만 지금같이 얼굴을 앞에 두고 문을 닫는 상황 앞에서 갑자기 소향이 보기에 꼴이 말이 아니다. 화가 울컥 치민다.
-아저씨예!- 하고는 문을 왈칵 열어젖힌다.
-그 돈 몇 푼 된다꼬, 그라고 그기 벌써 언젭니꺼? 보름도 넘었는데, 사람을 밖에 두고 박정하게 문을 닫다이……. 지가 무신 거지입니꺼? 못 올 데를 왔십니꺼? 이기이 뭡니꺼!-
악에 받힌 소향어미의 목소리가 속에 갇혀 있던 화를 품고 서슬 퍼렇게 나간다.
눈을 치켜뜬 함씨가 방문 앞으로 나선다.
-오데 아침부터 소릴 지르고 난리고! 이 여편네가! 내가 줄 때 되면 줄낀데!-
방을 나가 뒤로 돌아서서 신발을 신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짓는다.
-여편네요? 지금 내보고 아저씨가 여편네라고 했십니꺼? 내가 누구 여편넨데 아저씨가 함부로 여편네라 부릅니꺼! 입 달맀다꼬 함부로 말하는 기 아입니데이!-
소향어미는 꼿꼿이 선 채 파랗게 독 오른 얼굴로 코앞으로 다가선 함씨를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어느새 나왔는지 뒤에 함씨 부인이 머리를 귀 뒤로 말아 올리며 나선다.
-아침부터 이 여편네가 와 이리 패악이고! 재수 없구로!-
부인이 영감을 가로막으며 소향어미 코앞에 선다.
-재수 없어요? 패악? 이 양반들이 정말로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일하러 다닌다고 사람을 이리 봅니꺼?-
허리에 손을 올린 소향어미는 부들부들 떤다.
-빨갱이 주제에……. 여가 오데라고 여편네가 아침부터 지랄이야!-
영감의 삿대질이 소향어미의 얼굴을 향한다.
멍하다. 소향도 소향어미도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에 절구통으로 머리라도 맞은 양 그저 멍하다.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영감을 방안으로 밀어붙이는 부인과 그녀의 입술이 연신 달싹거리고 씰룩거리며 무언가 내뱉는 것만 보일 뿐이다.
소향어미는 힘없이 땅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 모든 것을 그저 뒤에서 보고만 있던 소향이 맨땅 위에 퍼질러 앉은 엄마를 얼른 붙잡고 문 앞에 서있는 부인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우리 아부지는 빨갱이 아입니더!-
부인의 눈을 매처럼 노려보는 소향이다.
-너그, 여 발걸음 하지 마래이! 우리는 빨갱이하고 상종 안한다. 너그 땜에 우리꺼정 애 믹일 일 맹글지 말고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거라-
부인 역시 손사래를 치며 소리를 지른다.
-엄마야 일나거라! 가재이! 퍼떡 가자!-
두 모녀는 부둥켜안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돌아 나온다. 소향의 손에 부축을 받는 소향어미는 망연자실 허공만 쳐다본다.
대폿집 아지매가 그랬다. 지서장이 며칠째 돌아다니면서 뒷조사를 한다고……. 소향이네를 아는 사람은 전부 찾아다니며 빨갱이라고, 조심하라고, 잘못하면 다 영창 간다고…….
갑자기 소향의 팔을 뿌리치는 소향어미는 미친 여자처럼 발걸음을 옮기며 거의 뛰어간다.
-오델 가노? 엄마야!-
소향도 달음박질을 하며 엄마를 따라잡는다.
-내 이노무 지서장 가만 안둘란다!-
뒤도 안 돌아보고 헐렁한 옷을 펄럭거리며 소향어미는 달린다. 그 뒤에 애타는 소향이 엄마를 붙잡으며 끌려간다.
붙잡고 잡아 빼고 하는 통에 소향어미의 옷매무새는 미친 여자가 따로 없다. 앞머리는 눈 위로 덮어 내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소향어미는 텅 빈 장터를 지나며 아는 체하는 사람도 그냥 지나치고 다짜고짜 지서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선다.
-지서장 나오시오! 지서장!-
생전에 남과는 험한 싸움을 해보지 않고 살아온 소향어미는 비록 반정신 나간 상태이지만 그래도 입에서는 상말은 나오지 못한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던 순경이 놀란 듯 벌떡 일어선다.
-뭐요?-
-지서장 나오라 하시오! 당신들이 뭔데 우리 아바이를 빨갱이라고 온 동네 다니면서 소문내는 거요? 지서장 이리 나오시오!-
허리에 한손을 짚고 한손으로 한 발치 앞에 선 놀란 표정의 순경을 보고 삿대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순경은 소향어미의 손을 잡아내리며 눈을 부릅뜨고
- 아지매! 이 여자가 정신이 나갔나? 여가 오데라꼬 지금 난린교! 조용히 안 해!-
마침내 밀고 들어오는 소향어미를 반말과 함께 밀어붙인다. 악에 받힌 소향어미지만 젊은 순경의 힘은 막무가내라 뒤로 힘없이 나부라진다. 마른 삭정은 꼿꼿하지만 작은 손가락 힘에도 맥없이 부러지듯 소향어미는 나무둥치같이 뒤로 나자빠진다.
지서장이 나오고 소향이 달려들어 엄마를 안아 일으키고 순경이 고함을 지르고…….
-그래 나도 죽여라. 아아들 아바이 죽었다고 했지? 나도 죽을란다. 죽여라 죽여-
소향의 품에 안긴 어미는 넘어진 충격 때문인지 아직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상채만 비스듬히 일으키고 입을 달싹 거리며 말하지만 힘이 없다.
-이 여자 김병만이 식구 아이가?-
지서장이 넘어져 헐떡거리는 소향어미를 내려다보고서 순경을 향해 한마디하고는
-이 여편네가 정신이 있나 없나? 철창에 안 갇힌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할 일이지 여가 오덴데 난리야 난리는! 야! 너그 엄마 델꼬 지금 안 나가면 영창에 쳐 넣을 끼다!-
엄마를 안고 앉아있는 소향을 향해 험한 눈을 굴리며 한마디 던진 지서장은 몸을 돌려 옆의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는다.
비틀거리며 소향과 함께 일어선 어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초점도 흐려진 눈을 치켜뜨고 지서장을 향해
-그래! 영창에 넣어라! 내는 그거 겁 안 난다 인제! 당신들이 우리 아바이가 빨개이인 거 봤나? 봤냐고? 죽은 시체도 없이 말 한마디만 달랑 해놓고 온 사방 들쑤시고 다니는 당신들! 내는 빨갱이가 뭔지도 모리지만 왜 산사람을 마저 죽일라고 하는 기야! 그래! 죽이던지 영창에 넣던지 당신들 맘대로 하거라!-
앉아있는 지서장에게 달려들 듯한 어미를 뒤에서 안은 소향은 연신 엄마야 하고 외칠 뿐이다. 순경이 버둥거리는 소향어미의 팔을 잡아 누르고, 뻣대는 어미를 소향이 뒤에서 안아 끌고, 뒷걸음질을 쳐서 지서 문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순경이 문을 닫고 들어가고, 주저앉는 어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소향도 같이 쓰러진다.
읍사무소와 수협, 그리고 그 뒤에 술도가가 줄줄이 붙어있는 길목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지서 앞에서 쓰러진 두 여자를 쳐다보고 멈춰 서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하나 둘씩 더 모여든다.
-엄마야, 이칸다고 뭐가 될끼고!? 고만 가재이 지발!-
지서문 앞에서 -내는 우찌 살라고-만 읊어대며 우는 엄마를 일으켜 세우려는 소향의 안간힘에도 엄마는 뻗대고 버티며 땅을 두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소리친다.
소향은 창피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부끄럽다. 갑자기 많은 시선들이 자기들 모녀를 향해 집중하지 않는가? 헝클어진 옷매무새며 산발에 가까운 엄마의 머리며 나동그라져 떨어진 신발 한 짝이며……. 소향은 여전히 허리 굽히고 울고 있는 어미의 발에 우선 신발을 주워서 신기고 엄마 옆으로 와서 쪼그려 앉으며 다시 엄마에게 사정을 시작하지만 퍼질러 앉아 우는 엄마의 몸은 자루 속에 담긴 수수처럼 잡아 올리면 쏟아 내려가고 또 끌어올리면 밑으로 쏟아진다.
힘이 부치는 소향이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이고 눈 밑의 엄마를 보다가 귀에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들이 자기들 모녀를 두고 하는 말일 텐데……. 도대체 무슨 말들일까? 우리 식구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데…….
소향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지서문 앞에 다시 순경이 나와서 무언가 큰 소리를 질러대고 사람들은 소향의 눈을 피하며 서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고……. 그 중에는 얼굴이 익은 몇몇도 섞여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소향이 언젠가 장터에서 본 상이군인들의 싸움이나 걸뱅이 문둥이들이 생각난다. 그들이 싸울 때 장꾼들은 그저 외면하고 못 본 체하며 피하고 사라져주기만을 원했던 것을. 엄마가 그랬었다. 저 사람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마치 문둥이나 부황 들고 절룩거리는 귀찮은 상이군인들처럼 자기들이 그 취급 받고 있지 않는가?
소향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창피함도 잊었다. 얼굴을 꼿꼿이 들고 험한 얼굴로 연신 고함을 질러대는 순경의 얼굴도 노려본다. 안면식 있는 자들의 눈도 노려보며 당신들은 뭔데? 왜? 하며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천에 뜬 해도 올려본다. 삼월 하늘이 맑다.
몸을 굽히고 어미를 일으켜 세워 발걸음을 떼자 모인 사람들이 비켜난다. 자기들 모녀를 위해서 비켜나는 것이 아니고 상이군인이나 문둥이를 피하듯 비켜주는 것이라 소향은 안다. 그 중에 무당도 섞여 있었다. 여곽 주인여자도 있었다. 몇 걸음을 옮기는데 허둥지둥 맞은편에서 뛰어오는 여자가 있다. 대포집 아지매다. 덥석 소향어미의 팔을 안고 머리를 쓸어 올려준다.
무어라 말을 하지만 소향의 귀에 들리지는 않는다. 소향어미를 양쪽에서 부축하여 대폿집으로 가는 사이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흩어진다.
-인간들이 무신 구경거리라꼬. 매몰차기는 얼음장 같은 것들이라-
대포 아지매가 엄마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고 소향은 탁자에 딸린 의자에 앉는다.
조금 전 잠시 창피했던 기억과는 달리 지금은 왜 이리 평온하고 담담한지 이상하다. 대포 아지매가 고맙다. 자기들 모녀를 둘러싸고 보던 사람들이 다시 생각난다. 저쪽에 있던 사람들, 나는 이쪽에 서 있다. 갑자기 요 며칠 사이에 나도 모르게 우리 모녀는 이쪽으로 서있다. 넋을 잃고 우는 엄마는 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힘없고 낙심한 엄마는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아부지도 없다. 엄마도 걱정이 된다. 집에 있는 동생들도 걱정이 된다.
소향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다물어지는 어금니를 느끼며 일어서서서 방문을 연다.
-엄마야, 우리 가자! 아지매. 고맙심더!-
모로 누워있는 엄마 옆에 앉아있던 대포 아지매가 몸을 돌려서
-소향아. 너그 엄마 이래노면 안 된데이. 니라도 정신 바짝 차리야 될끼다!-
일요일 아침상을 거두고 소향은 누워있는 엄마를 남겨둔 채 숙향을 데리고 들로 나물이라도 뜯으러 나섰다. 일이라고는 이제 장날 대폿집에서 거드는 일 외에는 나선 것도 없고 또 어제 지서에서 넘어지면서 엄마는 머리 뒤를 어디에 받쳤는지 집에 와서야 봤지만 피는 흐르지 않아도 큰 혹이 불거져 있는 터라 그런 모습으로 어디 갈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서 봄나물이라도 캐고자 나선 것이다.
-숙향아, 낼 니는 종락이 델꼬 학교 가서 입학시키래이-
양지뜸에 졸졸이 나있는 쑥을 캐며 소향이 말한다. 한 발치 옆에 있는 숙향이 고개를 들고서 묻는다.
-니는 와?-
-낼 장날 아이가! 내라도 대포 아지매한테 가야지. 엄마는 오데 갈 수도 없다 지금. 니 엄마 뒤통수 봤제? 안 터지길 다행이제-
-언니야! 쿤데 오데서 다칬노?-
호미질을 거두고 숙향이 동그란 눈을 뜨고 묻는다.
소향은 할 말이 없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소향의 눈에는 아직 동생 숙향이 한참은 어린 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말없이 쑥을 캐는 언니를 보다가 더 묻지 않고 숙향도 그냥 앉은뱅이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며 나물을 캐나간다. 한참 후에 소향이 입을 연다.
-숙향아-
-와?-
-니, 내말 단대히 들어라. 엄마가 지금 마이 아푸다. 그라끼니, 내가 엄마 대신 일이라도 댕기야 돼서 하는 말이데이. 니가 집안일은 엄마 대신하고 아아들도 엄마 신경 안 쓰이도록 해야 된데이-
-엄마가 아푸나?-
숙향은 언니의 다음 말을 기대하지만 소향이 아무 말이 없자
-내 요새 가만 보이 이상타! 니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정말로 이상타!-
쪼그린 다리가 아픈지 숙향은 땅에 눌러앉아서 소향을 보고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다.
-아아들한테는 말하지 말거래이. 우리 아부지 인제 안 온다. 돌아가싰단다. 작년 가을에……. 한 보름 전에 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 소향은 그저 호미질을 계속하면서 말하고 있다.
-뭐라 카노! 니는? 아부지가?-
입을 벌린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숙향이 그제 눈에 눈물을 고이며 두 다리를 내뻗고 운다.
-시끄럽다 이년아! 지금 니 눈에 눈물 보일 때가 아이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된데이. 엄마한테도 아아들한테는 더더욱 안 된데이!-
소향은 이상하리만치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을 스스로도 믿기지 않지만 난간을 잃은 엄마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엄마 뒤에서 곁다리 노릇하던 때는 지났고 이제는 자신이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든 참이다. 그리고 그저 한 끼 국거리 될 성싶은 나물을 소쿠리에 담고 오면서 재차 숙향에게 다짐을 받았다.
숙향이 동생 종락의 손목을 잡고, 소향이 앞장서서 일찍 집을 나서며 말한다.
-엄마, 내 아지매한테 갔다 오꾸마. 종락이는 숙향이가 델꼬가이 걱정 안 해도 된데이-
읍네에 이르러 숙향에게 종락의 일을 다시 당부하고서 소향은 대폿집으로 갔다. 아지매는 벌써 육수를 다 냈는지 김이 설설 나는 고기덩어리를 썰고 있다.
-소향이 왔나? 엄마는 좀 우떤노?-
칼질을 멈추고 안됐다는 눈으로 측은하게 묻는다.
-괸찮아예. 뭐부터 하까예?-
의외로 팔팔하게 소매를 걷어 부치는 소향을 보고
-물부터 좀 길러 온나. 이따가 손님 밀어 닥치면 물 기를 시간 있것나?-
-알았심더-
따뱅이를 챙기고 지난 장날에 사놓은 양동이를 챙기고 빠른 걸음으로 나선다.
그 소향의 등 뒤를 보고 대포 아지매는 혀를 차며 도로 칼질을 시작한다.
바람은 조금 찬기가 서려있어도 날씨 좋은 봄이라 그런가 장이 북적된다. 막걸리도 연이어 두 번이나 배달되었고 국밥 그릇을 씻어내기 바쁘게 말아내야 할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저 정신없이 일하는 소향은 맘이 편하고 힘도 난다. 엄마가 하던 일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전에는 하지 못했는지 이상한 마음도 들었다.
숙향이는 종락이를 잘 챙기는지. 집에 있는 엄마는 뭘 하고 있을지. 향숙이나 노마는 싸우지나 않는지 하는 등등의 생각도 순간순간 들었지만 바삐 돌아가는 점방일에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도 모른다.
-소향아. 니 퍼떡 기물전에 좀 댕기 오거라. 이노무 쪽대가 휘어뿌맀다. 양은으로 된 기 좋더라. 큰 걸로 아예 두개 사온나- 하며 아지매는 전대에서 돈을 꺼내준다.
장으로 나온 소향은 해가 머리 위를 넘어간 것을 보고서야 오후가 된 것을 알았고 아직 파장이 되려면 한참은 남았지만 그래도 인파는 많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소향아! 니 소향이 맞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간난아기를 들쳐 업은 끝순이 언니다.
-언니 아이가! 내는 못보고 갈뻔 했다. 장에 왔나? 얼라는 아들인가? 언니야?-
끝순이는 같은 덕호에 살던 세 살 많던 동네 언니인데 두해 전인가 남해로 시집갔다. 시집이래야 난리통에 간 시집이라 겨우 명색만 시집이지 보내는 쪽은 그저 입 하나 덜고 또 한쪽에서는 일손 하나 더 얻어온 사정에 지나지 않은 터다.
- 그래! 내 니 몰라볼 뿐했다 아이가! 니도 마이 컸데이. 부모님 잘 계시제?-
업은 애기를 선 채로 얼러가며 끝순이는 묻는다. 부모님이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덕호리 사정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그 앞에는 초라하게 말린 생선 몇 가지와 미역 그리고 김뭉치가 맨땅 위에 놓인 보자기 위에 있다.
- 쿤데 여서 언니는 뭐하노?-
-야야! 내 오늘 장날이라 보리쌀이라도 사러 이것 가지고 나왔디만서도, 무시라! 무시라! 장사꾼들이 그저 먹을라칸다. 보리 한말 값도 안 줄라캐서 여 내놓고 있다. 팔리야 퍼떡 갈낀데-
-야 아부지는 오데 갔노? 언니야 혼자 왔나?-
-아이다, 내캉 같이 왔는데. 오자마자 친구 만나서 오데 갔는데. 오데 갔노?-
연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끝순이다.
소향은 물끄러미 애기 업은 끝순이를 쳐다보고 다시 끝순이 앞에 놓인 몆 푼 돼지 않을 물건을 보며 등에서 칭얼대는 애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언니야. 내 지금 대포집에서 일하고 있다. 바빠서 가야 된다. 반갑데이. 친정에 들리면 그때보자 언니야!- 하며 뒷걸음질 치는 소향을 향해 끝순이 한마디 보탠다.
-소향아, 니 우리 식구들 만나걸랑 내 봤단 말 하지 마래이. 여까지 와서 그냥 간줄 알면 섭섭하실끼다-
-알았다. 언니야. 내 안다! 가재이!-
끝순이는 끝내 자기 동생 얘기는 묻지 않았다. 끝순이 밑으로 연년생인 여동생이 돈 번다는 핑계로 집을 나간 것이 꽤 됐지만 마을에 나도는 소문을 들은 바로는 잘된 성싶지는 않았다.
양은 족대 두 개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신발 가게를 들러 종락이 노란 고무신을 하나 샀다.대포 아지매가 준돈에서 족대 사고 남은 잔돈으로 우선 사고 본 것이다. 엄마하고 그제 그 난리만 아니었어도 오늘 학교 입학시키는 종락이 모양이 그 꼴은 아니었을 텐데. 함씨네 돈만 받았어도 종락이 옷 한 벌은 샀을 테고.
소향은 대포집으로 서둘러 가면서, 끝순이 언니하고 몇 마디 나누고 또 신발 사느라 잠시 지체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지매한테 말하면 이해해줄 것이라 믿으며 바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