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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신음소리와 함께 뽕나무숲을 벗어난 을순이가 고구마밭을 기어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 소향은 고구마골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뛰어간다.
-어~어~- 소향이 눈에 띄었는가 을순이는 땅에 손발을 댄 채로 눈만 올려보며 창호엄마한테 매 맞을 때 내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을순이 아이가? 우째?- 하고는 말을 못하는 소향이다. 눈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머리는 산발이다. 옷이라고 할 것도 없는 홑치마저고리가 다 풀어 헤쳐진 채로 땅을 기어대고 있다. -우짜다… 아이구… 우짜꼬?- 소향이 자신도 모르는 소리만 연발하며 일단 을순이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본다. 그깟 고구마는 안중에도 없다. 골을 밟아대는 걸음이라 연신 기우뚱거리지만 소향은 을순이를 양팔로 끌어안다시피 하고 끌고 오는데, 끌려오는 을순이는 그 해괴한 신음만 낼뿐 아무 저항도 발버둥도 없다.
옹달샘 가에 오자마자 소향도 턱에 차오르는 숨을 느끼고 그대로 둘이 함께 땅에 털썩 쓰러진다. 을순이는 땅바닥에 누운 채 흙에 얼굴을 묻고 있어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소향은 헉헉대던 숨을 몇 번 크게 들이마신 후에 치마를 털고 일어선 후 을순이 옆으로 가서 손으로 얼굴을 받쳐 들고 옆으로 돌려준다. 그제야 을순이가 눈을 뜨고 소향을 보며 또 목에서는 신음을 내기 시작한다. -일나자. 여 있으몬 안되겠다. 퍼떡 가재이- 하며 소향은 을순이를 다시 일으키려 하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발악을 한다. -어~아~악!- 괴성을 질러대는 을순이 때문에 당황한 소향은 을순이를 안으려고 했던 팔을 놓친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냥 두고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을 부른다? 그러는 동안 을순이는 괜찮을까? 어떻게 한다? 발악하는 을순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을순이가 잠잠해진 것이다. 신기하리만치 잠잠해진 을순이 옆에 소향은 쪼그려 앉는다. 을순이는 눈만 껌뻑대며 소향이를 보는데 이번에는 신음도 괴성도 내지 않는다. 그저 숨만 불규칙하게 씩씩댈 뿐이다.
-안 되것다. 닐 놔두고 갈 수 도 없꼬. 같이 내려 가재이?- 소향은 마치 애기 달래듯 을순이 눈을 보며 묻는다. 하지만 을순이 꼴이 말이 아니다. 일단 소향은 을순이를 일으켜 세운 후 옹달샘가로 데리고 갔다. 손으로 물을 축여 머리를 매만진다. 그리고 물손으로 반은 말라버린 눈가의 피도 닦아낸다. 고통을 느끼는지 몸을 버둥거리는 것을 소향은 조금의 완력으로 제압하며 볼과 턱까지 닦아낸 후 을순이 옷매무새를 고쳐보았다. 하지만 섶이 찢어지고 끈은 끊어진 모양새가 성할 리는 없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괴성을 지르며 발악을 하던 을순이가 순순히 소향에게 몸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퍼떡 가재이. 작은아지매가 우짼 일인가 하겠다- 소쿠리를 한쪽 옆구리에 끼고 소향은 남은 한 손으로 을순이의 손을 잡고 마을로 내려오는데 을순이는 곱게 딸려오면서도 입에서 알지 못할 작은 신음을 내고 있다.
-아지매! 아지매요?- 삽작에 선 채로 큰소리로 불러대지만 집은 고요하다. 바쁜 농사철에 아직 해가 남아있는데 집에 돌아왔을 리가 없다.
을순이를 끌어다가 마루에 앉힌 후 소향은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머릿속이 온통 어수선하다. 뽕나무숲을 비틀거리며 허둥지둥 헤치고 사라진 남정네가 을순이를 저리 만든 것이 틀림없지만 누군지 알 길이 없다. 소향은 갑자기 고구마 밭에 가기가 무서워졌다.
-니는 고구마 몇 개 캐라 켔디만 안 오길래 내는 서울 갔나 했다. 모했노? 여태?- 작은아지매 말에 정신이 번쩍 들고 나서야 발걸음이 솟을대문을 들어선 것을 알았다. -아? 예! 그기… 우짜다 보이 늦었네예. 퍼떡 저녁끼리야 안됩니꺼?- 얼버무려서 지체된 속사정을 넘겨버리고자 저녁 얘기부터 꺼내든다. -뒷단에 벌써 불 지피놨다. 니가 가서 뜸 디리몬 될끼다. 고구마 얻어서 무울라 켔디만- 마루에 걸터앉아 채소를 다듬는 작은아지매의 말투가 사뭇 듣기 거북하다. 그런 작은아지매를 피하다시피 하고 뒷단으로 간 소향은 난전에 걸린 가마솥 아궁이에서 훨훨 타고 있는 장작불을 빼내고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꺼버린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따갑게 한다. 할 일이 뭔지도 생각이 나지 않자 소향은 아직 숱이 벌겋게 남아있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는다. 매운 연기에 눈을 감으니 가마솥에서 뜸 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 아무에게도 아무 일 없기를. -니는 그서 모하고 있나?- 작은아지매가 정기 뒷문에 선채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내가 불 때고 밥 앉히고 다 했는데 니는 고구마 몇 개 캐온 게 무신 대수라고 또 쭈그리고 앉아서 염불하고 있나?- 속셈이 불편한 광수에미다.
작은아지매 눈에는 소향이 일이라도 배울랴 치면 앞장서서 할 일이지 시키는 일만 겨우 할 뿐 뭐 하나 팔 걷어붙이고 하는 게 하나도 없이 보인다. 실상 소향이로서는 자기 살림이 아닌 이상 또 사실 살림을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이니 그저 눈치껏 할 수 있을 뿐이지만 광수에미는 알 리가 없다. 소향은 -그기 아이고예- 하면서 매운 연기 탓에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선다.
-아니고 기고 간에 내가 니 하수나? 아니몬 니가 내 하수나? 으이? 집에 일 하러 왔으면 일답게 하든지, 내가 니를 상전으로 모시고 산다. 내가!- 모처럼 안방도 비어있다. 제법 큰소리로 닦달을 하는 광수에미다. -누가 상전이고 하수고 합니꺼? 죄송합니더. 아지매- 늘 그렇듯이 그저 손이 남는 사람이 저녁을 준비하는 것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까다롭게 따지는 작은아지매다.
-니도 보민 알끼다. 니는 고구마 몇 개 캔다꼬 유람 다니는 새 내가 정기일을 다 해야 되겠나? 카고… 늦게 왔으민사 퍼떡 서둘러서 나물반찬이라도 하던지, 그저 맥 놓고 아궁이 앞에서 그기 모하는 짓이고?- 하긴 왜 늦었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작은아지매는 알 리가 없다. 그래도 굳이 소향이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만일 그 남정네만 아니었다면 벌써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을순이의 그 험악한 모습과 또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말을 해봐야 말꼬리만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이다.
-아지매, 미안합니더. 그럴 일이 좀 있어서예- 하고 돌아서서 작은아지매가 다듬어 온 나물을 들고 씻으러 정기를 나선다. -그럴 일이 있었다고? 니는 삼통하는 말들이 비밀투성이네? 오데서 굴러먹다 온기 내숭 떨고 카노? 나물 그 놓고 말해 보거라. 무신 그럴 일이고?- 그 말이 소향의 마음을 찌른다. 굴러먹다 왔다는 말이 적어도 좋은 말이 아닌 줄은 장에서 싸움꾼들이 종종 주고받는 것을 들어서 안다. -지가예?- 소향은 눈꼬리에 힘을 주어 광수에미를 본다. 내가 굴러먹었느냐는 반문이다. -지가 여와서 이렇게 살아도 굴러먹든지 까꾸로 먹든지 하지는 않았심더. 작은아지매. 그카지 마이소- 앙칼지다시피 한 목소리다. 소향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그동안의 처참함과 울분이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이기 어른이 말하는데 오데서 눈까리 쳐뜨고 대드노? 니 년이 이집에서 뭐하는 년인데 밥 축내고 내기 대드노? 니 도대체 모하는 년이냐? 여 왜 왔나?- 광수에미도 소향의 눈꼬리와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안방 차지 형님한테서는 온갖 소리를 들어도 왠지 군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동네에서는 자기에게 험한 소리 하나 하는 사람이 없는데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어린 것이 얼굴 똑바로 들고 또박또박 말하는 데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광수에미다. -지가 여 왜 왔는지는 큰아지매한테 물어보이소. 카고, 지는 여서 그저 밥 축내는 거 아입니더. 그것만 알아두이소!- 잘라서 말하고는 휑하니 뒷단으로 나물 바가지를 들고 나가버린다.
정기에 혼자 남겨진 광수에미는 기가 차다. 아마도 저것이 형님이 자기에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얕잡아 보고 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일 정도로 치마꼬리를 날리며 소향이 앉아서 나물을 물에 헹구는 옆에 가서 다짜고짜 소향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니 년이 내기 모라꼬? 큰아지매한테 물어보라꼬? 니년 눈에는 이집에 행님밖에 안비나? 내말은 말 같잖아서 니가 지금 어른한테 대드나?- 작은아지매의 우악스런 손에 쥐여진 머리채 때문에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소향은 그 손을 움켜잡고 -와 이캅니꺼? 이거 놓이소!- 하고는 발버둥을 치는데 그만 두 여자가 벌렁 나자빠지고 만다.
-와! 이년이 사람 치네. 동네 사람들 보소. 이년이 사람을 잡아!- 땅에 뒤로 벌렁 자빠진 광수에미가 소리를 지른다. 누가 누굴 자빠뜨린 것도 아니고 그저 머리 잡힌 소향이 버둥대다가 일어난 일인데 광수에미는 특유의 억지를 뱉어낸다. -지가 운제 아지매를 칬다꼬 그랍니꺼? 사람 잡지 마이소!-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며 소향이 서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사이 광수에미도 일어섰다. -오이야. 니 년이 오늘 내캉 끝장내자. 니 꼴도 비기 싫다. 당장 나가. 이집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호령이다.
나가라는 말이 비수처럼 마음을 가른다. 소향은 지금 당장이라도 삼천포로 달려가고 싶다. 털보무당이 너그 엄마 점방 잘 하고 있다 하고 말은 했지만 왠지 미덥지 못한 판인데 지금당장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고개를 들고 저녁 하늘을 보며 소향이 긴 한숨을 내쉰다. -아지매요, 지는 예. 정말로 집에 가고 싶습니더. 여서 한 시도 있고 싶은 맘이 없습니더. 케도예… 지는 갈 수가 없습니더. 아무리 작은아지매가 가라 해도예. 갈 수가 없심더- -니 년이 몬데 가라면 갈 거지 되니 안 되니 따지노? 이년이 갈수록 태산이네? 내 말이 니기는 말 같지도 않냐?- 한발 앞으로 나서서 다시 소향의 머리채라도 잡을 기색이다. 소향이 뒷걸음으로 간격을 남긴 채 광수에미의 험한 말을 되뇌어본다.
지금 이 순간까지 비록 돈 때문에 천리 길을 따라 나섰지만 그렇다고 화냥질을 한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이리도 정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 하는 의문까지 생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자기가 하겠다고 약조하여 생긴 일, 그 일이 집안을 살리고 동생을 학교 보내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대처로 장사를 안 다녀도 되는 것이다. 참고 삼천포로 돌아갈 때까지 또 참아야 한다.
-미안합니더. 아지매- 속은 터질 듯 울분으로 가득 찼지만 그래도 험한 작은아지매하고 상대하기는 힘에 부친 소향이다. -미안? 뭐가 미안노? 응? 아이다. 니 아까 갈 수 없다 캤제? 가고 싶어도. 오냐. 내 오늘은 그저 안 넘어간다. 뭐꼬? 그 이유가? 말 안 할래? 니 년이 내를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오이야. 니는 이집에서 행님만 상전인 줄 아는 모양인데 오늘 내가 누군지 똑똑히 봐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발짝이나 떨어져있던 소향의 머리를 다시 휘어잡는 광수에미다.
억센 손아귀는 사정없이 소향의 머리를 휘두른다. -이년아. 머꼬? 못 간다는 이유가? 말 안 할래? 죽어야 아나?- 머리채를 잡힌 소향이 대항할 힘도 없이 땅바닥에 쓰러지자 광수에미도 손을 놓고 씩씩거리며 팔소매를 걷어붙인다. -오데서 온기… 내를 우습게 보노? 오늘 한번 보자. 니가 내를 그리 봤제?- 광수에미가 또다시 허리를 굽혀 소향을 잡으려 한다. -얼라 놓을라꼬 왔심더- 일갈의 소향이다. 광수에미의 손이 소향의 머리 위쯤 이른 순간이었다.
일순간 광수에미의 동작이 멈추고 자기 귀를 의심해본다. 분명히 들었다. -니 지금 뭐라 켔노?- 소향은 일어날 생각도 없이 덜컥 내뱉은 말마디를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이제는 감출 필요도 없는 말이다. 그저 담담히 입을 다물고 땅만 내려다본다. -뭐라꼬? 니 아 놓으러 왔다 켔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머릿속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많은 경우를 조합해보지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 광수에미다. -니? 아 들어섰나?- 하고는 앉아있는 소향의 배를 힐끗 본다. 그래도 소향은 아무 말이 없자 광수에미가 소향의 앞에 팔짱을 끼고 쪼그려 앉는다. -뭐꼬? 누구 아를?- 하고는 소향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뭔가 이제야 생각의 가닥이 잡히는 듯 광수에미는 얼굴이 붉게 변하고 일그러진다. -이년들이…- 하고는 정기뒷문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마당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 때마침 함창에 나갔던 태섭이 내외가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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