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아지매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심니더-
소향은 생각이 정리된 듯 짧은 말로 입을 닫는다.
점심도 건너뛰고 세 여자가 방안에서 입씨름을 하였으니 농사철이었으면 이미 오후 새참 즈음이라 무당과 소향의 배에 허기가 당차게 전달된다.
큰아지매는 문갑을 열고 비단으로 된 버선본 주머니를 찾아 그 속에서 지전을 몇 장 꺼낸다.
-보나 안 보나 오시느라 때도 건너뛰었을 건데 말이 길어지다 보니 점심도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장에 간 동서가 올 시간이 되었으니 여기 이것으로 가시는 길에 요기라도 하시고 나머지는 여비로 쓰시지요-
하면서 돈을 무당 앞에 밀어낸다.
눈치 빠른 무당의 눈에 적어도 몇천 환은 되리라 짐작이 되니 허기에 슬슬 치밀던 화도 봄볕에 걷히는 안개같이 싹 사라지고 입이 길게 찢어진다.
-아이구, 역시 큰댁 아지매라 손도 크시네. 아, 우리야 굶는기 먹는 거보다 더 잦은 사람들인데 걱정꺼정 안 해주시도 됩니더. 야야 소향아, 우리 가자. 이 집 작은댁 오기 전에 퍼떡 일나서자-
슬그머니 지전을 손에 움켜잡아 허리춤에 꽂아 넣고 다시 한마디 더 보탠다.
-그라모 우리는 언제 오민 됩니꺼?-
큰아지매는 잠시 소향을 바라보다가
-일을 하기로 한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쪽 일은 저한테 일임하시고 그쪽 일은 보살님이 알아서 하시되 빠를수록 좋습니다. 길게 뽑으려던 엿가락은 꼭 끊어지는 법. 정리되는 대로 오시도록 하세요. 한 번 더 당부합니다. 소향의 일신상의 문제가 시끄럽지 않도록 알아서 하시고-
-그기사 지가 다 매조집니더. 그라고 아입니더!-
입 끝까지 올라오는 자기 몫의 구전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무당은 일어선다. 일을 이만큼 성사시켜 놓았으니 오랜만에 목돈 구경을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한지라 무당은 뱃속에 나비 한 마리가 훨훨 날아다니는 것처럼 달착지근한 조바심으로 가득 차 있다.
무당의 활개 치는 걸음을 따라잡느라 소향도 고무신이 벌써 두어 번 벗겨질 만큼 바쁜 걸음재촉을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엄마 얼굴로 가득하다. 대구로 장사길 나선 다음날 집안일을 숙향이에게 당부하고 무당을 따라나섰으니 지금쯤은 필시 엄마가 어렴풋이 짐작은 할지언정 그래도 다 큰 딸년이 삼일씩이나 외간 잠을 잔다는 것에 호된 질책을 당할 것은 분명하다.
배고픈 것도 잊은 채 발밑만 쳐다보고 무당을 따라가는 소향의 마음은 그저 착잡하다. 엄마에게 할 말도 마땅히 마련돼 있지도 않고 남정네가 뭔지도 모르는 열여덟 자신이 아이를 낳느니 닷 마지기 논을 주고받느니. 그저 캄캄하고 답답하다가 더럭 겁이 난다.
벌써 태봉이 저만치 멀어지고 낙동 강둑이 먼발치에 보일쯤 갑자기 소향이 악을 쓰고 주저앉는다.
-악-
앞서가던 무당이 화들짝 놀라서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눈을 감싼 소향에게 달려든다.
-와? 와카노? 니 와이라노! 오데 아푸나?-
연신 소향의 팔을 잡아 흔들며 무당도 당황한다.
-야 야! 말 좀 해라! 무신 영문이고?-
소향은 우는 것도 아니었다. 한 차례 악쓰고 난 후에 아무 기색도 없다. 그저 숨 쉬는 소리밖에 없다. 무당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여전히 소향의 머리새를 만지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머리를 숙인 채 올려보고 안달이던 중에 갑자기 소향이 고개를 발딱 일으키고 먼 산을 응시한다.
아침에 점심까지 굶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 눈이 퀭한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 말 없이 낙동강 너머 먼 산을 바라보는 소향의 눈빛은 마치 호안을 연상할 정도다.
갑자기 악에 받친 소향 때문에 놀란 무당이 이번에는 결연한 눈으로 무얼 노려보는 소향을 보며 덩달아 아무 말도 없이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것이 실성했나? 신병이 왔나? 빙의가 도래했나? 지전이 눈앞에 쌓일 판에 이 년이 무신 난리인고?
무당이 입을 헤하고 벌린 채 정신없이 소향을 보는데 갑자기 소향이 벌떡 일어서서 치마 끝을 털어 감싸 안고
-보살님 가입시더!-
한 마디 남기고 이번에는 꼿꼿이 앞을 보며 걷는다.
여전히 땅에 앉아있는 무당은 소향이 열댓 발을 뗀 후에도 그냥 그대로 있다.
저 년이 무신 영문으로 악쓰고 지랄을 부렸노? 보아하니 지 정신은 분명하고 아픈 데도 없는기 분명한데. 말도 없이 제하고 싶은 대로 하는기 도무지 알 수가 없겠다. 케도 물건은 고대로이니. 그저 내 손에 구전 들어올 때꺼정만 저 년을 건사해야지 별수가 없다.
무당이 이번에는 소향의 뒤를 따라 걷는다. 여전히 소향의 악이 궁금하지만 뱃속의 난리가 더 아우성이라 무당은 소향을 부른다.
-소향아 안 되겠다. 저기 가서 뭐 좀 묵고가자-
그 소리를 들은 소향도 비로소 현기증이 아찔하게 나면서 쪼로록 소리가 배에서 들린다.
강변에서 제법 떨어진 작은 마을의 주막에 앉은 두 여자는 변변찮은 국과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봄의 향취가 그윽한 쑥 된장국은 배가 불러도 입맛이 당길 텐데 해가 중천에 걸린 때 첫 끼니를 다신 무당은 입가를 손바닥으로 슬슬 닦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봄쑥에 도다리국만 최고인줄 알았디만 그기 아이네. 이 동네는 산천이라 된장을 넣어도 그 맛이 우리 남도의 도다리 쑥국 저리 가라 합니더. 아지매요-
옆에서 나물을 다듬던 주인여자도 웃는 얼굴로 돌아보며 답한다.
-그캅니꺼? 그지예? 뭐니 뭐니 해도 봄나물이 최고지예 요새는-
소향도 허기를 때우니 피로가 확 덮쳐오는걸 느끼지만 천리 길 밖에서 기다릴 엄마 생각에 마음이 아득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게 습관처럼 인이 배긴 무당은 치마를 훌쩍 걷어 올려 아예 허연 생살까지 내놓은 다리 한쪽을 평상에 올리고 주인여자와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는데 소향은 빨리 가고는 싶지만 또 빨리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그들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산등성에 얼마 남지 않은 해만 한참을 쳐다본다.
- 보살님예, 우리 퍼떡 가야 안 됩니꺼?-
-그래! 내 정신 좀 보게. 소향아, 가재이. 오늘 김천서 잘지 부산서 잘지 모리겠다만은 우야든지 가보자 퍼떡!-
이십여 리를 걸은 후 상주서 버스를 타고 김천에 도착했지만 이미 당일로 삼천포에 도착할 방법도 시간도 없는 두 여자는 허름한 역전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일찍 부산행 열차를 탔고 다시 진주를 거쳐 삼천포로 돌아왔을 때는 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소향아. 내는 여곽에 묵고 있을끼다. 간다 해도 남해나 창선도일 끼고. 니는 그저 맘 단대이 묵고 너그 어무이하고 얘기하거래이. 내 기다리꾸마-
짧지만 너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어찌 하라는 충고도 없다. 그나마 무당조차 휑하니 떠나고 난 차부에서 소향은 어디로 가나 하고 난감한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대폿집으로 옮긴다.
무싯날이고 또 저녁이 다 된 읍내는 그저 한산하다. 해풍이 시원하다. 바람에 묻어오는 소금도 달게 느껴진다. 썩은 생선내음도 구수하다.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도 정겹고 그저 삼일비운 고향이건만 한참이나 새롭게 느껴진다.
-아지매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며 안을 보고 나지막이 부른다.
목소리를 기다리고나 있듯 와락 안방문을 열어젖힌 대포아지매는 다짜고짜 고함을 친다.
-이년아. 니는 너그 엄마 생각은 꿈에도 없나? 우째 아무 말도 없이 사나흘씩이나 집을 비우노? 이것아-
소향이 어디를 갔다 오는지 엄마도 알 것이고 대포아지매도 알 것이다. 내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이미 눈치를 다 챈 대포아지매도 가엽고 안됐다는 마음이지 어디 소향을 나무라려고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고무신을 돌려 신은 대포아지매가 다정히 소향의 두 손을 부여잡고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다.
소향은 갑자기 섧다. 숙인 고개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기어이 소리까지 내고 운다.
-오야. 내 안다. 소향아-
대포아지매는 소향의 등을 어르며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올려준다. 손등으로 눈을 훔친 소향이 울먹이며 묻는다.
-우리 어무이 이번 대구장사는 잘하싰답니꺼?-
-이것아. 니 땜에 너그 엄마 잠도 못자고 묵도 안한다. 니가 지금 엄마 장사 물을 때가 아이다 이것아 쯔쯔-
하면서 혀를 찬다.
-이번 행차는 우찌 됐답니꺼?-
재차 묻는 소향이다.
-니 때문에 너그 엄마는 그런 거 얘기할 정신이 없었데이. 퍼떡 집에 가봐라-
소향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이 없다. 여전히 대포아지매 손에 잡힌 두 손을 보면서 다시 울기 시작한다.
-우짜까? 내가 니캉 같이 갈까?-
대포아지매의 헤아리는 마음이 묻은 말이다.
소향은 울먹이며 고개만 끄덕인다.
-아이다. 그기 아이다! 너그 동생들도 있는데. 그칼 일이 아이고. 니는 여 있거래이. 내가 가서 너그 엄마하고 오는기 낫겠다-
고갯길도 있고 한걸음 길을 마다하지 않는 대포아지매가 소향은 한없이 고맙다.
다시 눈물이 도는 소향을 대포아지매는 나무의자에 앉히고 치마끈을 묶으면서 나선다.
-니 저녁 안 무것제? 내가 오민 같이 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