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해가 짧아진 지 오래다. 아이들이 들어선 뒤에는 문이 그대로 열려있고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있다. -너그 큰집에 가서 밥 달라고 해라. 내는 아파서 누버있을란다- 큰집이라는 말에 광수의 눈이 번쩍 한다. -인제 큰집에 가도 되나?- 고개를 앞으로 쭉 빼내어 앉아있는 에미한테 확인을 하는 광수다. -말 안했나? 내는 아파서 밥 몬 한다꼬! 가서 캐라. 내는 마이 아푸다꼬- 하고는 덜렁 누워버리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이들이 튀어나가고 열린 문만 바람에 흔들거린다.
남폿불을 앞에 두고 태광이 형수와 앉아있고 그 앞에는 도지를 적은 장부가 놓여있다. -올해도 농사는 잘 됐심더. 샘 치다가 다친 주섭이만 빼고 전부 다 마무리 됐심더- 태광이도 안방에 들어와 본 지가 한참이나 됐는지 방안을 휘둘러본다. -주섭이 아제는 섭섭지 않게 하실 거지… 몸도 다쳐서 우환인데- 장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큰아지매는 주섭이 얘기를 한다. -안 그래도 도지를 반만 받았심더. 카고… 그 만큼이라면 넉넉하이 셈 친거나 다름없습니더- -예. 고생하셨네요- 짧은 말이 용무가 끝났다는 신호다. 태광은 무슨 말이라도 늘어놓아야 될 것 같은 심정인데 이렇게 딱 잘라서 말을 마쳐버리는 형수가 차갑게 느껴진다. -행수님- 말과 함께 다리를 반대로 꼬아 앉으며 태광은 헛기침으로 목을 털어낸다. 큰아지매는 태광의 부름을 들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대답 없이 그저 태광을 바라본다. -인제… 가을걷이도 다 끝나고 했으이께네… 행님한테 말씸 드리서… 우리한테 주신다든 논하고…-
미처 말도 다 마치기도 전에 밖에서 소란스런 발소리와 함께 광수와 재수가 우루루 방안으로 몰려든다. -큰엄마. 엄마가 큰집에서 밥 달라고 카랬어. 배고푸다- 한동안 보지 못한 아이들이다. 큰아지매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재수의 손을 잡아 옆에 앉히고 머리를 쓸어 올려준다. -아직 저녁을 안 먹었구나. 배고푸겠네. 그래. 광수야. 나가서 소향이 아지매한테 밥 달라고 해라- -와 집에서 안 묵고 여 와서 난리고? 너그는?- 태광이 이이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나무란다. -엄마가 인제 큰집에 가도 된다 캤다- 마치 자랑스럽게 태광에게 말하는 광수를 보고 태광은 마누라가 한 언행이 고스란히 형수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느끼고 얼굴이 스멀거린다. -아아들 밥도 안 멕이고 이 인간은 뭐하고 있노? 내 참!- 분위기를 얼버무리려 마누라 욕을 해대는데 광수가 -엄마가 아푸다꼬 큰집에서 먹으라고 했는데- 하고는 태광의 눈치를 본다. -동서가 아픕니까?- 큰아지매가 묻는다. 태광은 얼른 알아차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면전에 시퍼렇게 대들던 마누라 아닌가? -뭐… 몸살이 난 모양입니더- -그럼… 소향이 보고 저녁 차리라 할 테니 아이들하고 같이 잡숫고 가시지요. 그나저나 심합니까?- -아입니더. 뭐 하는 일 있다꼬 아플끼 있습니꺼? 그저 하루 이틀 자고 나민 났겠지예- 태광은 아이들을 큰집에 보내는 것으로 마누라의 화해의 신호가 시작된 것임을 알지만 들은 바로는 소향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휘둘렀다는데 이 정도의 화해가 안방에 통할런지 태광은 그저 염려스럽다.
불을 밝혀서 소향이 저녁상을 차리자, 태광은 상을 마루에 들인 후 아이들에게는 부엌에서 먹으라고 한다. 아이들도 군소리 없이 후다닥 정기로 몰려들고 바닥에 셋이서 옹기종기 앉았다. -천천히 무라. 쿤데… 와 그리 안 왔노?- 아이들을 보며 소향이 묻는다. 밥숟가락에 목이 메여 말을 할 수 없는 광수가 눈짓만 보낸다. 기다리라는 눈치다. -그래. 그래. 밥 묵고 말하재이. 재수도 천천히 묵고- 입안의 밥을 대충 삼킨 광수가 입을 연다. -엄마가 가지 마랬어. 쿤데 오늘부터는 가도 된다 캤다- 하고는 큰 밥술을 입에 퍼 넣는다. 철없는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소향에게는 우습게 보인다. -그래? 카모… 인제 내기 글도 갈카줄 수 있제?- 입을 오물거리며 밥을 먹던 광수가 순간 멈추고 소향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것까지는 엄마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니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어쩐다? -모리겠다. 내는- 하고는 도로 밥을 먹는다. 소향은 광수가 하는 행동의 내막을 물밑 보듯 알 것 같다. -그래. 담에 너거 어무이가 갈차주라 카모 그때 갈카도. 알았제?- 광수도 마음의 부담을 덜은 양 얼굴에 미소가 퍼지며 볼이 미어지게 밥을 씹는다.
마루에서 혼자 밥을 먹던 태광이 안방에다 묻는다. -행수님. 행님은 오데 갔심니꺼? 저녁도 안 자시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낼 아침에 제가 절에 갑니다. 그래서 차를 한 대 맞춘다고 알아보러 읍내에 갔는데 한참 됐으니 오실 겁니다- -예? 절에요?- 집안 식구들 아무도 절에 다니지 않았는데 갑자기 절이라니? 의아한 태광이 입안을 비운 후 -오데 가십니꺼?- -대승사에 갑니다. 한 한 달이나 있다 올 겁니다- 큰아지매는 일부러 한 달이라는 기간까지 묻지 않았는데도 태광에게 알린다. -예? 달포씩이나?- 태광에게는 뜬금없는 소식이다. 그동안 형수가 집을 그리 오래 비우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집안에 손을 점지해 주십사 정성 드리려 갑니다. 서방님도 그리 아시고 집안에 시끄러운 소리 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경고다. 듣고 있지는 않지만 마누라에게 전하라는 큰아지매의 엄중한 경고다. 그리고 손을 본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확인해 버리는 순간이다. 태광은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남은 밥을 먹고자 하는데 갑자기 식욕이 없어져서 상을 물리고 아이들에게 가자고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내달았다.
소향이 상을 치우고 아이들과 함께 아래채 자기방에서 놀고 있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 잠깐 큰아지매한테 갔다 올게. 너그는 놀고 있거래이- 말동무도 귀한 동네에서 마치 막내 동생 같은 아이들과 노는 것이 소향에게는 즐거운 일이다. -큰아지매요- 그저 부르는 것으로 인기척을 대신하며 문을 열고 들어선다. 소반 위에 남폿불이 하늘거리는 것을 쳐다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큰아지매를 보고 소향은 무거운 분위기를 직감한다. 윗목에 자리를 잡고 앉아도 역시 아무 말이 없다.
큰아지매도 내일 아침에 자기가 떠날 것이라 이것저것 당부할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서방을 내주고 합방시키려는 것이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내가 내일 대승사엘 간다. 가면 한 달은 있을 것인데…. 그동안 이집 살림을 내가 없어도 있는 듯 알아서 하도록 해라- 입을 달싹거리며 말은 하지만 눈은 여전히 남폿불에 두고 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 이어서 하려는 듯하다가 말이 끊기고 한참을 무거운 방안 공기와 씨름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연다. -광수에미가 또 오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안에 발 들이지 마라 해라. 내가 영감한테도 말해 놓을 거다- -예- 소향은 쉽게 대답하며 속으로는 빨리 아래채 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또 말이 끊어진다. 소향도 하늘거리는 남폿불에 눈을 맞추고 그저 큰아지매 입에서 무슨 말이든 빨리 나오기만 기다린다. -보름이 사흘 남았나? 이틀 남았나? 그래. 사흘 남았구나- 하고 고개를 들어 소향을 본다. -소향아- 부르는 소리에 남폿불에 흠뻑 취해있던 소향이 놀란 듯 얼굴을 들어 큰아지매를 보며 답한다. -예?-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지만 소향은 영문을 모르는 둥근 눈이고 큰아지매의 눈은 생각이 많은 그윽한 눈이다. -보름날에 합방을 하도록 해라- 소향은 정신이 번쩍 든다. -보살님이 지난번에 왔을 때 잡은 날이다-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내가 절에서 정성을 드리고자 한 달을 비운다. 너도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정성을 드리도록 해라- 위도 아래도 없이 정성을 드리라?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라? -여자란 그저 남자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부정 탈 말이나 행동을 해서도 안 되고- 소향은 누구한테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또 무슨 어려운 말이 남았는지 뜸을 들인다. -이방은 내가 없더라도 매일 청소는 하지만 아무도 들여서는 안 된다- 안방에서는 이부자리를 펴지 마라는 소리다. -너와 내가 하는 일은 하늘과 조상님들한테 도리를 하고자 하는 일이고 또 한편은 집안의 면모를 옳게 갖추고자 하는 일이다- 소향은 도리고 뭐고 면모고 뭐고 알 길이 없다. 그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치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망나니 앞에 꽁꽁 묶인 채로 목을 내밀고 있는 사형수 같은 심정이다. 큰아지매는 더 이상의 말이 없다. 그저 흔들거리는 남폿불을 보고 있다. 큰아지매의 심정은 최대한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절대적 객관성을 정당화한 말을 한 것이라 여기며 다행이라 생각한다. 비록 소향이 다 알아듣지 못했다 치더라도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태섭이 돌아온 모양이다. 소향은 말없이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와서 아래채로 가버리고 마루에 어정쩡하게 선 태섭이 안방에 대고 한마디 한다. -낼 아침에 여로 온다 캤소- 안방의 대답을 잠시 기다렸지만 들리는 소리가 없자 태섭은 다시 헛기침을 하고 건넌방으로 간다.
소향이 안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태섭은 분명 마누라가 무슨 말인가 한 것을 직감한 터라 마누라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안 하는 그 심정도 알 것 같아서 나무라지 않는다. 알다가도 모를 마누라다. 감히 다른 여자를 들여서 그것도 집에서 합방을 시킨다? 그동안의 마누라의 행적을 본다면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이 들고 힘 잃어가는 자신을 떠 받쳐줄 수 있는 아들을 얻고자하는 심정도 헤아릴 수도 있다. 또 달포가량 집을 비운다고 하지 않는가? 씨앗 없이 정성으로 손을 본다는 체면치레고 또 집안에서 자기 서방을 품는 딴 년하고 같은 공기를 숨 쉬고 싶지 않다는 속뜻이겠지만 여하튼 가다듬는 면모가 마누라답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일다의 방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