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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개구리가 시끄럽게도 울어대는 논둑길을 태섭은 자전거에 올라타 천천히 가면서 생각해본다. 지난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의 강호식 의원이 당선이 되었고 자기는 문중표를 몰아주었다는 자타의 인정 하에 요 며칠째 강의원 그리고 지역 유지들과 지역 사회의 현안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상의한다는 핑계로 기생집을 드나들고 있다. 하지만 태섭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정부에서는 법이 정해놓은 대로 민의원과 참의원을 다 뽑지는 않고 사변 이후로 계속 민의원만 선거했지만 들리는 소리로는 이년 후에 비로소 참의원선거를 치룬다는 것에 태섭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말이 종손이고 유지이지 사실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말고는 아무도 자기를 특별히 불러주거나 인정해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태섭은 잘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번의 꾸루와이 폭행사건이 태섭에게 남긴 것이 있었다. 그 일을 겪고 남아도는 입속의 쓴맛은 더더욱 무엇인가 내노라 하는 자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이쿠!- 외마디와 함께 태섭은 자전거와 함께 논 옆에 있는 작은 도랑에 처박혔다. 술도 술이지만 밤중길이라 안다고는 해도 정신줄 놓고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다.
한여름 물가라 웃자란 풀이 마치 솜이불처럼 푹신하게 받쳐주는 바람에 크게 다친 곳은 없다. 한쪽 다리는 도랑물에 잠겼고 몸은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자전거는 도랑을 건너 옆의 논에 비스듬히 쓰러져 바퀴 하나가 돌고 있다.
일어날 생각도 않고 태섭은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을 보고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머지않아 오십줄에 다가갈 자신이 지금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종손 자리도 놓칠 수 있다는 긴박감이 엄습한다.
기방 출입한다고 입고 나온 료마이가 엉망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한밤중이라 보는 사람도 없고 집이 모퉁이만 돌면 되는 거리라 태섭은 주섬주섬 자전거를 챙기고 다시 논둑길로 올라섰지만 이번에는 자전거의 돌아간 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오질 않는다.
삐딱하게 틀어져버린 바퀴 때문에 끌고 갈 수도 없다. 그냥 둑에 걸쳐놓고 태섭은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가는데 구두 속에 고인 물이 발을 옮길 때마다 찔꺽거린다.
동네에서는 샘일이다 초상이다 어수선한 마당에 날만 새면 슬그머니 빠져나가서 한밤중에나 들어오는 영감이 자못 못마땅하지만 그저 종가나 지키면서 사는 서방에게 지금까지 큰소리한 번 내지 않고 사는 큰아지매라 오늘도 불은 꺼놓은 채 뒤척이고 있지만 잠은 들지 않는다. 인기척이 들린다. 그러나 큰아지매는 일어나거나 마중을 하지 않고 그저 이제 들어오는구나 하고 몸을 옆으로 돌려 등짝에 붙은 땀을 말린다. -자오?- 나지막하게 부르는 영감 소리다. 상체를 일으켜 적삼을 걸치지만 대답도 않는 큰아지매다. 한번 불러서 대답이 없자 태섭은 야심한 밤이니 자는구나 하고 건넛방으로 가려는데 안방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 잡니다- 상체만 기웃이 한 채 고개를 내밀고 있다. 건넛방 문고리를 잡은 채 뒤돌아선 태섭은 -내 갈아입을 옷이나 좀 갖다 주소-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니? 밤중에 벗고 자면 될 일을 무슨 갈아입을 옷을 달라니? 이상타 싶은 큰아지매는 치마를 두르고 건넛방으로 발을 옮긴다. 남포에 불을 당기던 태섭은 마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 털썩 앉으며 -내 오다가 길에서 넘어졌구려. 옷이 엉망이라 당신한테 한 말이오- 심지에 길게 불길이 당겨 올라오자 방안이 제법 훤해진다. 아니 감고 있던 눈길이니 작은 불꽂에도 사물이 밝게 보이는 것이리라. 큰아지매의 눈에 보이는 영감 꼴이 가관이다. 반쯤 젖은 양복에는 흙투성이고 얼굴이며 머리가 검불로 덮여있다. -아니? 무슨 일로 이 꼴이 됐습니까?- -아, 자전거가 돌에 걸리뿟잔소. 요 모퉁이 돌다가…. 밤길이 되나서- 웃옷을 벗어가면서 중얼거린다. 장탄식이 태섭의 귀에 들린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해도 언젠가부터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은 서먹함과 어색함이 이제는 들판에 앉아있는 태봉산 만큼이나 크고 육중하다. 마눌은 안방으로 가서 모시 바지저고리를 내다 태섭에게 건네며 맞은편에 앉는다. -영감이 하는 일에 이제까지 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자로서 간섭이나 아집도 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감, 지금 영감 모습을 한번 보시지요- 앉은 채로 웃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다음에는 벗은 내의로 묻은 오물을 털어내던 태섭은 마눌의 말이 시작되자 움직이던 손놀림이 서서히 늦어지며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 사나가 헛발한번 디딧따꼬 무신 죄 짓나?- 평소에 서로 하소만 하던 둘인데 화가 나면 태섭도 경상도 사투리부터 튀어나오는 것이다.
마눌은 아무 대꾸도 없이 태섭을 빤히 보고 있다. 태섭도 입던 옷을 반만 걸친 채 역시 마눌을 빤히 보고 있다. 태섭은 마눌의 서울 말씨가 영 싫다. 아니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다. 혼례를 올린 후 처음에는 서울각시 들였다고 마치 자랑거리처럼 여겨졌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놈의 깍듯한 서울말씨 속에는 인정머리나 속정이 하나도 없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폿불이 어른거릴 때마다 둘의 그림자가 벽에서 사납게 움직이기를 한참은 되었다. 이번에도 결국 입을 먼저 연 것은 태섭이다.
멈추었던 손을 놀려 옷을 마저 입고 태섭은 눈을 남폿불로 옮기며 -내라꼬 오데 술이 좋아 술 묵꼬 사람 만나는긴 줄 압니까? 내도 다 생각이 있고 계획도 있고 또 장래도 생각하고 합니다. 오늘은 정말로 헛발디디서 생긴 일이오. 늦었으이 들어가 자구려- 냉담한 서울말 듣기가 싫은 태섭은 마눌이 근접하기 어려운 생각, 계획 그리고 미래라는 제법 그럴듯한 말을 앞세워 이쯤에서 빨리 모면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기싸움에서 져주었으면 갈 법도 하지만 이놈의 여편네는 여전히 말도 한 마디 없이 자기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태섭이 담배 한 대를 입에 대고 남폿불 유리통을 올려 불을 당긴다. -추석이 열흘도 남지 않았습니다. 영감이 벌려놓은 샘터 일이며 종가의 추석 제사며 심지어 사당도 돌봐야 할 것인데 영감이 한밤중에 이런 몰골로 다니는 것을 종가에서 보기라도 한다면 영감이나 우리 집안에 득이 될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허이, 내 말 안했소? 오늘은 일진이 사나봐서 생긴 일이라꼬? 고마하소!-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는다. -아무리 을순네가 동네에서 내돌리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래도 그 집도 제종 사이인데 초상이 났다 해도 들여다보지도 않으시니 그것도 종손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도 압니다. 해도 그때 마침 강의원하고 지역일로 얽힌기 있어서 우째 그리 되뿟소. 태광이가 다 알아서 했을낀구만- 다리를 꼬아 올려서 남자답게 해보려고 하지만 잡은 쥐를 앞에 놓은 고양이 마냥 자기를 쳐다보는 마눌 앞에서 태섭은 영 남자다워지지가 않는다.
앞무릎을 세워 앉았던 마눌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리고 퍼질러 앉는다. 태섭은 마눌이 안방으로 가기는커녕 이제는 아예 자리 잡고 훈교를 시작하는가보다 하고 내심 짜증이 난다. 피우던 담배를 사납게 재떨이에 비비고 대나무 목침을 끌어당겨 뒤로 벌렁 누워버린다. 아예 할 테면 하라,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하는 태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태섭이다. -지난번 아주버님이 병원에서 고초를 치른 후에 영감이 집안을 잘 건사해야 된다고 했지요. 종가 회의에서 나타난 일이며 떠도는 소문들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숙고해서 행하시고…. 잠깐 일어나보구려. 내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은 이미 다했는데 또 남은 말이 있단 말인가?? 태섭은 일어날 생각은 없이 누운 채로 고개만 마눌 쪽으로 돌려 -야심한데, 내 다 알고 있으이 고마 건너가소- 한다.
-우리 집에 들인 소향이 얘깁니다- 무슨 엉뚱한 말인가? 아, 일손 하나 들이는 것이야 안에서 알아서 하면 되지 그것까지 상의할 것이 있는가 싶은 태섭이다. -와카요?- 여전히 누운 채로 마눌을 올려다본다. -일어나 보시라니까요- 마눌의 말투가 조금 더 사나워진 것을 느낀 태섭은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켜 마눌을 대면한다.
큰아지매는 지금이 좋을 때라고 생각했다. 야심해서 심각한 말을 건네기도 좋고 또 영감이 책잡힌 순간이니 소향의 일을 향후 딴소리 나지 않게 철저하게 못 박아놓을 우위를 자기가 점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무신 일인데 당신이 알아서 하민 됐지 내꺼정 관여시킵니까?- 앉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일어나니 마눌은 이제는 남폿불을 빤히 쳐다볼 뿐 말이 없다. 이상타 싶은 태섭은 머릿속으로 그 소향이라는 몇 번 본 아이를 떠올려본다. 정기 들락거리는 아이 하나 들였구나 했을 뿐 별로 달리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소향이 얘기라고 하면서 저리 심각하게 자세를 잡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큰아지매도 막상 덜컥 소향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그동안 자기가 벌려놓은 내막을 말하려 하니 사실 중치가 막히는 기분이라 어른거리는 불길을 보며 말꼬리를 어떻게 풀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다. 갑갑한 태섭은 또 권련을 하나 입에 올려 피운다. -그 아이를 들여 집안의 손을 보려고 합니다- 달랑 그 말만 뱉어놓은 마눌의 시선은 여전히 남폿불에 고정되어있고 미동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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