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묵은 흙내음이 풀풀 나는 방안에 방문조차 열지 않은지라 밤이 되었다 할지라도 남은 열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대포아지매는 눕자마자 잠에 빠진 소향을 옆에 두고 생각이 많다. 머리맡에 둔 돈 보따리를 생각하자니 덜컥 겁도 난다. 저 돈을 삼천포까지 잘 지니고 가야하는데…. 철없이 네 활개 치며 자고 있는 저 어린것이 어찌 여자 노릇하여 애를 낳는단 말인가? 다 하늘이 알아서 하는 이치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맞이한 첫 남정네는 스물두 살 적이어서 알건 알만한 나이였거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또 본처가 있는 지붕 밑에서 아까 본 그 젊은 영감하고 어디서 어떻게 합방을 한단 말인가? 괴이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일 텐데. 안방 아지매는 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겠다? 어쩌다가 아무 관계도 없는 소향네 집안일에 자기가 천 리 길을 자청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고. 돌아가서 소향에미한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건어물 점방을 낸다고는 했지만 장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소향에미가 이 무서운 돈을 흔적도 없이 날리지는 않을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천장 위에서 어른거리는 형상들이 보이는 것인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인지 알 수 없는 대포아지매는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밤을 짓이기고 있었다.
아랫배가 팽배함을 일찍이 느끼며 한편으로는 잠을 자고 또 한편으로는 변소를 가야 한다고 느끼는 와중에 밖에서 떨그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소향은 비로소 여기가 자기 집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벌써 밝아온 문짝을 보고는 상체를 일으킨다.
옆에는 대포아지매가 모로 돌아누워 팔을 벤 채 아직 자고 있다. 깨울까, 하다가 그냥 일어나서 구겨진 치마를 훑어내리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문을 열고나서다 말고 도로 들어와서 문을 닫는다. 어제 들고 들어온 돈 보따리가 대포아지매 머리맡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두려운 소향은 아지매가 들고 온 보따리 속에 넣고 방을 나선다.
정기문이 열린 것으로 봐서 어제 본 작은 아지매가 왔음이 분명하다. 그 앞을 지나 잿간 옆에 붙은 변소부터 가서 시원하게 속을 비운 소향은 그제야 정신이 차려진 듯 느린 걸음으로 안채 쪽으로 걸어오지만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다. 어제 큰아지매는 자기에게 시킨 일도 없고 대포아지매도 그렇고. 막연하여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대문 위로 솟구친 동산을 올려다본다.
이른 여름아침이라 밤새 식은 대지 위의 공기는 물방울이 주저리주저리 열려있다. 풀내음은 짙다 못해 무른 내음까지 난다. 여기에서 나는 저 방안에 있는 돈만큼 큰아지매가 말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삼천포로 가야 한다. 종락이를 키우고 엄마를 도와 돈을 벌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불과 떠나온 지 이틀인데 벌써 눈에 아른거린다. 그래도 지금은 저 방안에 대포아지매가 있어서 그런지 외롭거나 허전한 마음은 들지 않지만 막상 아침에 대포아지매마저 떠나고 나면 홀로 남을 것이다. 어쩐다? 그저 난감하다.
넋을 놓고 있던 차 대문으로 작은아지매가 머리 위로 물을 뚝뚝 흘리며 동이를 이고 들어온다.
-야야, 니가 일난나? 이것 좀 받아라-
따뱅이끈이 입에 물린지라 말끝이 오물거리지만 소향은 금방 알아들었다.
부엌으로 들어선 소향은 작은아지매를 거들어 물이 한가득 담긴 동이를 내려준다.
허리를 한껏 뒤로 제치며 크게 한숨을 쉰 작은 아지매는
-이름이 뭐꼬? 내는 어제 이름도 안 물어봤네-
-소향입니더-
입으로는 이름을 대지만 고개를 휘휘 둘러대는 소향은 연신 부엌을 살핀다.
-삼천포서 왔다 켔제? 내는 말만 들어봤지 그가 어덴지도 모리겠다-
물동이를 들어서 땅속에 묻힌 독에다가 부으며 작은아지매가 하는 말이다.
-니 물 이봤나?-
동이를 내려놓으며 작은아지매가 소향에게 묻는다.
부엌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소향은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질문이란 걸 깨닫고 작은아지매를 보며
-예, 지도 매일같이 물 이고 댕깄심더. 국밥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그래? 그라모. 니 물이나 좀 이고 온나. 요새는 여름이 되나서 물을 독 속에 많이 안 채운데이. 물맛이 변하는기라. 케도 몇 동이는 있어야 하제-
뭔가 해야만 어색함도 삭이고 몸도 마음도 편해질 것이라 난감해하던 차 마침 작은아지매의 물주문은 소향에게는 반갑기까지 하다.
-샘이 오데 있어예?-
-대문 나가서 왼쪽으로 가몬 있다. 사람이 많을 끼다. 오늘 샘 풀 끼라고. 미리 먹을 물이라도 이고 갈 사람들이 어법 있을 끼다. 니도 한 서너 동이는 이고 온나-
소향이 대답도 않고 동이를 한손에 잡고 정기를 나서는데 그 무게가 전에 자기가 이던 집의 것이나 대폿집 것보다 더 무거운 걸 느낀다.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제법 달구지가 지나갈 정도의 큰길이다. 두 굽이를 지나자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샘이 눈에 들어온다.
아낙 서넛이 벌써 우물가에 둘러서서 물을 퍼올리는 틈에 끼어들기가 어색한 소향은 그 뒤에 동이를 내려놓고 자리가 날 때를 기다리는데 아낙들이 뒤를 힐끔거리며 낯선 소향을 본다.
-니는 누고?-
그 중 누군가 물을 퍼올리다가 고개를 돌려 소향에게 물어보는 통에 두레박이 샘가의 돌에 부딪치는 것도 모르고 물은 쏟아져 내린다.
소향은 대답도 안한다. 들었지만 대답하기가 어렵다. 소향이라고 해봐야 알리도 없고 자기가 하룻밤 묵은 집이 누구네 집인지 아직 모른다.
물어본 아낙은 빈 두레박을 다시 내리며
-아가 우째 대답이 없노? 야야, 니 오데서 왔노?-
-야가 가구만. 어제 광수어마이가 카디만. 누가 왔따꼬-
또 다른 아낙이 힐끔거리고 물을 동이에 쏟아 부으며 소향을 대신해서 답한다.
-오다이? 누가와?-
첨에 물었던 아낙이 두 번째 아낙에게 묻는다. 동이가 다 찼는가 두 번째 아낙이 물을 머리에 올리며
-광수네 큰집에 살림할 사람이 왔다꼬 광수어마이가 어제 빨래터에 와서 캅디다-
잽싼 걸음으로 아낙이 떠나자 소향은 빈자리에 들어선다. 샘가에 걸려있는 두레박을 내린다. 고개를 빼서 밑을 내려 보니 까맣게 깊다. 두레박이 물에 닿은 느낌이 들자 줄을 옆으로 잡아채본다. 두레박이 물에 잠긴 느낌이 들어 묵직하다. 소향은 줄을 한 발씩 들어 올리며 흔들리는 두레박이 석축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은 하지만 물 새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반은 헛수고구나 하고 생각한다.
-아가 어린데…. 그 살림을 우째 한다꼬?-
첨 물어본 아낙이 따뱅이를 머리에 올리며 소향을 향해 눈길을 주며 물동이를 머리에 인다.
-큰아지매가 다 요량이 있겠지. 광수어마이는 동서 시집살이 고만하게 돼서 신바람이 나겠구만-
또 다른 아낙이 남은 아낙에게 지껄인다.
-내같으민사 그 시집살이 안한다! 아, 같은 동서지간인데. 그기 말이 되나?-
작은 나무판자 몇 개를 양철판으로 이어붙인 두레박은 올리기가 바쁘게 반은 비어있다. 소향은 곁눈질로 다른 여자들이 쓰는 두레박을 본다. 미군부대에서 나온듯한 큰 깡통 하나가 제법 실한 듯 물이 새지 않고 한 가득씩 올라온다. 팔만 아프지 반 정도 올라오는 판자 두레박이 성가시어 소향은 여자가 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두어 번 더 팔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물을 올린 여자가 떠나자 소향은 얼른 그 두레박을 잡고 물동이를 채우는 사이 또다른 여자들이 샘가로 몰려오고 소향은 동이가 다 차자 얼른 머리에 올리고 자리를 비워준다.
등 뒤로 들리는 자기 얘기를 멀리 남기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정기 앞에 있던 대포아지매가 뛰어 나오다시피 앞에 와서 물동이를 받는다.
-괘안심더! 아지매. 언제 지가 물 안 이봤심니꺼?-
소향이 물 이러간 사이 대포아지매는 부엌에서 작은아지매와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니 말이 맞긴 맞지만. 무거워 보이서- 하며 대포아지매는 팔에 안은 물을 안으로 들인다.
언제 나왔는지 대청가에 선 큰아지매는 비녀를 입에 물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아올리며 광수에미를 부른다.
-동서!-
여름이라 부엌뒷문 밖에 작은 가마솥을 걸어놓고 불을 지펴 아침을 준비하던 작은 아지매는 들었는지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지 아무 대답이 없자 대포아지매가 작은아지매에게 말한다.
-안방에서 부릅니더!-
호박만한 돌 몇 개를 쌓아 만든 난전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광수에미는 연기를 피해 눈살을 찌푸리며 고함을 친다.
-와예?-
고개도 돌리지 않는 것으로 봐서 듣긴 들은 모양이다.
부엌을 가운데 두고 큰아지매는 앞쪽 대청에 있고 작은아지매는 뒷켠 장독대와 부엌 사이에있지만 소리는 넉넉히 들을 수 있는 거리다.
정기문 앞에 서있는 소향은 여전히 머리에 비녀를 찌르며 아무 소리도 없는 큰아지매를 보며 또 정기문 밖의 작은아지매를 번갈아본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작은아지매는 일어서서 치마폭을 털어내며 부엌을 가로질러 앞으로 나오며 -와예?- 하고는 대청 앞에 선다.
소향의 눈에도 첫부름에 대답 안 한 작은아지매가 성에 안 차는 듯한 큰아지매의 눈길이 보인다. 순간의 번득거리는 눈길을 마루 아래에 선 동서에게 씌우고 큰아지매가 입을 연다.
-첨 온 아이한테 물 길러오라 하지 말게. 혹시라도 넘어지거나 다치면 어쩌겠나?-
사실 집안일 시키러 데려오지 않은 아이라 아직 떠나지도 않은 아지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도 내심 불편하던 큰아지매다.
-무신 말입니꺼? 야가 켔으예. 물 마이 이봤다꼬. 그라고, 오늘 샘 치는 날이라서 먹을 물은 이다나야 됩니더. 우짜민 낼꺼정 물이 없을지도 몰라서-
사정도 모르고 말한다는 듯이 심통 궂은 작은아지매의 얼굴이다.
-그렇긴 해도 낯선 동네에 낯선 사람들 틈에서 어색하겠지. 차차 얼굴도 익히고 동네도 알고 나서도 할 수 있는 일일 테니 그만 시키게-
짧은 말만 남기고 대답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우두커니 서있는 소향과 큰아지매의 뒷꼴을 밉다는 듯 노려보는 작은아지매를 보던 대포아지매는 그곳에 서있는 자신의 몸이 어색해서 오그라들 지경이다.
-안방에서는 걱정해서 하시는 말이지예. 자가 어리도 일은 잘 합니더-
광수에미를 보며 대포아지매가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삐쭉거리는 입을 피지 못하는 작은아지매는 부엌으로 들어서며
-인제부터는 니가 저걸 다 받아내야 할끼다!-
정기문 밖에 서있는 소향을 보지도 않고 남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