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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태섭은 귀를 의심한다. 자기가 잘못 들었나? 홍두깨도 유분수지. 손을 본다? 집안의 손을? 설마 여자 아이에게 집안 수리를 시키자는 것은 아닐 테니…. 그러면? 첩으로 들였다는 말 아닌가? 태섭은 반도 안 탄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며 다리를 꼬아 정좌를 하고 자못 근엄하게 말한다.
-무신 말인지 해보소. 집안의 손을 보다이?-
더 이상은 자기의 입으로 펼치기가 겁도 나는 일이다. 벽에 걸린 마눌의 그림자만 일렁거릴 뿐 마눌은 꼼짝도 않고 남폿불만 보고 있다. 자기 얼굴을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기는 태섭인데 이상하게 자기의 심장이 쾅쾅거리며 울려대는 것을 느낀다.
-때를 봐서 그 아이하고 합방을 하시고 집안에 대를 이을 아이를 생산하자는 겁니다-
또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마눌이다.
그놈의 남폿불이 닳아빠질 정도로 응시하는 마눌이 자기가 여태 보아온 마눌하고는 영 다른 모습이다. 일의 심각성이 중대한 만큼 마눌의 태도도 저렇게 심각해지는 통이니 태섭은 이럴 때 함부로 나서서 지화자 장단에 들썩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더 더욱 근엄하게 자세를 잡는다.
-자초지종을 말해보이소. 내사 참 알다가도 모리겠구먼. 자다가 봉창 뚜디린다 카디만 이기 그기 아니요?-
쾅쾅 울리는 심장을 제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태섭은 습관처럼 권련을 또 빼문다.
평소 같았으면 한방 안에서 피워대는 담배연기에 면상이라도 찡그릴 마눌인데 연달아 피워대는 연기에도 마눌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넋 나간 사람처럼 불꽃만 보고 있다.
담배가 반쯤 탈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태섭은 쾅쾅 울려대던 심장이 이제는 서서히 쿵쿵거린다고 느끼고 큰아지매는 이놈의 일을 어떻게 대못으로 꼼짝 달싹할 수 없게 만들까 그리고 여자로서 자기 체면도 흠나지 않게 할까 하고 있다.
지루함을 느낀, 아니 답답함을 느낀 태섭이 꼬인 다리를 풀어 반대로 올릴 때 비로소 마눌이 미동도 없이 말을 한다.
-저는 종부입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도 없고 종손을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비록 광수 재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종손이니만큼 또 제가 종부이니만큼 사당에 고할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감과 저의 책임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들인 아입니다. 첩을 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씨받이로 들이는 것입니다. 행여 영감도 딴생각은 안 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대를 잇는 일은 어느 대가에서나 있을 수 있고 또 당연히 행해야 되는 일이니 이런 일로 우리집안에 흠은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축첩하여 말썽이 난다면 그것은 불란을 자초하는 일이 될 테니 영감도 합방은 하더라도 쓸데없는 마음은 안 주는 것이 말썽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것일 겁니다. 언제 합방을 할 것인지는 택일을 하여 할 것이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은 영감도 이 일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당분간 모른 체하라는 겁니다-
태섭은 마눌의 얼굴을 흠칫 훔쳐본다. 야심한 밤에 볼 수 없는 결연한 표정이다.
딴생각 말아라, 마음 주지 마라, 말썽, 불란을 읊어대며 큰아지매는 일단 말을 풀어놨다. 속이 아프거나 아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는 큰아지매다.
반면 태섭은 이제 심장이 울렁거리지도 않는 것을 느끼지만 그러나 거창한 마눌의 말끝에 뭔가 대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는다.
-아, 광수도 있고 또 재수도 있으이, 작은아를 양자 대리민사 되는 일인데. 뭐 한다꼬…-
달랑 그 말만 내뱉고 머리에는 그 소향이라는 아이를 애써 떠올려본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으니 애써도 잘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소금도 고을 듯한 여름도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해진 후에는 선뜻선뜻 바람도 분다. 추석이 멀지 않았다. 피사리에, 꼴을 배랴, 논에 든 물을 빼고 논둑의 풀을 깎고, 서서히 추수를 준비하는 때가 온 것이다. 뚝딱거리던 망치소리가 잦아들면서 샘터에는 기와를 이은 사각 정각이 모양을 드러내고 태섭은 여전히 밖으로 알지 못할 일로 바쁘게 나다니지만 큰아지매는 태광이와 광수에미와 함께 추석 때 올릴 제사 준비에 바쁘다.
소향도 이제 어느 정도 집안에 돌아가는 사정도 익혔다. 정기에 구석구석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고 마치 자기를 종처럼 대하지만 작은아지매는 입만 험하고 행동이 덜렁거릴 뿐 사람은 악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안방의 큰아지매는 통 모르겠다.
근 한 달 가까이 되었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일 없이 그저 필요한 말만 하거나 아니면 얼굴을 내미는 법 없이 안방에만 있다. 종락이하고 같은 또래의 광수, 재수는 철은 없어도 종락이 생각에 누룽지도 주고 반찬도 챙겨주고 하여 친하게 되었다. 하긴 자기가 하지 않아도 작은아지매는 더 잘하지만 소향이 마음 놓고 같이 철없는 말을 나누는 상대가 바로 광수고 재수이다.
여름방학이 지났는지 요즘은 광수가 오후쯤 돼서 온다. 오늘도 허리에 책보자기를 묶은 채 담 넘어 별채로 가기도 전에 솟을대문으로 고함치며 들어선다. -엄마야~ 내 배고푸다- 큰아지매가 내준 올밤을 깎고 있던 소향은 그 소리를 듣고 정기를 나선다. -너그 어무니는 없따. 장에 갔다. 니 배고푸나? 내 무울 거 주까?- -그래, 아지매. 맛있는 거 있나? 내 좀 도- -내도- 뒤따라 들어오던 재수도 보챈다. -오이야. 이리 온나- 소향은 둘을 정기로 손짓하여 불러들인다. 안방에 있는 큰아지매가 불편한 것이다. 소리를 낮추어 소곤대며 -너그, 이거 들고 집에 가 무라. 내가 아까 마루 밑에서 고무신하고 빈 병을 찾았다 아이가. 그걸 엿하고 바꿔놨다- 찬장 속에서 꺼낸 두 가락의 엿을 각각 광수와 재수에게 쥐여 주며 소향은 목으로 넘어가는 침을 꿀꺽 삼킨다. 얼굴이 환해진 아이들은 큰소리는 내지 않는다. 이미 엄마가 무엇인가 큰엄마 모르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입에 가로대는 손가락에 훈련을 받은 탓이다. 뛸 듯이 돌아서는 광수의 허리춤을 소향이 잡는다. -잠깐만 광수야, 내 니한테 할 말이 있데이- 이미 입에 엿가락을 물은 광수는 한쪽가에 침이 쭈르륵 흐른다. -머꼬? 아지매.- -니 맺 학년 댕기나?- -삼학년이다. 와?- - 니 공부 잘하나?- 소향은 광수의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치마폭으로 닦아주며 묻는다. - 모리겠다. 내는 공부하기 싫은데 엄마야가 혼내기 때문에 한다 아이가. 근데, 와 묻노?- 입에 들은 엿 때문에 말이 오물거리는 광수다. 재수는 눈을 빤히 뜬 채 둘을 본다. -음. 니 내기 선생님해라, 쿠모, 내 맛있는 거 마이 줄낀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광수에게 묻고 있는 소향이다. -선생님? 내가 와 아지매한테 선생님 하노?- -니, 내기 글 좀 갈카달라는 말이다. 니 읽을 줄 알제?- -아지매야, 내는 읽을 줄은 안다. 케도 선생님을 우째 하노? 내는 모리겠다- 곧장 뒤로 돌아서서 후다닥 내치는 두 아이를 정기 안에서 소향은 물끄러미 본다. 글을 배워야 편지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또 혹시라도 올지도 모르는 편지도 읽을 수 있을 텐데 도무지 까막눈을 가지고서는 해결할 수 없어서 짜낸 궁여지책이다.
도로 부뚜막에 앉아 깎던 밤을 칼로 도려내며 삼천포에 두고 온 식구들을 생각한다. 도대체 어떻게 돼가고 있을 것인지. 언뜻 들은 바로는 추석 무렵쯤 무당아지매가 이 집에 다녀간다고 했었지, 그때 보살님이 오면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엄마는 어물전이라도 하고 있는지. 종락이는 학교를 잘 다니는지, 숙향이년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지, 막내 향숙이는 얼마나 컸는지. 눈물이 고여 칼날이 얼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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