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우물과 낯선 장씨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32화

김담 | 기사입력 2014/02/03 [13:23]

마을 우물과 낯선 장씨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32화

김담 | 입력 : 2014/02/03 [13:23]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여서 이럴게 아이고, 우리 집에 가입시더. 샘이 이 모양이 됐으이. 우짤건지 상의도 하고 장씨는 옷이라도 말리야 안 되겠능교?-
태광이 들어서서 무리에게 말을 건네는 사이 광수에미와 아낙 서넛이 대바구니를 내리고 탁배기와 안주거리를 꺼내놓는다.


-오뉴월 땡볕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사이에 마르지 뭘 갈아입고 자시고 합니까?-
지목수가 건네준 탁배기를 입에 들이대며 장씨는 태광의 말에 화답한다.

 

열 발짝이나 떨어진 곳에서 태섭의 옆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마눌이 영감의 팔을 지긋이 잡아끌고 한 편으로 간다.
-당신은 지금 서의원한테 가서 주섭이 아제 좀 살펴보고 오시구려. 여기 일은 서방님하고 제가 알아서 할 테고 저녁쯤에 주섭이 댁이 오면 쌀말이라도 가지고 집에 다시 가보시고-

 

태섭은 문득 마누라가 한 말이 떠오른다.
매사에 뒷짐 지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나서서 챙기라던. 하지만 일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지고 또 수월찮은 경비가 들어갈 것이 은근히 걱정이다.


-샘을 파묻어야 할 일은 안 생기서 다행이긴 하지만…. 우째 동네에 이런 일이…-
-새로 파는 것보다는 백배는 다행입니다. 암말 마시고 빨리 다녀오시구려-

 

태섭이 마누라는 발걸음을 옮겨 탁주를 나누어 마시는 남정네들 틈에 있는 태광이에게로 가서
-서방님. 이분들하고 다 집으로 가시지요.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어서들 가시지요. 그리고 샘가에 금줄이라도 쳐놓아야지요? 아이들이 또 사고라도 낼까 두렵네요-

 

지목수와 남정네들 몇몇이 서까래를 엮어서 샘가에 두르고 밧줄로 이어 놓은 다음 다들 태섭의 집으로 가고 구경꾼들도 이리저리 흩어져버렸다.

 

태섭의 마눌이 앞장서고 광수에미도 그 뒤를 따른다.
-당장 동네에 묵을 물이 없심더. 웃마을에 샘이 있다 해도 얕아서 온 동네가 묵기에는 안 자랠끼고…-
-그렇겠구만. 고치기 전까지는 물이 귀하게 됐구만. 그래도 얕으나 마나 웃마을에서 떠다 먹어야지-
태섭의 마눌이 중얼거린다.
-영감은 병원에 갔다가 올 거고 고생한 사람들하고 샘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 얘기도 나눠야 하니 우리가 상이라도 좀 차려야 할 걸세-

말을 마치는 사이 둘이 대문에 들어서는데 부엌 문가에 소향이 서있다.

시끌벅적하던 통에 소향도 대청에서 발을 곧추 세워 담 너머로 무슨 일인가 보려했지만 보이질 않고 큰아지매의 집안에 있거라 하던 바람에 나가서 구경도 못하던 참이라 그냥 턱을 고이고 대청에 앉아 삼천포로 떠난 대포아지매며 엄마 그리고 동생들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웬 남정네들이 한 무더기 우루루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어찌 할 바를 몰라 그냥 정기로 뛰어들어갔던 것이다.

대청을 한가득 메운 남자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장씨를 에워싸고 앉아있다.
-그 참, 형씨는 우째, 사람이 밑에 있는데도 쌩짜배기 돌을 그리 떨쿠고 하는교?-

남자 하나가 헛웃음 지으며 묻는다. 묻는다기보다는 아찔했던 상황을 그냥 되돌리는 것이다. 그때 밧줄을 잡고 돕던 남정네가 나선다.
-야, 이 자슥아! 안 그랬으면 그 돌맹이가 그냥 우루루 쏟아질껀데. 성한 사람 기냥 파묻을뻔했다 아이가?-
대답도 없이 그냥 권련 하나를 입에 물고 장씨는 젖은 옷에 손바람을 부쳐댄다.

 

태광도 보탠다.
-오늘 장씨가 장대한 일을 하셨소. 막상 현장에 있던 나도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모리겠더만. 딱하이 장씨가 들어서는 통에 일이 이만치라도 수습이 됐구만-


별채일을 시킬 때는 하찮은 일꾼으로만 대접했었지만 오늘 장씨의 무용을 본 후에 말마디에 붙이는 장씨라는 이름에도 함부로 하대하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태광이다.
-지가 이 사람하고 같이 일한 지가 그래도 해가 넘었지만 오늘같이 이 사람이 다시 보이는 것이 첨이구만-


지목수도 거들며 다리를 꼰다.
-마을사람들이야 경황이 없었던 터고 저야 한 발치 멀리서 보던 사람이니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지요. 별게 있습니까? 그건 그렇고… 목수님! 제가 속에서 석축을 본 사람이라서 말씀드리는데, 아무래도 돌을 다시 쌓아야 될 모양입니다. 적어도 무너진 곳까지라도-


-그기사. 마을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 아인교?-
주위의 남자들을 둘러보고 지목수가 말한다.


정기 안에서 막상 생각지도 않은 한 무리 사람들을 치룰 일에 두 동서는 전전긍긍 하고 있다.
-우짜까예? 행님? 광에 뭐 있는지 보고 오이소.-
-무슨 잔치 났나? 동서? 광까지 뒤지게? 나물만해도 여름이니 될 걸세. 막걸리 한 말 갖다달라 하고 겉절이하고 수육이나 삶지. 자네. 서방님 보고 육소간에 좀 갔다 오라고나 해. 소향이는 뒷전에 가서 나물 좀 솎아오고-
저고리 소매를 걷어붙이는 큰아지매다.


소향은 뒷전이 어딘지 모르지만 우선 나물을 담을 대소쿠리부터 찾아들고 묻는다.
-아지매요, 뒷전이 오뎁니꺼? 그라고예. 무슨 나물을 뜯어올까예?-
-아니다. 동서! 자네가 갔다 오고 소향이는 뒤에 불이나 지펴라-
-돈 주이소. 아범보고 지금 가라고 해야 안 됩니꺼?-


큰아지매는 수중에 돈을 지니지 않는 터라 방에 가야만 할 터다. 동서를 돌아보고
-자네는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나? 내 이따가 줄 터이니 서방님보고 빨리 갔다 오라 하게-
-지가 돈이 오데 있다고예? 없심더!-


작은아지매의 샐쭉한 말에 소향이 나선다.
-지한테 돈이 있는데예. 디릴까예?-


엉뚱하게 나서는 소향을 보고 작은아지매는 눈이 둥그레지며 -니 돈 있나? 얼매나 있노?- 하고는 넌지시 묻자 큰아지매는 사래를 치며
-아서게 동서! 내 방에 잠깐 갔다 옴세-


대청 가득 앉은 남정네들 틈을 비집고 갈 수 없는지라 할 수 없이 마루 끝에서 한 바퀴 돌아서 방으로 들며 계면쩍은 상황을 얼버무리려
-영감님이 병원에 주섭이 아재 보러 가셨는데 곧 오실 겁니다. 말씀들 나누고 계세요. 목이라도 축이셔야 하는데 지금 준비 중입니다-
-예-
좌중의 모든 남자들이 허리를 굽히며 손을 마루에 대고 답한다.


큰아지매가 건네주는 돈을 손에 든 광수에미는 마루에 앉아있는 태광에게 손짓하여 부른다.
-와?-
고무신을 신으며 묻는 태광에게 대답은 않고 마당으로 내려가는 작은아지매는 따라서 내려오는 태광에게 돈을 내밀며
-퍼떡 돼지 수육거리 좀 사오이소. 도가에 술도 한말 갖다달라 하고예.-


돈을 손에 옮겨 받은 태섭이 손에 든 돈을 보고는
-이기 울맨데? 이걸로 고길 사라 하노? 사람이 울맨데? 사도 다리 하나는 사야 할끼구만! -

작은 아지매는 신랑의 큰 목소리가 안에 들릴라 황급히 태광을 잡아끌고 대문 밖으로 나선다.

 

-다리 하나 사몬 되지. 카고. 모자래몬 아주버님이 나중에 줄끼라 카몬 안 됩니꺼? 와 시끄럽구로 캅니꺼? 퍼떡 가이소!-
등을 밀어내는 광수에미다.


큰아지매가 준 돈에서 절반 넘게 뚝 잘라서 고쟁이 속에 집어넣었으니 태광의 손에 든 돈으로는 돼지 다리 사기에는 형편없이 모자랄 터지만 아주버님이 육솟간 앞에 지나칠 때 주인이 달라고 하면 줄 것이 뻔하기에 안심하고 돈을 절취한 것이다.

 

사실 태광이의 속셈도 현금이 금쪽 같이 귀한 세상이라 이런 상황에서는 적당히 반 정도 외상으로 남기고 돈을 수중에 넣는 것인데 받은 돈이 얼마 되지 않으니 그나마 그런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길을 가는 태광은 그러면 아예 통째로 형님 앞으로 외상으로 남기는 거지 하고 간다.
큰아지매의 현금이 두 다리를 건너자 그냥 사라지는 참이다.

 

 

소향이 불을 지펴 난전 솥에 수육을 삶고 작은아지매가 나물 몇 가지와 양념장을 만들고 하는 사이 큰아지매는 그저 뒷짐을 지고 서성거릴 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태섭이 돌아오고 상이 마루에 올려지자 주거니 받거니 잔이 돌고 사람들이 묻거니 답하거니 시끄러워진다.
-주섭이는 괜찮겠다 캅디까?-
태광의 물음이다


-다행이제. 어깨뼈가 돌에 맞는 통에 뿔가짓뿟다. 그기 머리에 맞았다민사 오늘이 주섭이 제삿날일 뿐만 아이고 우리 동네 제삿날 될삔 안했나? 가는 괜찮다카더라. 주섭이 댁이 울고불고 해서 내 애를 묵었다. 달래느라고-
태섭이 병원에 갔다 온 것을 늘어놓는다.


-지 생각으로는예. 마을에 화가 아이고. 복이라 케도 된다꼬 생각합니더. 참말로 다행이지예. 그 샘이 운제적 샘인데예? 그만하이 참말로 다행입니더-
남정네 하나가 보탠다. 사실인 것이다. 대청에 앉은 아무도 그 샘의 역사를 모를 정도로 오래된 샘이고 인근에서는 젤로 물맛이 좋다고 할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마을에 우환이 돌 때마다 물맛이 따라서 변한다고 하는 샘이 아닌가? 오늘 사람 하나라도 그 샘 속에서 죽었더라면 샘을 메울 수밖에 없고 또 다른 물길을 찾아 샘을 파야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겼을 테니 그나마 이 정도의 수준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 화가 아니라 복도 될 수 있다는 안도의 해석인 것이다.


-자, 장씨. 내 잔 한 잔 받으이소-
잔을 내미는 태섭이다.


-내, 병원에서 오는 길에 속을 들이다 보긴 봤지만. 무너진 곳이 그리 크진 않게 보이던데? 장씨는 안에서 봤으이. 내보다 더 확실히 알 것 아니요?-
잔에 술을 따르며 장씨의 의견을 묻는다.


목에 술을 쏟아 부은 후 나물 한 젓가락을 입에 넣고 젓가락을 상에 놓으며 장씨가 답한다.
-제가 본 바로는 무너진 곳 윗부분은 다시 쌓아야 할 것입니다. 토압에 밀린 돌이 많이 불거져있고 또 토압이 상부가 제일 큰 것이니 이참에 쌓는 돌은 호박돌이 아니고 각석이라야 힘을 제대로 쓸 겁니다-


좌중이 조용히 듣는다.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어서 마을의 우물을 살린 사람이 하는 말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인근에서는 듣기 힘든 사투리가 전혀 없는 서울 아니면 경기지역의 말투에 이상하리만치 공식적이거나 사무적인 느낌도 함께 받는 것이다.


-지목수는 어떤교?-
태섭이 지목수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래도 현장에 있었고 또한 일이라면 손끝 맵게 한다고 알려진 목수의 또 다른 의견을 수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야, 목수지, 땅일은 모립니더. 오히려 장씨가 그런 쪽에서는 지보다 나을 거구만요-
나이로 봐서는 태섭이보다 한참 위인 지목수지만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관계가 세월이 변했다 해도 여전히 상하가 뚜렷이 존재하듯 지목수는 어렵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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