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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정기 속의 열기가 마루보다 더 후끈하다고 느끼며 태섭이 들어서자 광수에미가 바닥에 앉아 있다가 치마를 털며 일어서고 큰아지매가 돌아서서 태섭을 마주한다. -제가 서방님한테 생각을 내놓았답니다. 어차피 살림도 났고 또 두 집 농사를 돌보는 것이 힘도 들 것이라 집에 일꾼 하나 들이자고요. 보아하니 저 장씨라는 사람이 지난번 별채 일할 때도 그렇고 또 이번에 샘일 하는 것도 그렇고 제법 쓸만하다 싶어서 말을 건네보라고 했답니다. 소작하는 사람들한테 서방님보다는 그래도 머슴이 하기 쉬운 말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대충 이해가 가는 태섭은 헛기침을 뱉으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광수에미가 끼어든다. -아주버님, 우리 아바이도 이제사 할 일이 많다 아입니꺼? 아, 이 큰집에 머슴도 들일라치몬사 몇은 들이야지예. 그동안은 우리 아 아바이가 했지만 인제는 바뿌다 아입니꺼?- -글쎄. 내 말은 건네 보겠지만…. 식구가 딸리고 또 손이 많으민 어로벌낀데- 태섭은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한다. -식구가 있으면 오히려 더 낫지 않습니까? 안살림에도 한 사람 있어야 될 판인데?- 큰아지매는 태섭에게 안식구가 있더라도 어려운 조건이 아니고 더 도움이 된다고 알려준다.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정기를 나서서 태섭이 마루에 앉는다. -장씨라 켔지요? 고향이 오뎁니꺼?- 그래도 하대를 하지 않는 태섭이다. 왠지 하소를 하지 않고는 오히려 자기가 더 불편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장씨여서다.
술잔을 입에 대던 장씨는 태섭의 질문을 듣고 나서 술을 입에 다 넣은 후 또 안주를 입에 한 젓가락 집어넣은 후 대답한다. -저야 뭐… 고향이랄 것도 없지요. 떠도는 사람이라서- 하고는 자작으로 술 주전자를 들어 잔에 붇는다.
-장씨는 경기도라 켔제?- 지목수가 옆에 있는 장씨를 바라보며 태섭에게 대신해서 대답을 준다. 그러나 말거나 장씨는 술을 마시고 대꾸도 없다. 태광이 그런 상황을 보다가 답답한지 -장씨, 우리 행님이 일꾼이 필요해서 그런데… 우리 집에 머슴 살몬 우떻겠소?- 다짜고짜 묻는다.
머슴이라? 말이 주는 느낌에 장씨가 소반 위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는 자기 잔을 비우고 태광이 앞에 놓고는 한 잔을 채워준다. -머슴요? 좋지요! 사경만 많이 준다면 까짓 머슴이 아니라 종인들 못하겠습니까? 하하!- 너털웃음을 짓는 장씨의 얼굴에 그늘이 어둡게 덮인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자네? 농담 하나?- 지목수가 의외라는 듯 장씨를 쳐다보며 묻는다. -대목수님! 제가 돈 버느라 객지를 떠도는데 사경만 많이 준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장씨도 지목수를 목수라 부르지 않고 대목수라 부른다.
장씨의 마음속에는 사실 그런 말들이 그리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머리에 감투 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호칭마다 주사니, 서기니, 반장이고 회장이라 달려있고 정히 아무것도 없으면 양반이 붙는 지경이라 장씨도 지목수를 추켜 부른다.
이것저것 주고받는 말을 듣고만 보고 있던 태섭은 이것이 술 탓인가? 아니면 정말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보슈, 장씨. 태광이 한 말이 우스개가 아이고… 정말로 물어보는 말인데? 식구는 울매나 되나?- 말을 올리자니 마음이 안 내키고 안 올리자니 앞에 앉은 장씨라는 자의 기가 은근히 힘을 발하는 듯해서 참으로 어정쩡하게 올리고 내리기를 섞어가며 말하는 태섭이다. -식구요? 없습니다. 아, 떠돌이한테 식구는 무슨 식구랍니까? 혼자 입도 거두기 쉽지 않은 세상인데 안 그렇습니까? 대목수님?- 하면서 웃는 얼굴로 지목수를 쳐다보지만 지목수는 멍한 눈치다.
장씨가 사람됨됨이가 됐고 사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인걸 지목수는 안다. 같이 봉명광산의 막장에서 일할 때도 감독이 장씨를 눈에 들어 해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준다고도 했지만 고사했고, 산림조합 건물공사에서도 조합장이 장씨를 알아보고 젊은 사람이 쓸만하다고 이력서를 가져오면 산감으로 채용해 주겠다는 것을 사양했는데 갑자기 머슴을 하겠다고? 분명 농담이렷다.
지목수는 -쉰소리 고마 하고 고마 가세. 우리도 갈 길이 멀다. 회장님. 추석 잘 쉬시고. 우린 이만 갈랍니더- 하고 일어날 듯 자세를 갖추는데 대문에서 끙끙대며 소향이 들어온다. -작은 아지매요! 광수 좀 받으이소!- 하고는 대문간에 그냥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아야!- 하면서 뒤에 광수가 깔려서 소리를 지르고 마루에 있던 태광이 서둘지 않고 마당으로 내려서며 -오델 갔다가 온다고 이렇게 늦게 댕기나?- 소향에게 하는 말인지 광수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안 된다. -야가 발이 아푸다꼬 해서 업고 오너라고 늦었심더-
큰아지매가 또 광수에미가 줄줄이 정기에서 나오고 마당에서 일어날 기미도 없는 소향의 옆에서 광수는 땅위에 앉은 채로 울어 젖힌다. -다 큰기 울긴 와 우노? 야밤에?- 태광이 아들을 번쩍 안아들고 마루로 가고 소향도 손을 털며 일어서서 정기로 간다.
물끄러미 난리통을 마루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루 위의 태섭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소향의 모습을 훔쳐보지만 이제는 완연히 어두워진 밤이라 그의 시선의 방향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소향은 누가 보는지 자기의 모습이 어떤지에 상관할 여지가 없을 만큼 지쳐있다.
정기에 밝혀진 남폿불이 밖에 비춰지는 달빛보다도 더 어둡다. -야야. 좀 일찍 올 일이지. 그래 보살님은 만났나?- 헝클어진 치마며 땀에 젖은 얼굴에 머리는 산발에 가까운 소향의 모습을 보며 큰아지매가 물어본다. 다짜고짜 땅속에 묻힌 물독 속에서 물 한바가지를 퍼내 사레가 들릴 정도로 꿀꺽거리며 마신 소향이 나오는 숨도 마치기 전에 대답한다. -예~- 하고는 마저 숨을 고른다. 광수에미가 옆에 있는지라 더 이상의 말은 아끼고 큰아지매는 정기를 벗어나고 광수에미는 정기 바닥에 펼쳐놓았던 상에 늦은 저녁을 올린다.
소향은 부뚜막에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는다. 눈동자가 풀리고 물 먹은 솜마냥 퍼진 보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 한 편에 불안한 생각도 든다. 그래도 점방은 열었다고 했으니…. 추석이 자나면 더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그 문둥이 말이 떠오른다. 집에 있는 아지매가 돈을 줄 거라고.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지만… 또 아까운 돈이지만… 집에 잘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소향은 안도한다.
추석 전이라 종가의 마당이 동네 아낙으로 가득하다.
뒷집에 걸어놓은 가마솥 뚜껑에 전이며 부침이 가득히 올려져있다. 식혜는 이미 단지 속에서 삭아간다. 덜 익은 곡식이지만 그래도 제상에 올릴 것은 충분히 햇살에 말렸다. 아낙들이 김씨 집안에서 일을 돕는 것은 집안의 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목적은 궁하디 궁한 자기들 집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산해진미를 눈치 보아가며 찔금찔금 입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 아이들이 쪼르륵 찾아오기라도 하면 한 점 입속에 넣어주기도 할 수 있고, 일이 끝나면 소쿠리에 이것저것 담아내주는 종가의 인심이 초라한 자기들 추석상보다 한결 푸짐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광수에미는 더 신이 난다. 큰아지매는 그저 필요한 것들을 광에서 내주거나 또 마련된 음식들을 받아서 광속에 챙겨넣는 것으로 총괄하는 정도지만 작은아지매는 사람들을 부리고 타박도 하고 눈치 보며 인심도 쓰는 맛에 이런 날 광수에미는 종가의 며느리 된 것을 한껏 즐긴다.
소향은 오늘도 물을 이어 나르느라 정신이 없다. 양철로 만들어진 양동이를 국밥집에서 이어본 적이 있는 소향은 추석이 끝나면 장날 그것을 하나 사달라고 하리라 마음먹으며 멋지게 지어진 정각 아래서 물을 퍼올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있어서 돌아보니 모퉁이 집에서 보았던 그 정신없다는 처자 을순이다.
겨우 무릎을 덮은 치마는 헤진 구멍이 여러 개다. 저고리는 검은색인지 아니면 때가 묻어 검어진 것인지 모를 정도다. 양팔을 늘어뜨리고 초점도 없는 눈동자는 소향을 물끄러미 보지만 그저 머릿속은 텅 비어 보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굴조차 씻지 않았던지 숯검댕이로 발라놓은 듯 거뭇거뭇하다. 하지만 얼굴에는 악의라곤 없다. 눈에도 숨겨진 표독한 표정이라곤 없다. 그저 멍할 뿐이다.
아마도 자기 또래쯤이라 여겨지는 소향은 을순이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두레박 물을 하나 퍼올려서 바닥에 두고 을순이에게로 가서 손을 잡아끌어 샘가로 온다. 조금은 두렵지만 그집 초상 때 죽은 엄마의 상여 뒤를 철없이 따라가던 모습을 떠올리며 해로운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기 머고. 그 집에는 사람도 없나 - 하면서 을순이 얼굴을 물로 씻겨준다. 이상하리만치 을순이도 아무런 저항도 없다. 그저 소향이를 열심히 빤히 쳐다볼 뿐이다. 물을 훔쳐내 얼굴을 씻기고 다시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려서 뒤로 넘겨주고 저고리 소매를 걷어내어 손과 팔을 씻겨주고 하면서도 은근히 코에 닿는 몸과 옷에서 나는 냄새에 소향도 역겨움을 느끼지만, 다 큰 처자가 정신이 나갔다고 해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 소향에게는 불쌍하게 여겨지고 그 집에 있는 아지매가 밉게 생각이 든다.
-이기 누고? 을순이 아이가?- 하며 아낙이 물동이를 내려놓는다. -니가? 저 종갓집에 있는 아 아니가? 니가 와 을순이를 씻기 주노? 그라고 여는 먹는 샘간데- 하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됐다! 이제! 가거라 집에- 하고 소향은 일어서서 을순이 가기를 기다리지만 을순이는 일어선 채로 소향이만 빤히 볼뿐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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