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포구 앞에 선 두 사람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8화

김담 | 기사입력 2013/08/06 [11:28]

어두운 포구 앞에 선 두 사람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8화

김담 | 입력 : 2013/08/06 [11:28]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파장에 가까우면 늘 그렇듯 점방 안에는 술꾼들이 많다. 헤어지기 아쉬운 섬사람과 뭍사람들의 말보따리가 풀어지면 막걸리가 몇 순배는 돌아야 일어서기 일쑤고, 물건이 좋아서 든든히 장사라도 잘한 장돌뱅이는 자축으로 한잔 기울이고, 또 갓 쓴 촌로들의 할 일 없는 장날행차는 술잔 끝에 듣는 며느리나 늙은 마누라의 부름이 있어야 끝난다.


그래서 술이 많이 나도는 늦은 오후는 소향의 일이 훨씬 가벼워 주로 그릇을 씻어내고 물도 이고 오고 치우거나 닦는 등 여유롭게 허리도 펼 수 있다.


마침 물 한 동이를 이고 돌아오니 탁자 끝에 앉아있는 보살이 눈에 띈다. 옆자리에 한 남정네와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있다. 물을 머리에 인 소향은 인사를 할 수도 없었지만 인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향을 본 무당 역시 본 체 만 체 옆의 남정네와 얘기를 계속하며 다리를 걸상에 올려 좌정을 한다. 물을 통에 내려 붓자 대포 아지매는 -아나, 이거 보살님 내다 디리라- 하며 말은 국밥 그릇을 내놓는다.


이른 저녁을 때우려 왔는가 생각하며 소향이 무당 술잔 옆에 국밥을 놓자 무당이 소향을 보고 나직이 한마디 한다.
-니 이따 내 좀 보고 가거래이. 여곽에서 기다리꾸마!-
-내는 그 안갑니더!-
짧은 말을 던지고 소향이 돌아선다. 눈에 자꾸만 엄마와 자기를 쳐다보던 세상 저쪽에 있던 보살이 미운 것이다.

무당은 조금은 당황한 듯 부엌으로 들어가는 소향의 등 뒤를 쳐다보다가 옆의 남정네와 말을 주고받는다. 소향은 보살이 있는 점방으로 나가기가 싫어서 부엌에서 이런저런 일을 찾아서 밍기적거리고 있는데 아지매는 변소에라도 가는지 앞치마를 풀고 나가버리자 곧바로 보살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대포 아지매의 눈을 피할 기회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내 말 듣거래이. 내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이데이. 내보다 너그한테 이로운 일인데 니가 그랄래? 말이나 자세히 들어보는 기 좋다. 내 가다리꾸마!- 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부엌을 나간다.


너그? 그럼 엄마와 나를 포함한 우리식구들 모두? 이롭다? 문득 그 보살이 말했던 논이 생기고 밭이 생기고 하는 것이 떠올랐다.


일손을 멈추고 생각해보는 소향은 너그한테 이롭다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회전하는 것을 느낀다. 그냥 가는 시집은 아니라고 했다. 족두리도 안 쓴다고 했다. 아들만 낳아주면, 이라고 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알지만, 아니 처녀로서는 남사스러운 일이고 집안의 망신일수도 있는 일인 것을 충분히 아는 소향이지만 자꾸 그놈의 논도 생기고 밭도 생기고 하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낮에 보았던 끝순이 모습도 떠오른다. 보리쌀 사러 장에 나온 초라한 행색이 비록 족두리 쓰고 간 시집이지만 결코 부럽지 않게 보였다. 돈 벌러 집 나간 끝순이 동생도 집에 돈 부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깟 족두리 씌우고 시집보낸 집도 우리 집이나 별반 다른 게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좋지 않은 소문만 나돌지 않는가? 


내가 우리 식구를 이롭게 할 수 있다? 까짓 한번 들어나 보자! 어차피 저쪽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수군대는 참인데 보살 얘기 듣는다고 무슨 대수라도 나겠나? 아직 대포 아지매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향이 점방으로 나가서 무당에게 말한다.
-그래도 지는 그는 가기 싫습니데이. 이따 포구에서 봐예- 하고는 돌아선다.


말은 들었지만 아무 반응도 안 보이는 무당은 그저 앞에 놓인 사기 술잔을 들어 들이킨다.
-자는 아는교? 무신 말인지?-
옆의 남정네가 묻지만 무당은 대꾸도 안하고 그저 생각에 잠기어 권련을 말아 불을 그어댄다.


기집 팔아본 것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드물겠다. 그 년의 꼭 다문 입이 지에미의 얼음장 같던 얼굴하고 별반 다르지 않지만 내가 누군가? 그깟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남의 눈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는 사람들 한두 번 봤나?


거리에 나앉게 생기고 배때기에서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별수 없어지는 게 인간이렷다. 그래도 혹시라도 소향이 건이 성사 안 될 것을 생각해서 그간 남해를 달포가량 돌면서 이런저런 처자나 과부들을 염탐해 보았지만 섬이란 원래 일손 하나라도 더 아쉬운 형편이라 덥석 물어댈 만한 먹이감을 놓아도 낚이는 여자가 드물었고 그나마 눈치를 보이던 것이라곤 아이 두셋 출산한 과부나부랭이라 두말도 않고 거절했는데……. 돈이 될 만하다고 예감이 드는 이번 일에는 저 소향이 년이 딱 맞아떨어지는 물건인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영 불편하다.


벌써 상주 태봉을 떠난 지도 거의 넉 달이 되가는데……. 마음 급한 안방주인이 혹시라도 다른 데서 씨받이를 구하지 않을까 조바심도 생기는 무당이다.


그래, 소향이년이 일단 나를 보자고 했겠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미끼는 물었겠다. 대폿집 아지매한테서 들은 말과 이틀 전에 지서 앞에서 우연히 본 모녀의 난리굿이 측은한 마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논이 두어 마지기 생길 형편에 지금 누구 생각해줄 때란 말인가? 또, 이게 어쩌면 오히려 내가 그 집을 살려주는 부처님 은덕을 한 아름 안겨주는 일일수도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내가 이리도 저 년한테 눈치를 본단 말인가? 


헛기침을 하며 당당히 일어선 무당은 언제 들어왔는지 부엌에서 연신 분주한 대포 아지매를 향해
-아지매, 내 간다. 돈은 여 있는 사람이 줄끼다- 하고는 남정네를 향해 -그라모, 기별하소. 내는 여곽에 매칠간 더 있을거이- 하고 뒤도 안 보고 밖으로 나선다.


무슨 수작이라도 꾸미는 모양이다. 가끔은 그렇게 저렇게 남정네들을 꼬이고 돈 안내고 술 먹고 밥 먹고 형색 보아가면서 심지어 궁한 살냄새도 맡기도 하는 털보무당이다.

파장은 되었지만 해가 길어진 탓에 사람들의 발걸음 역시 줄지 않는다. 저녁 끼니를 국밥으로 때우는 장꾼하며 여기저기 탁자를 채운 사람들의 술심부름에 소향이 어두워질 때까지 바빴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두워져야 남의 이목을 피해 편하게 보살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느긋하게 일하고, 엄마한테 주지 않고 자기에게 직접 건네주는 천환짜리 지폐를 받은 소향이 국 한 냄비를 얻어들고 대폿집 문을 나섰다.


포구라고는 했지만 소향이나 무당 모두 그것이 정착장이라는 뜻인 줄 아는지라 장소는 쉬이 가려졌지만 시간은 마땅히 정해놓은 것이 아니어서 걸어가는 소향의 마음이 조금은 믿기지 않는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크고 작은 배들만 줄에 묶여 파도치는 대로 일렁이고 있었다. 시커먼 검은 바다는 마치 소향에게 닥쳐올 알 수 없는 그 어떤 앞날처럼 어둡게 출렁일 뿐이다.


돌아가 버릴까? 그 생각을 하면서 소향은 밤바람에 옷섶을 여미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긴 외투를 걸친 것이 보살이 틀림없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입을 열지 않고 얼굴이 면전에 와서야 한마디 한다.
-지 왔는데예-
-밤이 되이 찹다. 니가 와 여곽에 오기 싫어하는지 들어서 아이께네 내 여 왔다. 너그 엄마한테도 말한 적이 있지만-


무당이 바람이라도 막을 양 팔짱을 끼고 목을 움츠리며 말을 하는데 다짜고짜 소향이 가로막는다.
-보살님예-
나직하지만 또렷이 부르는 소리에 말문이 막힌 무당은 -와? 내말부터 안 들어보고?- 한다.


재차 보살이라는 이름을 한번 더 부르고 소향은 무당의 얼굴을 비껴 바다를 보며
-보살님예! 지는 한 가지만 빼고는 다 괜찮습니더. 지금까지 지는예. 남의 뱃전에 떨어진 멸치 한 마리라도 그저 주서본적도 없고예. 여기 이 국처럼예, 주면 고맙게 받지만 그저 달라고도 안합니더-
손에 든 국 냄비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말을 이어간다.


-아무리 엄마하고 지가 일 다니도예. 챙피한 것도 없습니데이. 지가 보살님한테 여로 오시라한 건예. 만일 엄마가 알면예, 안 되서 캅니데이. 무신 일이 있어도 엄마는 지금 알면 안 됩니데이. 고거 하나만 약속해 주이소. 지가 사람들을 피하는 기 아이고예. 사람들이 지를 보면 엄마가 알게 되기 때문에 여로 오시라 한거라예-


비록 중간 중간 더듬거리며 다음 말을 찾는 어설픔은 있었지만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준비된 말이었다.


소향의 말이 끝났지만 어안이 벙벙한 무당은 기가 차서 말을 못한다. 이년이 그 숯검댕이 머리 이고 어미 뒤나 따라다니던 년이 맞는가? 자기 앞에서는 거의 모든 여인네들이 버선발을 치마로 감춰가며 몸을 조아리고 자기 말을 마치 부처님 말씀이나 천지명신의 말씀으로 여기며 퍼질러 앉은 자기 앞에서 기를 피지 못하는데. 요년은 자기를 칠흑 같은 야밤에 찬  바람 부는 바닷가로 나오게 만들고 자기를 앞에 세워두고서 일장연설을 늘어놓겠다? 생각보다는 당돌한 년이겠다!


-내는 벌써 너그 엄마하고 니 애기 했다. 물론 펄쩍 뛰고 말았지만-
-엄마는 지한테 입도 뻥긋 안 했심더. 그라이 지금부터는 보살님도 지하고 한 약속을 꼭 지키주이소. 절대로 엄마가 알게 해서는 안 됩니더!-
-오이야! 내 지키꾸마-
소향은 팔이 아픈지 들었던 냄비를 땅에 내려놓고 무당을 향해 똑바로 몸을 돌려서 -말씀해 보이소예- 하고는 얼굴을 응시한다.


미쳐서 정신 나간 장정도 깔고 앉아 굿풀이를 할 정도로 담이 큰 자신인데 도대체 이 열여덟 계집이 무슨 술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안 보이는 동아줄로 마치 자신을 꽁꽁 묶어대는 것처럼 오직 기가 차지만 말은 해야겠다.


-그래! 전에도 니한테 말했지만 아들 없는 집이 있다. 그 집에 니가 가서 아들만 낳아 주모  니한테 논 서 마지기는 준다켔다-
어둠 속에서도 무당의 눈을 놓치지 않던 소향이 -자식이 없습니꺼? 아들이 없습니꺼?- 하고 묻는다.


아뿔사! 말 하나로 밥줄 이어가는 무당이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하다.
-내가 아들이라 켔나? 그 집은 아예 자슥이 없다 아즉!-
어두워서 다행이지 백주대낮이었으면 벌건 얼굴이 들켰으리라.


-그라고 왜 오늘은 논이 서 마지기입니꺼?-
수사도 없고 이제는 더듬지도 않는 소향이 또렷이 다시 또 묻는다.


무당은 왜 이리 오늘은 말주변이 안 먹히는지 황당하다. 한 마지기라도 더 떼어 먹으려는 속셈으로 어설피 마지기 수를 말했는데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서 마지기다 너 마지기다 하는 기 결정된 기 아이고 앞으로 다 말 맞추기 나름이지-


무당은 소향과의 불과 몇 마디의 얘기에 등줄기에 땀이라도 배는 듯 휘둘리는 자신이 마치 처음으로 시도했던 굿판에서 정신없이 우왕좌왕 했던 것과 같다. 기가 찰 노릇이다.


-지가 말씀 디릴께예. 지는 예. 아부지도 안 계시고예, 동생들이 넷이나 있습니더. 어무니는 지하고 아무리 품을 팔아도 살기 에룹습니더. 논 다섯 마지기만 주이소. 그라모 지는 보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겠십니더-
높낮이도 없이 떨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나오는 결연한 소향의 말이다.


어안이 벙벙한 무당은 생각에 잠긴다. 우매하고 무식한 중생들 등 쳐먹고 우려먹고 속여먹고 살기를 거의 삼십 년이 넘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자기가 휘둘려 당하기는 처음이렷다. 광주 유곽에 딸 팔아먹었다고 손에 낫을 들고 죽일 듯 달려들던 진주 송답골 노인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겨낸 자신인데 요년의 맹랑한 놀음에는 한숨이 나온다.


-니가 지금 다섯 마지기라 켔나? 니 지금 정신이 있나 없나? 요새 그기 돈이 얼마라고……. 니! 알고는 하는 말이가!-
꼿꼿한 소향의 기라도 꺾어볼 요량으로 무당은 목소리를 키웠다.


-지는예! 그기 있어야 합니더! 그 돈이 얼맨지는 지는 잘 모립니더. 하지만 지는 그거라야 됩니더! 엄마는 알몬 안 됩니더. 약속은 꼭 지키주이소 보살님예. 보살님 얘기도 지가 알았고 지 얘기도 보살님이 아싰지예. 그라모 지는 갈랍니데이. 어무이가 누부계시서 퍼떡 가봐야 됩니더!- 하고는 국 냄비를 들고 어둠 속으로 가버린다.


머리가 띵한 무당은 소향이 가는 뒤를 보고 논이 두어 마지기는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의 꿈도 같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춘삼월 홍매화는 과히 매력적이라고 생각 든다.
지리산 골짜기 암자에서 부엌데기로 밥하고 빨래하고 점백이 보살 밑에서 커오면서 어느 날 봄에 피던 매화가 눈에 띄고  파란 하늘 속에 있던 뭉게구름 한 점이 숨이 콱 막히게 가슴 한가운데를 막던 때가 생각난다. 그냥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싶던 날이었다.


그날 본 암자 뒤켠에 피었던 홍매화가 결국 솜털을 갓 벗은 무당에게 옷 보따리 하나 안기고 떠나게 만들었다. 그것이 벌써 삼십 년하고도 수년이 더 넘었지만 낙동강 둔덕 양지에 피는 매화가 그날 보았던 홍매화처럼 여전히 무당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달라진 것이라곤 그저 얼굴에 붙은 지렁이 같은 굵은 주름과 눈꽃 서려 붙은 귓가의 흰  머리터럭들이다.


그래도 얼굴을 지나치는 춘풍은 무당을 그 옛날의 어느 날로 되돌릴 만큼 아릿한 힘이 있다.

벌써 넉 달을 비운 경상도 발걸음이다. 원래 뭐 하나 정해놓고 다니는 무당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머릿속에 일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무당이건만 이번에 넉 달여를 삼천포 근처에 머문 것은 남해섬에서 바람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고 또 마땅한 처자 하나 찾아보려고 이리 저리 눈알 굴리다보니 이렇게 예상보다 늦게 경상도로 오게 된 것이다.


오긴 왔고 또 지금 신덕마을에 아래채를 얻어 보따리를 풀고 원래 목적지인 태봉으로 아지매를 만나보러 가는 길이지만 도대체 신명나는 발걸음은 아니다.


가랑이 벌려 돈이라곤 벌어본 적도 없는 새파란 애송이년이 논을 다섯 마지기 내놓으라니? 여자들 거래나 흥정에는 누구보다도 능수능란하다는 무당 자신도 선뜻 입 밖에 내놓기 어려운 금액이건만 대가리에 피도 덜 마른 년이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논 다섯 마지기 말을 내 놓고는 자기를 그 깜깜한 바닷가에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기가 찰 년이렷다.


그런데 슬며시 화가 나는 것은 그년 등 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그냥 보내버린 자신이 한심하고 꼭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이다. 목에 걸린 담뱃진이라도 뱉어낼 양 캭 훑어내어 가래침을 한바탕 쏟아내고 털보무당은 강둑길을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어차피 애초에 품었던 논이 두 마지기 정도 생길 성싶은 발걸음이 아니니 힘이 나는 것도 아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화사한 햇살하며 코끝을 아리는 봄 내음에 취하여 더더욱 발걸음은 느리다.

멀리 태봉산이 보이는 들에는 여기저기 밭갈이가 한창이다. 소를 앞세우고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솜털 같은 봄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울린다. 무당은 마른풀 위에 주저앉아 허리춤의 담배를 꺼내 한 대 말아 피우며 도대체 아지매한테 어떻게 운을 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생각을 해보려고 눈길을 먼 하늘로 두었건만 생각은커녕 자꾸만 울화통이 터진다.
아무것도 안 되면 막살 놓면 되지! 까짓것!
남은 권련을 흙 속에 비벼 넣고 벌떡 일어나 치마폭을 움켜잡고 태봉으로 향한다.


동네 어귀에서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누런 개다. 짖지도 않고 그저 꼬리를 설렁거리며 코를 신발에다 대고는 따라온다. 오거나 말거나 솟을대문으로 들어서서
-계시오? 누구 계시오?- 부르며 마당 가운데로 느리게 걸어 들어가는데 안방문이 열린다.
앉은 채로 마당의 여자가 무당인 것을 알아본 여인이 아무 말 없이 나와서 대청 끝에 이르러서야 -보살님이시네- 한다.


-집이 조용해서 아무도 안 계시는 줄 알았심더- 하면서 무당은 댓돌에 발을 걸치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여인도 마루에 다리를 곧게 세우며 내려앉는다.
-다들 나가고 지만 있네요. 언제 오싰습니꺼?-
-아, 오기야 한 사나흘 됐지만 몇 달 비았다꼬 사람들이 찾아와사서. 시간이 좀 걸맀네요-
오자마자 하룻밤 자고 왔건만 그래도 댁의 일이 내게는 그리 중한 것이 아니라오 하고 넌지시 암시를 하고픈 무당이다.
-그래 겨울은 잘 나싰능교?-
호칭 없이 한마디 물으며 여인은 눈을 휘둘러 집 안팎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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