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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한참을 넋을 잃고 멍하게 선 채로 어제의 일을 떠올리는 사이 어느새 소향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따뱅이끈을 입에 물고 정기 문턱을 넘어 들어온다. 광수에미는 서둘러 달려들어 소향의 머리 위에 있는 옹기 물동이를 잡아 내린다. 살가운 행동이다. 소향도 의아한 생각이 들지만 순간 잊어버리고 늦은 아침을 걱정한다.
-영감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모리지만예, 지는 반찬을 몬하겠심더. 아지매가 큰아지매 오실 때꺼정 여서 잡숫고 정기 살림 좀 해주이소. 지가 허드렛일은 다 할게예- -오데 내가 이 정기서 한두 해 살아봤나? 걱정 말거래이. 아, 우리식구도 무야되이, 까짓 상하나 더 보는 긴데 우떻노? 그 카도록 하자-
시원한 대답이다. 소향은 잠을 푹 잔 탓인지 아니면 가시 없는 말을 내뱉는 광수에미의 후덕한 대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에 기분이 좋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에는 몽당연필을 들고 공책에 글씨도 열심히 적어본다. 입으로는 중얼거리며 발음도 내보고 단어가 완성되면 또 한마디 단어도 입에 올려보면서 말과 글이 같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거저 신기할 뿐이다. 정신을 놓고 공책을 넘기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초겨울 짧은 햇살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아지매, 배고프다!- 재수가 푸념을 하는 소릴 듣고서야 소반을 물린 소향이 -그래, 안 그래도 때가 됐네. 쪼매만 있거래이. 광수야. 니는 내가 쓴 거 맞나 좀 봐도고. 니는 내 선생님 아이가!- -알았다. 아지매-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면서 정기 밖이 어두워지는 것에 소향의 마음속이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탈출구가 필요하다. 질식할 것 같은 압박이 조여 온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소향은 삼천포를 떠올린다. 파도가 여유롭게 너울거리던 거북바위 위에 앉아서 남해를 보던 기억을 한다. 내가 왜 여 와 있노? 아 놓으러 왔제! 빨리 놔야 집에 갈낀데! 그래! 빨리 놓으라민사…. 빨리 합방을 해야제! 그깟 넘들 다하는 합방인데 내는 우예 몬하겠노? 그래! 내가 빨리 합방하고 아 놓고 해야 엄마하고 종락이하고 살거 아이가?
부지깽이를 탁탁 털면서 벌떡 일어선다. 무슨 일인지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작은아지매는 땟거리 걱정도 없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뜸 드는 밥솥을 보며 찬거리를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헛기침소리가 들리고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 후 정기문 앞에 영감이 서있다. 흠칫하는 소향의 시늉을 보고 태섭이 다시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녹인다. -아아들 방에 있나?- 신발이 나뒹구는 것을 보아서 알련만 물어본다. -예. 숙제하고 밥 묵고 간다꼬예- 태섭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소향은 정기바닥을 보고 대답한다. -오늘은 재우지 말고 일찍 보내고 나서 이따가 물 한 그릇 떠서 방에 들루커라. 내는 저녁은 묵고 왔다-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돌아서서 마루로 올라간다. 소향은 심장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을 느낀다. 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뿜어본다. 아까 그렇게 해보니 한결 차분해 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 *
큰아지매는 저녁 공양을 앞에 두고 한참을 쳐다본다. 반찬이 세 개가 올려져있다. 보살들과 함께하는 공양간이라 두런두런 말과 움직임이 괜스레 큰아지매의 심경을 괴롭힌다. 입맛도 없고 절간의 음식이 세속에서 먹던 것들과는 양념에서부터 다른지라 배가 고파도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양초를 두어 개 피워놓았다지만 그 불빛보다 창호 밖의 보름달이 더 훤하다. 간단히 목례를 주위에 준 후 큰아지매는 공양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온다. 그래! 저것이 보름달이구나. 한두 번 본 달은 아니지만 유독 오늘은 더 청명하게 보인다. 하늘에는 구름도 한 점 없다. 길조인가? 그래! 길조이어야 되지.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와있는데… 큰 숨이 공기라도 휘저을 양 큰아지매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대웅전 앞으로 발을 옮긴다. 대웅전을 앞으로 품은 뒷산의 형태가 달빛에 희미하게 보인다.
낮에 어느 보살로부터 들은 소리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마주 볼 때 대웅전 지붕위로 보이는 산중턱의 바위가 봉긋하게 솟아있다. 그 바위가 온산의 정기를 모아 대웅전 아래로 내려 보낸다고 했다.
영감과의 지난 세월이 떠오른다. 곱게 자란 탓에 그리고 부잣집에 시집온 탓에 고생이라고는 해보지 않았다. 그 혹심했던 일제 시대에도 항상 태봉뜰이 살림을 여유롭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빈 공간이 있었다. 아무리 들어도 경상도 사투리는 설익은 개떡마냥 꺼끌거렸다. 그 사투리를 구사하는 영감도 한양의 매끌거리는 신사와는 사뭇 달랐다. 양장을 하고 신학문을 배우던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천 리 길 시집온 후로는 그것이 다였다. 그리고 그 억센 동서도 뚝뚝 잘만 낳는 아들을 자신은 하나도 낳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시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것으로 인한 시집살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 쌓아가는 중압감에 자신의 위치를 걱정하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대웅전의 촛불이 창호지에 붉게 비추어진다. 큰아지매는 대웅전 정문을 지나 옆에 달린 작은 문으로 들어선다. 향내가 진하다. 하늘거리는 촛불을 보고서야 자신이 문을 열어둔 채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 * *
-야야, 내가 웃마을에 갔다가 늦었데이. 우짜고! 밥은 했나?- 치마가 바람을 낼 정도로 휘휘 저어가며 정기로 들어서는 작은아지매는 솥뚜껑부터 열어젖히며 변명처럼 호들갑을 떤다. -예, 인제 채리기만 하민 됩니더. 영감님은 잡샀다꼬 했고예. 광수아부지는예?- -아주버님이 들어오싰나?- 고개를 빼내 건넌방을 보는 시늉을 하지만 정기에서 보일 리가 없다. -운제 올지 우째 아노? 우리부터 묵자- 작은 소반을 소향이 방에 들이고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저녁을 먹는다.
-광수선생님. 내가 글씨 잘 썼제?- 소향이 밥을 한 입 물은 채 웃음기를 띄우고 묻는다. 광수도 밥에 정신이 팔려서 건성으로 답한다. -응- 작은아지매가 둘을 번갈아보고는 -소향이 너, 글 마이 배았나? 울매나?- 신기한 듯 부러운 듯 밥숟가락 밑에 한 손을 받쳐 들고 묻는다. -언지예! 인제 기역 니은 합니더. 케도 우리 선생님이 잘 갈차줘서 지도 잘 배웁니더- -잘됐다. 광수 니는 여서 매일같이 재수 델꼬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하고 또 소향이 글도 갈차주고 해라- 마치 짐 덩어리 하나 뚝딱 떼어놓은 것처럼 광수에미는 후련하다. 요 며칠간 계속해서 소향이 방에서 자고 오는 두 아들을 대수롭게 생각하는 참이다.
소향이 무심코 들은 광수에미의 말을 한참 후에나 생각한다. 아이구. 하필이면 보름날 저녁에… 무슨 말을 핑계로 대야하나?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갑자기 입맛이 싹 가셔버린다.
* * *
큰아지매는 두터운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한 채 수미단을 바라보지만 정신은 딴 곳에 있다. 중년을 지나가는 나이에 욕망도 희망도 없다. 그저 여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싶다. 종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싶다. 그리고 주위의 잡다한 잡음을 막고 집안을 곧게 세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경상도 사투리로 인물이 반감되는 영감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번듯하게 만들어야한다. 그런데 그 영감이… 오늘밤… 큰아지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상념을 떨쳐버린다.
수미단 주위에 촛대가 여러 개 있다. 향로가 좀전에 자기가 피워 꽂은 향을 외롭게 태우고 있다. 중앙에 자비롭게 미소를 띤 부처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자기를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큰아지매는 불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불자가 아니다. 그러나 왠지 부처를 응대하는 자신의 마음이 한결 위로 받는 것을 느낀다. 향처럼 자신의 번민을 태워버릴 것이다. 부처의 미소처럼 여유롭게 지금 자기가 이 절에 와있는 이유를 관대할 것이다. 그것이 보다 큰 자신을 만들 것이고 보다 큰 목소리로 종가의 안방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단청에 섞여있는 붉고 푸른색들이 초야를 치르던 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의 색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초야를… 영감이 또 한 번 치르는 구나… 자신이 치뤘던… 그 집에서…. 시부모가 살아있던 때는 지금처럼 안방에 시어머니 그리고 건넌방에 시아버지가 있었고 시동생은 아래채의 또 다른 방을 사용했었다. 그것이 시부모가 타계한 후에는 자신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측에 아미타불이 우측에 약사여래가 있다. 그 또한 보살로부터 들은 것이다. 손에는 그 보살이 쥐어준 염주가 있다. 밤톨만한 큰 것이라 몇 번 돌리지 않아도 한 바퀴는 돈다. 정신을 가다듬어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정기를 받고 부처님께 정성을 보태자고 다짐한다.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한다. 그러나 눈을 감자 곧 인불 같은 환영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바람에 도로 눈을 뜨고 만다.
* * *
소향은 호롱불을 올려놓은 소반을 밀쳐내고 광수에게 말한다. -광수야. 오늘은 재수하고 집에 가서 자거래이. 내가 아파서 그칸다. 머리도 아프고 몸도 어실거리고. 우째 몸살 같다. 너거 내기 감기 옮으민 안돼서 하는 소리다-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있던 광수는 배를 깔고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소향을 보고는 -알았다- 하고는 벌떡 일어서 나갔다.
광수도 재수도 우르르 빠져나가고 난 후 방안이 훨씬 더 커진 것처럼 보인다. 그 큰방 안에 소향이 저고리 앞섶을 양손으로 꼭 잡은 채 호롱불을 쳐다보며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하고 생각한다. 물 한 그릇 떠오라고 했던 영감님의 말이 생각난다.
머리를 손으로 움켜 뒤로 넘기고 고무줄로 꼭지를 만들어 묶었다. 눈가에 얼른거리던 머리가 없어지고 나니 한결 개운해진다. 문을 열고 밤하늘을 본다. 달이 처량하게도 밝다. 저 달을 우리 엄마도 보고 있을까? 삼천포 앞바다가 훤하겠지 하고 그려본다. 건넌방 안에서 기침소리가 들린다. 헛기침이다. 그래! 물그릇을 들여야겠다. 소향은 큰 숨을 두어 번 뿜어낸다. 요즘도 물이 한가득 한 옹기 물동이를 들어올리기 전에는 늘 하는 버릇이다.
* * *
큰아지매는 배운 대로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바닥에 대고 넙죽 엎드린 후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한 후 머리를 조아린다. 벌써 수십 번을 반복하고 있다. 허리가 뻐근해 오기도 하지만 제법 상념이 없어지는 것을 신기하게 느끼고 있다. 몸에는 제법 열기도 돋는다. 한겨울이 아니라서 입은 옷은 그저 세 홑겹의 옷이 다이지만 이제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문득 향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향로를 보니 한참 전에 꽂아두었던 손바닥 길이만한 향이 벌써 재가 되어버렸다. 다시 향로 앞으로 가서 이번에는 두 개의 향을 촛불에 댕겨 꽂았다. 뒷걸음친 후 부처의 자비로운 얼굴을 크게 한 번 보고는 합장을 올린 후 다시 배를 올리기 시작한다. 바람 한 점도 없는 보름밤이다. 대웅전 우측 한 편에 혼제를 올리는 몇 개의 지방이 과일접시 위에 걸려있다. 망자를 위로하고자 하는 의식이렷다. 한쪽에는 간 자를 그리고 또 한쪽에는 오는 자를, 나는 지금 아직 오지도 않은 자식을 정성으로 환영하고 있다.
꽃무늬와 비천으로 장식된 불단 위에서 지금 큰아지매는 활개 치며 수십 번의, 아니 지금쯤 아마 수백 번의 배를 올리고 있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도 보인다. 극락조도 보인다. 저기 저 여의주를 입에 물고 아들이 태어나게 해주소서. 자자손손 집안에 극락조가 날아서 행과 운이 머물게 해주소서. 큰아지매의 손에는 이미 땀이 흥건하다.
피곤할지언정 지금 자리에 든다 한들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정성을 하기로 한 이상 까짓 하룻밤 날밤인들 못 새랴. 손에 든 작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후 촛불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까딱도 하지 않은 채 타고 있는 부처 주위의 초들이 연약해 보이지만 또 한편 한없이 숭고해 보이기도 한다. 집에서도 늘 보던 초였는데 부처 앞이라서 그런지 달리 보인다. 다시 배를 올린다. 무릎이 시큰거린다. 허리도 조여오고 다리도 후들거린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육신의 힘을 써본 기억이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아지매는 시각을 놓쳤다. 그러나 알아야 되는 이유 또한 뚜렷이 없다. 그저 습관적일 뿐. 호흡이 조용해진 걸 느끼고 나서 자신의 체력이 더 이상 배를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손안에 쥐여진 염주가 미끌거릴 정도로 땀이 많이 났다. 무릎 밑에 있던 방석이 저만치 밀려가있다. 그래서 무릎이 아팠던 것이구나.
* * *
소향은 조용히 옷을 주섬주섬 챙겨서 소리 나지 않게 일어서서 문을 열고 방을 나선다. 태섭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소향은 태섭이 잠이 깊게 들 때까지 또렷한 의식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방에서 잠을 잘 수 없을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일어나 나올만한 용기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색한 방안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달빛이 훤하다. 겨우 속옷만 걸치고 나머지는 손에 든 채 후다닥 마당을 가로질러 방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선 후 크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시 옷을 습관처럼 입는다.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또 크게 숨을 내쉰 후 자신을 둘러본다. 달라진 게 없다. 한밤중에 소향이 방안에서 저고리섶을 당겨서 가지런히 맞추고 치마도 이리저리 돌려서 정리한다. 별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다시 생각한다. 앉은 채로 방문을 열어서 밝은 달빛을 본다. 냉랭한 빛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 * *
조용히 대웅전 옆문으로 나온 큰아지매는 문을 닫고 다시 합장과 함께 반배를 한 후 돌아서서 경내를 휘 둘러본다. 낮에도 본 이제는 눈에 익은 풍경이지만 달빛에 비춰진 사찰은 그 밝음과 어두움에 의해 이루어진 요철 탓에 한결 입체적이다.
시원한 밤공기가 정신을 나게 한다. 소리 나지 않게 발걸음을 옮기며 무엇인지 모를 경지에까지 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백배인지 천 배인지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 수많은 배를 올리는 동안 오늘이 보름밤이란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나 땅위에서 자기를 따라오는 그림자를 보고서야 오늘이 그 보름날 밤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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