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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소향도 어설피 몸을 움직여 이런 분위기를 빨리 벗어나기라도 해야 하는 듯 저녁밥을 지을 준비를 시작한다. -아이구, 내 입이…. 내 입이…- 하면서 정기바닥에 쪼그려 앉는 작은아지매를 뒤로 두고 집 뒤의 나무단 쌓인 곳으로 소향은 걸어간다. 저녁을 짓는 소향과 작은아지매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각자의 일에만 매달린다. 하지만 소향의 마음속에는 아까 작은아지매가 던진 말 중의 한 마디가 아직도 남아있다. 언젠가 물어볼 요량이다. 하지만 광수에미는 소향의 일은 생각에도 없다. 벌써 잊어버렸고 또 자신이 상전이라 생각하는 작은아지매는 소향과 싸운 것이 아니라 혼을 낸 것이라 여기니 당연히 마음에 두지는 않지만 방정맞게 튀어나온 말마디가 안 그래도 서리 내리는 동서인데 이제는 엄동 같은 얼굴이 될 것이라 걱정이다.
말은 분가라고 하고 집은 따로 차지하고 있지만 땅 한 조각 아직 떼어준 것도 없고 모든 생활경비가 다 안방 아니면 그 옆의 광에서 나오는 지경이라 동서와 불편해지는 경우에는 하다못해 광수 재수의 군것질도 시켜주기 어려운 상황 아닌가? 오늘도 서방은 또 어디선가 술 아니면 밥을 먹을 테고 광수 재수는 어둡지 않으면 노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자신은 동서 앞에 나타나기가 싫다. -이따가 아아들 오민 저녁 멕이라. 그라고 안방에는 니가 저녁상 들루코- 치마에 손을 닦으며 작은아지매는 정기를 나간다. -아지매요. 물어볼 끼 있습니더- 이미 정기문 밖에 선 광수에미는 뒤돌아서 -몬데?- -아까 아지매가 지보고 또 거짓말을 한다꼬 하싰는데예. 지가 운제 거짓말 했습니꺼?- -내가 운제 그켔노? 그라고 니 눈 똑바로 치키뜨고 지금 내기 따지고 있나? -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한 광수에미인데 어쩌면 소향이 좋은 분풀이감이 될 성싶다. -이년이 지금 정신이 있나 없나? 내가 운제 니 보고 거짓말쟁이라 켔나? 응? 부엌떼기 될라몬 정기일이나 배우민 됐제, 주제넘게 내기 대들어? 망할 년이네 이제 보이. 응?- 안 한 거짓말도 했다고 하다가, 또 했다고 하다가, 그리고는 안 했다고 하다가 이제는 거짓말쟁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붙였다.
기가 막히는 소향이다. 도무지 어른이 돼서 저리도 우왕좌왕 할 수 있을까 싶다. -지는예. 한 번도 거짓말한 적도 없고 또 두 번 한 적은 더욱 없심더. 그라고예, 금방 거짓말쟁이라 카싰는데 그 말도 지는 한 적 없심더. 다 아지매말이지예- 얼굴을 똑바로 들고 소향도 날을 세워 말한다. -니 지금 내 보고 말 지어낸다 켔나? 이년이 정말로 사람 잡고 있네?- 말소리가 또 담을 넘고 있다. -동서! 좀 들어오게! 소향이 너도!- 안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둘이 서로의 눈을 본다. 대발을 들추고 광수에미가 들고 이어 소향이 조심스레 윗목에 앉는다. -자네. 말끝마다 이년 저년 하는데 듣기 거북한 소리일세. 더군다나 큰소리가 집안을 흔들 정도니 집안 생각 안 하는가? 그리고 소향이 너는 뭣 때문에 동서에게 그리 하나? 연유가 뭐냐?-
이런 일에 물러서고 싶지 않은 소향이다. 자기가 이집에 온 이유는 비록 돈을 좇아 왔지만 그렇다고 사람 취급 못 받고 살기는 싫다. -아까 작은아지매가 지보고 거짓말을 하고 또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예. 지는 거짓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던예- 광수에미도 생각해보니 그렇다. 소향이 무슨 거짓말을 한 것 없다는 생각이 그제야 든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기에게 따지고 대드는 소향이가 어이가 없다. -주딩이 있다꼬 이년이 말끝마다 대드네? 니 년이 주제를 알아라. 아, 이년아. 여가 오데라꼬 함부로 지껄이노?- 태생이 그런 광수에미다. 법도다 예절이다 눈치다 하는 것들은 다 큰 동서에게 맡겨두고 그저 자기는 태어난 대로 살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큰아지매도 잘 알고 있다. -자네. 이 아이는 부엌에서 일 시키려 데려온 아이가 아닐세. 내가 누구 편을 들고 자시고 해서가 아니고 자네가 하는 말이 하도 험해서 하는 말이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한 식구 같이 여기라고 내 하지 않았나?-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들은 광수에미는 귀를 의심한다. -모라꼬예? 카모 일 안시키몬…. 야는 와 데리왔십니꺼?-
막상 이 지경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이지경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큰아지매는 난감하다. 물론 언젠가는 알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저 험한 입과 머리통 속 생각을 좀더 자연스럽게 정리하고자 했던 큰아지매의 계산이 오늘 우연히 빗나가고 있다. -그건 자네도 차차 알게 될 거고. 아무튼 한 식구라 생각하고 서로 함부로 험한 말은 하지 말게나. 소향이 너도 집안에 어른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조심해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큰아지매는 사단이 광수에미의 그 혀끝에서 일어난 줄은 짐작하지만 너무 한 쪽에만 나무라는 것도 모양이 안 좋을지라 소향에게도 그냥 한마디 덧붙인다. -아니? 행님. 한 식구라카이. 그라모 야가 딸아라도 된단 말입니꺼? 집안이라도 된단 말입니꺼? 뭡니꺼?- -내가 말하지 않았나? 차차 알게 될 거라고?- 정색을 한 채 치마폭을 휘감아 자세를 모로 돌린다. 말이 끝났을 때 종종 보이는 그녀 특유의 방법이다.
막상 입에 올려서 부엌데기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큰아지매도 지금 당장 광수에미에게 속속들이 내막을 펼쳐놓기에는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라 지금 이 순간을 그저 모면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덜컥 입 밖에 내놓은 자신이 조금은 경솔하게 여겨져 후회도 되지만 어쩌랴? 일은 벌어질 것이고, 아니 이미 벌어져가고 있으니….
소향은 비로소 자기가 여기 온 이유를 새삼 다시 느낀다. 그동안 이것저것 집안 상황에 익숙해지느라 아들을 낳아주기로 한 약속도 사실 잊고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아들 낳는다는 것이 어디 자기 혼자 하는 일인가? 큰아지매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해서 그저 기다릴 뿐, 머릿속에는 삼천포에 남기고 온 식솔들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 큰아지매가 작은아지매 앞에서 자기는 부엌데기가 아니고 애매하지만 한 식구라 했다. 험한 말도 삼가 하라고했다. 큰아지매가 고맙게 여겨지는 소향이다. 하지만 영문 모를 말을 들은 작은아지매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까 큰아지매가 말 끝났으니 나가라는 식으로 한 동작도 잊은 채 그 복잡한 말의 꼬리를 풀어볼 량으로 머리를 굴린다.
한참을 말없이 큰아지매와 소향을 번갈아 보던 광수에미는 머릿속에 무슨 가닥이라도 잡힌 듯 알지 못할 얼굴의 표정과 느긋한 자세로 일어선다. -그래예- 하고는 방을 나간다. 큰아지매는 부채를 집어 적삼 속을 부치며 나긋이 소향에게 이른다.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라. 일에는 다 순서가 있고 법도가 있다. 그리고 작은 아지매가 다그쳐도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알았지? 이제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집안에 큰소리 나는 것도 피해야 된다. 손님이 들락거릴 텐데 행여라도 여자들 큰소리가 제종들 귀에 들리지 않게 해야지- -예, 알았심더.- 대답이 건성이다. 소향의 마음은 뭘 그리 어렵고 복잡하게 엮어 가느냐, 나는 빨리 삼천포로 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언젠가 삼천포 장터에서 마주친 끝순이처럼 얼른 아이나 하나 안겨주고 나면 내 할 일은 다 끝날 건데…. 이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집안에서 뭘 기다리고 무슨 법도를 찾고 큰 소리 작은 소리 골라가면서 순서를 기다리라니. 소향은 삼천포 콩밭에 가있는 자신의 마음이 조급증으로 가득한 것을 느끼지만 별도리가 없다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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