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내내 문화예술 행사가 넘치는 ‘렌’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10)

정인진 | 기사입력 2013/07/31 [01:36]

1년 내내 문화예술 행사가 넘치는 ‘렌’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10)

정인진 | 입력 : 2013/07/31 [01:36]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 농장으로 변한 렌의 시청광장, 아이들이 건초더미 위에서 뛰어 놀고 있다. (La ferme en ville 행사)   © 정인진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를 이용해 관광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문화재는 성이나 성당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르타뉴의 특색 있는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축제나 브르타뉴 특유의 종교 의식 등의 무형문화 유산들도 관광 수익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켈트 음악무용 축제와 ‘파르동’(Pardon: 용서)과 같은 종교 의식을 구경하러 온다.
 
그러나 내가 살고 렌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과거의 대단한 문화 유산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브르타뉴 지방에 비해 지역적 특성을 내보이는 문화 축제도 없는 렌은 관광도시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독특한 브르타뉴 지방의 수도 이야기
 
현재 브르타뉴 지방의 중심지는 렌이다. 그러나 항상 렌이 브르타뉴의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브르타뉴는 한 도시에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를 만들지 않고 여러 도시들이 돌아가며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도시들은 공작령으로서 브르타뉴 남쪽이나 동쪽에 주로 위치해 있었다. 디낭, 낭트, 플로에르멜, 러동, 렌, 비트레, 반느, 게랑드 같은 도시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서 행정과 사법은 봉건적 방식에 따라 반느-낭트-렌의 삼각구도 속에서 이루어졌고, 입법은 거의 모든 브르타뉴 도시에서 담당했다.
 
브르타뉴에 현대적인 의미의 진정한 행정 수도가 탄생한 것은 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199년까지 브르타뉴의 대주교가 머물렀던 ‘돌’(Dol)이 브르타뉴의 수도 역할을 했다. 그 후 여러 도시가 돌아가며 행적적인 정부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가장 많이 수도 역할을 담당한 도시는 ‘반느’(Vannes)였다.
 
15세기에 들어 브르타뉴 통치자인 공작이 낭트에 주거를 목적으로 성을 세우면서, 그가 거주한 ‘낭트’(Nantes)가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낭트에 대성당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지금도 낭트에는 그때 세워진 대성당과 공작이 생활했던 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16세기 브르타뉴가 프랑스에 병합된 이후, 낭트는 렌에게 정치적 우위를 내주게 된다. 그 이유는 렌이 낭트보다 파리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중앙 정부와 소통이 더 수월한 지리적인 위치가 오늘날 렌의 위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 뒤 1972년, 낭트가 속해 있는 ‘루와르-아틀랑티크’ 지역은 브르타뉴에서 다른 행정구역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낭트가 행정적으로 브르타뉴에서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브르타뉴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낭트는 브르타뉴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러 오는 관광객으로 넘친다. 이와 반대로 렌은 현재 브르타뉴의 수도라 하지만, 낭트에 비해 변변한 관광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렌에는 낭트처럼 화려한 공작성은커녕, 조금만 요새성 하나 없고 대성당도 낭트에 있는 것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렌은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특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렌이 선택한 것은 문화예술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매우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1년 내내 전개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 기점으로 펼쳐지는 렌의 문화행사
 
추운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되면, 렌은 문화행사로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이 활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바로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제’이다. 렌시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3월 초부터 거의 한 달 동안 펼쳐진다. 여성주의 관점의 학술 심포지엄과 토론, 영화 상영, 전시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  올해 열린 3.8 세계 여성의 날 포럼 현장에서.    © 정인진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방의 행정수도라고 하지만, 소도시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한 달 내내 펼쳐지는 엄청난 규모의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그 자체로 나를 압도시켰다.
 
특히 올해는 “몸과 정체성”이란 주제로 3월 2일부터 30일까지 행사가 열렸다. 몸과 정체성에 관심이 집중된 만큼, 아프리카 여자어린이들의 성기에 가해지는 잔혹 행위인 할례, 유방암으로 인한 가슴 절제 수술로 몸의 변화를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큰 관심을 끌었다. 또 인도의 ‘제 3의 성’ 히즈라(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를 함께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 다큐멘터리는 성 정체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했다.
 
3월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위르밴느’(urbaines: 도시적인)와 대학생들이 주최하는 환경 주간 행사도 열린다. 젊은이들의 행사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위르밴느의 한 행사였던 ‘너희 도시를 물들여라’ 프로그램이 끝난 뒤, 우리 동네 가로등과 나무, 자전거 거치대 등에 털실로 뜬 예쁜 장식들이 감겨 있는 걸 보았을 때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너희 도시를 물들여라' 행사가 끝난 후, 털실로 뜬 장식물로 꾸며진 자전거 거치대 모습.     © 정인진

또 환경 주간 행사에서는 환경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전시와 토론은 물론, 야생초를 발견하고 수집하기 위해 산보를 하거나, 유기농 빵을 직접 만들어보는 아틀리에가 열렸다. 생활 속에서 자연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구체적이고 창의성이 돋보이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펼치는 행사들은 유쾌하고 재기 발랄하다.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의 교류 돋보여
 
3월 말에는 ‘정신 건강 주간‘(La semaine de la sante mentale)도 열린다.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정신 질환을 예방하고 정보를 주려는 목적으로 여러 단체들이 모여 이 행사가 시작되었고, 1990년부터는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다. 올해는 ‘도시와 정신 건강’이라는 주제로 정신 질환 예방은 물론, 도시화된 현실 속에서 스스로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소개되었다.
 
▲  여성노인들의 공동 주거 ‘바바야가들의 집’을 만든 테레즈 클레르(Therese Clerc)의 강연 모습.   © 정인진
지금은 ‘상업이 자기 이야기를 할 때’(Quand le commerce se ranconte...)라는 재미있는 제목으로 18세기부터 20세기 렌의 상업역사를 보여주는 문화행사가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3월 말부터 시작해 9월 15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프랑스 혁명기에서 1980년대까지 렌의 상업역사를 주목할 거라고 한다. 특히 렌 시내에 있는 전통적인 상점들을 둘러보는 프로그램과 1970년대와 1980년대 렌 상점 점원들의 투쟁사를 보여주는 강연은 흥미로워 보인다.

 
3월 중순부터 시작해 9월 1일까지 펼쳐질 ‘이주’(Migrations)를 테마로 하는 행사도 주목을 받고 있다. 매년 브르타뉴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사의 일환으로, 올해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브르타뉴에서 파리, 캐나다, 미국 등지로 떠난 브르타뉴인들과, 반대로 모로코나 포르투칼, 알제리 등에서 브르타뉴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다루고 있다.
 
이주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강연, 전시회, 그리고 브르타뉴로 이주해온 다른 국가들의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주’ 행사는 5월 21일 ‘국제 문화적 다양성의 날’을 기념하는 축제에서 절정을 이뤘다. 렌에서는 5월 18일 토요일에 이 축제가 열렸는데,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알리는 부스를 차리고 예술공연을 펼치며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동체의식이 깔려있는 렌의 예술축제
 
렌시의 문화행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6월에는 넓은 렌 시청 광장을 농장으로 꾸며, 브르타뉴 지역의 농업 구조를 체험할 수 있게 했다. 7월 초에는 숲과 정원을 산책하면서 자연을 발견하는 ‘담비축제’(La fete de l’Hermine)도 개최되었다.
 
▲ 매년 렌에서 열리는 뤼미에르 쇼의 한 장면 (2012년)    © 정인진
본격적인 여름 바캉스 철이 되면 갖가지 예술축제가 벌어진다. 재즈 페스티벌, 브르타뉴의 전통 무용, 음악 축제인 ‘페스트노츠’(fest-noz: 밤의 축제), 한 달 반 동안 매일 밤 열리는 ‘뤼미에르쇼’가 8월 말까지 이어진다. 여름 행사들이 끝나면 가을부터는 과학 행사가 내년 1월까지 펼쳐질 것이다.

 
렌시는 이처럼 다양한 행사들을 1년 내내 개최하면서 유형, 무형 문화재가 부족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렌시의 대부분 행사들은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의 참여에 기초해 있고, 진보적인 관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회당이 우세한 도시답게 많은 문화예술 행사들은 인권 의식과 공동체적 가치관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불어 문화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확장시키려는 목적을 표방하고 있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 이상으로, 렌시의 행사들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며 이들의 사회 의식과 문화 수준을 동시에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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