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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태섭은 마누라가 한참을 따라 걸어 내려오는 것이 불편하다. 다시 올라가야 되는 것도 그렇지만 왠지 한시라도 빨리 마누라의 근처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평소에는 사람에게 뒤통수 보이는 것을 예사로 하던 마누라가 오늘은 꾸역꾸역 따라오고 있다.
-고마 올라 가래이. 내도 퍼떡 가야 어둡기 전에 집에 갈 낀데. 기별할 수도 없을 낀데… 내가 섣달 보름께나 올까?-
태섭의 발목만 쳐다보던 마누라가 고개를 들어 이제 막 산꼭대기에 걸린 해를 쳐다보며 -그렇네요. 해가 지기 전에 가야지요- 하면서 눈은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다.
청명한 하늘이다. 사실 산이 가파르게 높아서 해가 산꼭대기에 걸린 것이지 아직 해가 질 때는 아니기에 가려는 태섭이나 보내는 마누라나 그리 급한 마음은 없다. 단지 나눌 얘기가 마땅히 없을 뿐. 그러나 실은 마누라의 마음속에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음직도 하지만 그것이 뭔지 정확히 모르기도 하여 그저 묵묵히 따라나선 것이다.
-그러시구려. 섣달 보름이면 달포가 되니 그때쯤 오시면 됩니다- 하고는 태섭의 얼굴을 본다. 이럴 때가 태섭은 제일 불편하다. 평소에 어디 얼굴 맞대고 얘기 나누는 마누라였던가? 방바닥을 보거나 남폿불을 보거나 아니면 아예 모로 돌아앉아 자기만 널어놓는 것이 일상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배웅까지 하는 마누라다.
-알았소. 내 그때 오리다. 그리고 그때 논문서도 같이 가져오지. 드가소 이제. 낸 갈란다- 하고는 휙 돌아서서 비탈길을 내려온다. 머리 뒤에서 발자국 소리라도 나는가? 하고 신경을 써보아도 아무 소리가 없다. 내려가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태섭은 발을 멈추고 돌아선다. 그리고 팔을 들어 들어가라는 시늉을 보내고 다시 걸어 내려간다.
큰아지매는 그 자리에서 내려가는 영감의 뒷모습을 한없이 내려다본다. 길은 굽어져서 이제 모습도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하늘을 본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내쉰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아까 대웅전 법당에서 잠시 합장하고 눈을 감고 있을 때만 해도 머릿속은 온갖 것들로 어지럽게 채워져 있었는데 이제 영감이 가고 혼자 남아서 이 넓은 하늘과 바람과 산과 그리고 적막이 마치 영혼을 씻어주는 청량제 같다고 여겨진다.
-잘 왔지- 하는 혼잣말을 뱉으며 돌아서서 절로 올라간다.
* * *
태섭은 흙투성이 구둣발로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 저녁 어둠이 짙게 내렸을 무렵 산북면에 도착하였고 다행히 지나는 트럭을 얻어 타고 점촌까지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피곤한 몸을 가누면서 목이라도 축일 겸 함창 초입에 있는 주막에 들려 탁주 한 사발로 끼니 겸 목을 축였다. 한 사발 들이키느라고 참았던 숨도 내쉬면서 비로소 자신을 둘러보니 하루 종일 흙길에 발품 판 흔적이 역역하다. 후줄근한 옷하며 뿌연 구두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몰골이다.
손으로 가랑이를 툭툭 털어내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회장님 아입니꺼?- 이런 꼴로 누구를 만나기 싫지만 집근처이고 늘상 사람들이 많은 주막이라 피할 수 없는 노릇. 태섭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지목수 아인교? 우짠이로?- -우짠 일이 있어야 주막에 옵니꺼? 그저 한잔 하고 있던 중입니더- -근처에 일이라도 있었나?- 하소, 하는 말투지만 지목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일도 일 같잖은 거지만 끝났다고 오늘 한잔 하던 중입니더. 지 술 한잔 받드이소- 하고는 벌떡 일어서서 잔과 주전자를 들고 태섭이 있는 자리로 온다.
평소라면 낯가림을 하여 핑계를 대고 합석을 피하겠지만 시끌한 주막에 혼자 앉아있는 것 보다는 덜 어색하겠다고 생각한 태섭이 마다 않는다. -자, 이리 앉아서 내 술도 한잔 해야지. 내만 받으면 쓰나?-
한참이나 나이 많은 지목수에게 하소, 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술이 잔에 촐랑거릴 정도의 잔을 태섭이 받으며 -어어… 넘는다-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에 대고 마신다. 평소에는 정종이나 삐루를 즐겨 마시는데 오늘 탁주 몇 잔에 배가 벌떡 부르다. 잔을 지목수 앞에 놓고는 자기 주전자의 술을 따르며 -일행이 있는데- 하면서 그쪽을 보지만 눈에 익은 그 장씨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지매. 여 안주 좀 묵을만 거 주소- 그저 간단히 두어잔 할 목적이었는데 마침 지목수가 동석했으니 그 핑계대고 안주거리를 주문한다. 술을 다 마신 지목수가 잔을 다시 태섭이 앞에 놓자 -어어, 내는 천천히 하지. 거푸 서너 잔 무웃디만 오르네- 하면서 손바닥을 잔 위에 막는다.
-밸일 없으시고예?-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주고받는 인사다. -밸일은 무신… 지목수 땜에 우리 동네 깔끔하게 일도 다했고… 올해는 농사도 괘안코- 하면서 태섭은 또 주전자를 들어 지목수 잔에 붇는다. -좀 전에 삶은 거라 맛있을 깁니더- 하면서 주모가 김이 설설 서리는 삶은 돼지고기를 한 접시 놓는다. -아지매 이거 한 사라 더 하소- 영문을 모르겠다는 주모를 보고 태섭은 지목수 좌석 쪽을 눈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갖다 주라고- 하지 주모가 알아듣는다. -우리는 안 그래도 됩니더- 지목수가 사양은 하지만 만류는 안한다. 태섭은 속으로 이것도 다 후일을 위한 투자이겠거니 생각한다.
-쿤데… 우째 같이 일 다니는 그… 뭐더라? 성이?- 하면서 지목수의 눈을 쳐다본다. 모르지는 않지만 모른 체한 것이다. -누구? 아! 장씨? 그 사람도 했지요 같이. 돈 받고나서 바로 한양에 갔다 온다고 술도 안하고 갔심더. 막차 놓친다꼬- -아~ 그 사람이 쓸만하던데… 지난번에도 지나가는 말로 우리집에 와서 일하몬 우떤냐고 물은 적이 있지-
태섭의 말을 들은 지목수가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통에 말을 할 수 없는 모양새이다. -우~우~워~- 하다가 기어이 덜 씹은 고깃점을 꿀꺽 삼키고는 -컥~컥~- 사래를 뱉어낸 후 말을 잇는다. -카지예. 진국이지예. 와예? 회장님 정말로 그 사람 머슴으로 디릴 겁니꺼?-
이번에는 태섭이 손수 술을 자기 잔에 붓는다. -전에도 말했듯이 생각이 있으이 말했지 백지 그럴 리가 있나?- 하고는 술을 마신다. -그때 장씨도 안 캤심니꺼?. 새경만 맞게 준다민사 못할 것도 엄따꼬예- -맞다. 그랬지- 입가를 손으로 훔쳐내면서 태섭이 대답을 하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지목수에게 묻는다. -도시 그 새경이라는 기… 우리야 전에도 머슴을 들이봐서 알지만… 그 장씨라는 사람이 말하는 새경이라는 거는 울매나 되오?-
지목수도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아무케도 그저 무식한 머슴하고는 다를 낍니더. 그 사람 일 하나는 지대루 합니더. 케서… 넘들보담은 더 주시야 할낍니더- 무식한 머슴보다는 낫다? 머슴이면 머슴이지… 땅 파고 괭이질할 건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 장씨라는 사람이 보여주었던 여기저기의 재치나 기질이 떠오른다. -아, 일만 돈값을 한다민사 내 몬줄 것도 없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모가 고기 접시를 들고 자리 옆에 와서 -저 디립니더- 하고는 지나쳐서 지목수와 같이 온 무리의 탁자 위에 놓는다. 지목수가 손짓으로 우리가 보냈다는 듯 태섭을 향하는 시늉을 하다가 문득 탁자 위의 주전자를 자기가 들고 온 것을 기억하고는 -내 정신 좀 보지. 술꾼들 술을 지가 다 들고 와놓고서- 하고는 일어서서 주전자를 들고 그쪽 탁자 위에 놓고는 뭐라 몇 마디 주고 온다.
태섭은 주모를 부른다. -주모. 술 한 되 더 주소- 지목수는 탁자 위의 주전자를 들어 무게를 감지해보고는 -아즉 술이 마이 남았심더- 하며 태섭을 만류한다. -사람이 몇인데… 한 주전자로 되나? 저쪽에 갖다 주라고- 하며 고갯짓으로 무리 쪽을 가리킨다. -아? 예. 그리 안 해도 됩니더- 송구스러운 눈치다. -그카지 말고. 운젠지 모리겠지만… 그 장씨라는 사람이 내리오민 내기 한 번 오라 카소. 정말로 생각이 있으몬 고만 말 맞춰 가지고 집에 들어오라 카지 뭐!- 하고 지목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모양이 자기는 단호히 결정 냈다는 뜻이다. 지목수도 눈으로 전해 받은 뜻을 알아차린 양 -그카지예. 곧 올낍니더. 사나흘 사이에-
-아이구~ 오늘 발품을 마이 팔았디만… 사지가 욱신거리네- 하며 팔을 펴고 허리를 젖히며 기지개를 크게 펴고 -지목수. 내는 고마 갈라네. 술도 됐고. 그럼 내 그리 알고 가네- 하고 일어선다. -들어가실라고예? 그라이소. 그럼- 하고 같이 일어선다. 주모에게 돈을 치룰 때 지목수 무리가 우루루 태섭이 옆으로 와서 고기와 술의 감사함으로 머리를 두어 번 꾸뻑거린 후 자리로 되돌아가고 태섭은 얼큰한 기분으로 싸늘한 공기를 맞으며 태봉으로 길을 나선다.
하도 많이 다녀서 제법 먼 길이기는 해도 어디에 무슨 돌부리가 있는지도 알 정도의 길이다. 밤하늘에는 청명한 달이 떠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꼽아본다. -그럼… 낼모레네- 하고는 다시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본다.
늦가을 밤의 달이 거의 다 차있다. 구름도 없이 검게 보이는 하늘 위의 달은 그저 한쪽이 조금 비워져있을 뿐이지만 가릴 것 없는 탓에 빛이 만발한다. 얼굴은 술기운에 화끈거려서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기는 제법 찬 것을 느낀 태섭이 입은 옷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세우고 다시 길을 재촉하며 머릿속으로 소향이를 떠올려본다. 어느 절간에 앉아있을 마누라 생각은 잊은 지 오래다.
* * *
소향이 호롱불을 소반 끝에 올려놓고 좀전에 광수가 적어준 기역 니은 디귿자들을 차례로 적어보는 동안 광수와 재수는 남폿불을 방바닥에 놓고 배를 깔고 숙제를 한다. 연필이며 공책을 재수로부터 얻어서 일단 쓰기로 하고 나중에 좋은 걸로 사주기로 했다.
이렇게 공부를 얼마나 하면 삼천포에 편지를 쓸 수 있을까? 하고 앞선 생각을 하는 동안 연필 끝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게 엉뚱한 획을 긋기도 한다.
저녁밥을 지어서 혹시라도 영감님이 일찍 오면 해서 일단 정기에 상을 차려서 보자기로 덮어놓고 자신은 쪼그려 앉아서 한술 뜨고 말았다. 큰아지매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다른가? 하고 생각하는 동안 또 연필은 엉뚱한 황새발자국을 그렸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공책에 머리를 박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영감님이 온 게 분명하다. 큰아지매가 안방에 있을 때 소향은 영감님이 오든지 가든지 상관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무주공산 같은 집에 자기 혼자만 있다 보니 인기척에 답을 안 할 수가 없다.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와서 댓돌에서 막 신발을 벗고 대청에 올라서려던 영감님을 향해 -진지는 드싯는가예? 우짜까예?- 하고 묻는다.
태섭은 들어오면서 소향이 방 앞에 조무래기 고무신이 있는걸 보고 조카들이 와있는 것을 알았다. -아아들이 왔나?- 저녁상에 대해 묻는 소향의 물음에는 상관없이 엉뚱한 질문이다. -예. 숙제 한다꼬예-
돌계단 끝에 서있는 소향은 고개를 들어서 태섭을 보고 있지만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지붕아래라서 그저 사람 형색만 보일뿐이다. -내는 저녁은 묵고 왔다. 됐다-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소향도 속이 시원하다. 이제 하루가 다 끝난 홀가분한 기분이다. 방으로 들어온 소향은 소반 앞에 다시 앉아서 글자를 적어나간다. 정신없이 적다가 인기척이 없는 걸 느끼고 보니 광수재수가 둘 다 엎어진 채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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