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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도로 털썩 주저앉아서 팥더미에 물푸레 막대기질을 해대는 소향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있다. 한참을 정신없이 매질을 해대던 소향은 문득 방안에 있는 무당을 떠올리고는 물이라도 한 사발 들여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에 붙은 북데기를 털어내고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무당은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있다. 자는 게 아닌 줄 소향은 확인하고 들어서서 무당의 등과 팔을 잡으며 -보살님예. 마이 안 됐십니꺼?- 물어보는데 무당의 온몸이 흠뻑 젖어있다. -아이구야. 보살님예, 땀을 마이 흘리싰네예. 우짜지예… 지가 물수건 해올게예. 계시이소- 소향이 무어라 하는 것을 모르는지 아는지 무당은 그저 신음소리만 길게 뽑아낼 뿐 요동이 없다.
정기에서 무명수건과 물 한 대야를 들고 나서는데 안방에서 큰아지매가 묻는다. -보살님은 좀 어떠시냐?- -땀이 한강 같이 납니더. 마이 아프신 거 같네예- 소향은 대야의 물이 출렁거려 앞치마 앞으로 쏟아지는 것을 잠재우며 방에 들어가 대야를 무당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웅크린 무당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보살님, 좀 일라보이소. 땀이라도 닦아야 됩니더- 그제야 거미 같이 눈을 뜬 무당이 소향을 알아본다. -그래. 내가 마이 안됐네. 니가 고생한다 내 때문에- 하고는 모로 피식 쓰러진다. 소향이 수건을 짜서 얼굴을 닦아주고 머리를 넘겨주고 손을 닦아주는 것을 의식하며 무당은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떻게 태어난 지도 모르고 그저 철이 들었을 때쯤 어느 절 공양간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했고 어느 날 홍매화가 머릿속을 휘젓고 먼 산 아지랑이가 기슴 속을 울렁거리게 했던 날 그녀는 홀로 험한 세상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는 먼 길을 아주 먼 길을 걸어오며 절간에서 주워들은 입담으로 고쟁이 속에 지전 몇 조각은 항상 지니고 살았다. 비록 부초같이 떠돌기는 했지만 키울 자식도 없고 공양해야 하는 부모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남에게는 팔자를 핑계하여 살면서도 자신의 팔자타령은 아예 접고 살았다.
무당은 오한이 들지 않으면서도 땀이 찔끔거리며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낀다. 혼란스런 머릿속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게 만드는 것도 느낀다. 마치 자신을 또 다른 자신이 한 발치 옆에서 보는 듯하다. 후회스럽다. 그리고는 자신이 미워진다.
진정 자신은 재물이 피해가는 몸이든가? 제법 큰돈을 십 년도 넘는 세월 전에 턱에 수염이 더부룩한 남정네에게 털리고 난 후 다시는 그런 일에 마음 두지 않으리라 작정했는데…. 그래서 남자 이상으로 남자편력하고 살았다. 무당이고 보살 아니던가? 술을 먹어도 담배를 피워도 남정네들 앞에서 다리를 꼬든 벌리던 세인들은 관용스럽게 보아 넘겨준 탓이다.
떠돌이 인생이 다리를 피곤하게 하고 해가 서산에 질 때마다 몸 눕힐 자리 걱정이 앞선 탓에 모처럼 소향을 팔아서 꼬쟁이 속에 넣어둔 돈으로 도량이라도 하나 장만해볼 요량으로 그래저래 들은 소문을 쫓아 지리산 자락에 있는 작은 절간으로 찾아간 것이 털보무당의 두 번째 큰 실수였다.
부르는 금액보다 훨씬 적은 돈밖에 없던 무당에게 머리 깎은 남정네는 알 수 없는 호의를 베풀고 벌건 탱화가 비웃는 듯 무당 자신을 내려다보던 절간 아닌 절간을 주고 갔었다. 며칠도 지나지 않아 웬 사람이 오고 그 도량이 들어선 터가 자기 소유의 산이라고 문서까지 내미는 통에 꼼짝없이 내쫓기고 말았다. 용열한 자신이 미워서 며칠을 퍼 마시고 기어이 아편에까지 손을 댄 것이다.
장죽에서 타오르는 아편 연기가 세상의 모든 시름을 앗아가는 양 마냥 아득했다. 영사를 사오곤 했던 목포의 한약재상에는 중국에서 배로 몰래 들여오는 아편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전에부터 알고 있었지만 기생이나 창부들이 하는 것도 자신이 말리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한스런 팔자를 빗대어 자신이 먼저 입에 댄 것이었다.
-아무케도 의원을 불러야 안 됩니꺼? 지가 큰아지매한테 말하까예?- 문득 소향의 말소리에 정신을 차린 무당은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안다. 관세음보살. 소향아, 안 그래도 되니라. 청정법신께서 중생을 구하시고자 내기 내리시는 병이다- 말은 하면서도 눈을 뜨지 않는 무당이다.
그래, 그 지리산 도량에 있던 탱화 속의 보살이 자기를 구하고자 하든 아니면 벌을 내리던 수중의 돈도 다 털리고 아편에 찌든 몸은 땀을 진 빼듯 짜내고 손과 팔이 사시나무 같이 떨리는 육신을 지금이라도 당장 거두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무당이다.
소향은 무당을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지만 속마음은 삼천포 소식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보살님예- 나직하게 불러본다. 신음인지 대답인지 무당은 소리를 낸다. -저… 삼천포서 오실 때 저거 어무이 보고 오싰습니꺼?- 그래, 저 소향이 에미한테도 거금 오천 원을 거짓말하고 얻어서 콧속으로 태워버렸다. 후회하는 한쪽의 마음이 그저 한스럽기는 한데 또 다른 한쪽 마음은 지금이라도 지긋하게 장죽을 한번 빨아 당겼으면… 하고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
-너그 엄마는 점방을 잘 하고 있니라. 으…음… 쿨룩!- 말을 이을 새도 없이 몸 구석구석에서 읊어대는 아편타령에 정신이 다시 혼미해진다. -오데따 얻었심니꺼? 대포아지매 옆입니꺼?- 엉덩이를 바짝 당겨 앉으며 소향이 묻는다. 다시 신음을 길게 뽑은 후에야 무당이 목청을 가다듬는다. -하나 건너서다. 케도 바로 옆이나 다름없지- 눈에 선하다. 소향을 보내고 나서 얻은 점방을 얼마나 쓸고 닦고 했는지 먼지조각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만들고 물건을 많이 사들일 돈이 부족했는지 어물은 듬성듬성했지만 그래도 무당의 눈에는 들락거리는 손님들의 모양새가 미덥게 보였다. -그래예? 장사는 우떠턴가예?- 이번에는 누운 무당에게 고개까지 숙여 바짝 다가대는 소향이다.
거짓말하고 얻은 돈으로 아편을 태워버린 무당이 소향의 추궁에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하지만 삼천포소식에 목매고 있었을 소향의 심정도 모를 리 없다. -너거 엄마가 그는 걱정하지 말라켔다. 그저 니나 잘 있다 오라꼬. 쿨럭!- 도로 모로 돌아누우며 기침에서 나오는 가래가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피하는 무당이다.
그 정도의 소식에 마음이 훤히 뚫릴 리는 없지만 쿨럭거리며 기침을 해대는 무당에게 더 물어보는 것도 역시 편치 않은 소향은 나중에 더 알아보리라 마음먹고 -보살님예. 뭐 좀 잡사야 안 됩니꺼? 우짭니꺼?- -괘안타. 그냥 내삐도라. 좀 지나민 괴아나 질 거다. 요란 안 떨어도 되니라- 지금 무당이 간절한 것은 곡기가 아니라 아편이다. 그것만 한 대 태울 수 있다면 봄날 눈 녹 듯 사그라질 고통인데 돈 떨어지고 아편 떨어진 후에 지금의 털보무당은 그저 수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야가 팥을 털었던 모양이네. 오데 있노? 니 방에 있나?- 작은 아지매의 요란스런 소리에 소향은 방문을 열고 답한다. -나갑니더.- 마당 가운데서 돌아보던 광수에미는 방문 앞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를 보고는 -누구 왔나? 누고?- 작은아지매 가까이로 올 때까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소향은 나직하게 보살님이 오셨다고, 그런데 많이 아파서 지금 방에서 누워있다고, 그런데 점심도 안 먹고 있다고 한다. -우짜꼬?-
언제 나왔는지 광수에미의 소리를 듣고 큰아지매가 마루에 나와 서있다. -자네는 어딜 갔다 오길래 점심도 건너뛰고?- 책망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또 그렇지 않게도 들리는 묘한 말로 묻는다. -예, 아침에 광수 학교 업어다 주고 오다가 들에 여기 저기 들려서 오다보이 그리 됐심더- -자네. 소향이 방에 보살님이 많이 아프신 모양인데 죽이라도 좀 쑤어보게. 때도 되가니 이왕 불 지필 때 같이 하면 따로 안 해도 되고- -예? 예- 하고는 소향을 힐끗 본다. 광수에미의 속마음에 보살이라는 작자는 자기 손님이 아니었다. 집에 들락거리는 것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안방형님의 또는 소향의 일로 온 것을 알기에 대수롭게 여기는 것인데 미음이라도 끓이라는 말에 소향을 보며 니가 할 일이지 왜? 하는 것이다.
-뭘로 할까예? 묵은깨는 냄시가 날낀데… 녹두도 햇것은 없고- 하면서 대청의 큰아지매를 쳐다본다. -내 황태 하나 꺼내올게. 그걸로 해보세- 하고는 뒤돌아서서 광으로 발을 옮기자 -행님, 그라모 몇 개 더 내 오이소. 오늘 저녁은 그걸로 하구로. 무수가 먹을맨큼은 컸심더. 몇 개 뽑아서 끼리민사 딱입니더- 말을 마치는 작은아지매는 입맛을 다신다. -그래, 그럼 해보세- 말끝마다 해보세 하는 큰아지매다. 자기 손으로 하는 것은 없지만 같이 하는 양 말로는 그러는 것이다.
-소향아. 니 뒤에 가서 무수 중에 젤로 큰 거 한 댓 개 뽑아 온나- 정기로 들어가던 광수에미는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른다. 올 가을이 되면 우리도 논도 생기고 밭도 생긴다. 나도 이 집 정기를 들락거릴 일도 없을 것이고 세월이 가면 광수가 이 집 재물을 다 이어받을 것이고 그때쯤이면 자기도 대갓집 마님처럼 비단옷에 지금 형님처럼 광이나 단속하고 살 것이다. 이참에 보살한테 자기신수나 한번 물어보리라. 물론 일이 다 그렇게 풀려가겠지만 남의 입을 통해서 듣는 말은 더 확신을 주는 닭살 돋는 기쁨이렷다.
-광수야! 니 좀 나온나! - 대문에서 나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광수에미는 누가 자기를 부르는지 정기에서 목을 빼어 대문을 보니 창호 어마이다. 저 인간은 또 왜 자기를 부르는지 그다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성큼 정기를 나선다. -와 악을 쓰고 부르노? 뭣 땜시?- -너그 집에 있는 가시나가 을순이한테 물 끼얹고 했단다. 그 가시나 오데 있노? 나오라 케라 - 기세 등등한 표정을 하면서 저고리 소매를 걷어 올리지만 왠지 대문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있다. -누가? 소향이가? 울순이한테? 그칼 리가 없을낀데- 반신반의하는 광수에미다. -오데 있노? 그년은?- 삿대질을 하며 한 손으로 허리를 떠받치는 창호어마이 기세가 소향이 면전에라도 있는 날에는 머리라도 다 쥐어뜯을 기세다. -와이리 시끄럽게 소릴 지르노? 넘에 집에 와서. 조용히 해라. 시끄럽다. 가 오민 물어보재이- 눈을 흘기고 창호어마이한테 나무라는 말을 남기고 정기 쪽으로 돌아서는데 마침 소향이 손에 어린 아이 주먹만한 무 서너 개를 들고 정기문 쪽으로 나온다.
-소향아. 니 이리 좀 나온나. 니! 을순이한테 해꼬지 했나? 물 끼얹고 했나?- 어안이 벙벙한 소향이다. 갑자기 물어대는 작은아지매의 질문에 답을 못하는 소향은 하지만 을순이라는 이름은 기억이 난다. 바로 그 얼띤 처녀 아닌가? -해꼬지예? 지가예? 언지예! 그런 적 없심더- -니년이 을순이한테 샘에서 물 퍼붓다꼬 창호가 봤다 카더라. 죽일 년 아이가? 니 이리 나온나! 내 가마 안 둘끼다- 험한 말은 하면서도 창호어마이는 겨우 솟을대문 안에 한 발밖에 들이지 못한다. -야는 안 그랬다는데 우째 창호는 봤노? 그 자슥이 거짓말하는 거 아이가?- -니는 넘의 아한테 지금 거짓말이라 카나? 갸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데도?-
그제야 소향이 알아차린다. 며칠 전에 샘가에서 을순이라는 처녀를 씻겨주던 참에 동네 아낙이 먹는 샘터에서 더러운 물 흘린다고 나무라며 을순이한테 손으로 물을 끼얹으며 쫓아내던 일을 지금 저 험한 여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갸를 샘 가에서 보기는 했지만 지는 그런 짓 한 적 없습니더- -우리 아가 봤다는데 니 년이 거짓말 하나? 저년이 오데서 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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