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댁에 머슴을 살아볼까 해서 왔습니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64화

김담 | 기사입력 2014/09/24 [17:24]

“이댁에 머슴을 살아볼까 해서 왔습니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64화

김담 | 입력 : 2014/09/24 [17:24]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섣달은 이월보다 더 황량한 풍경을 내놓는다. 시간차에 의한 조명의 대조일까? 녹색의 향연을 거쳐 원숙하고 정점에 이르는 가을의 찬연함이 그다지 멀지 않은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동안 조여 오는 추위와 삭풍에 살갗 어느 부분도 드러내지 않고 초가삼간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이월보다는 섣달이 상대적으로 더 허탈할 만큼 비어있는 공간인 것이다.

 

미군사지바지를 넥타이끈으로 허리에 묶은 장씨는 검은 가죽 군화를 흙먼지 속에 풀썩 거리며 태봉으로 가고 있다. 양놈들은 키만 큰줄 알았더니만 다리도 얼마나 굵은지 입은 바지통이 합바지라 우리 같은 놈 다리가 서너 개는 들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속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찬바람이 들락거린다. 사리마다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속살은 섣달 찬바람에 사포같이 거칠어진다. 사실 지쳐가는 자신이 눈앞에 펼쳐지는 텅 빈 들녘같이 느껴지는 장씨는 어디쯤인가에서 쉬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아직은 당기고 있는 줄을 늦추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래! 그저 그놈 시집가는 것만 보면… 까짓 나야… 무슨 상관이랴.

 

오후 햇살이 비추기는 해도 그다지 힘이 없다. 그리고 넓은 태봉뜰 하늘에서조차 벌써 나지막이 걸려있다. 눈에 익은 샘과 그리고 정각을 지나 솟을대문 앞에 장씨는 종가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옆에 있는 비스듬히 담 너머로 보이는 별채를 바라보며 인연도 없는 줄 알았던 이 마을에 벌써 몇 번째 발걸음을 하고 있나? 하면서 사람 사는 길은 다음 구비가 어디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여겨진다.

 

코끝에 미치는 구수하고 구미 당기는 냄새에 정신이 난 장씨는 대문에 발을 들이기 전에 안에서 들리는 시끌한 소리와 돌계단 위에 한 무더기 놓인 고무신들에 눈이 닿았다.

하필이면 오는 날이 장날인가? 주인하고 조용히 나눌 얘기일 텐데 손님들이 이렇게 많은 것으로 봐서 필시 집안에 무슨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제법 먼 길을 다시 오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발걸음을 마당으로 들이고 -계시요?- 하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알리는 정도로 입을 뗀다.

 

열려있는 정기문안에서 얼굴이 빼꼼히 나오더니 다시 육중한 허리를 두 손으로 받쳐든 낯익은 얼굴이 어기적거리며 나온다. 담 옆 별채에 사는 그 아지매다.

-아이구 누구신가 했네-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어 그저 아는 체로 인사만 건넨 광수에미는 시끌거리는 건넌방 문에 대고 큰소리로 말한다.

-광수아부지예. 손님 오싰심더- 하고 돌계단을 두어 개 내려오며 장씨를 보고 -올라 오이소. 마침 집안사람들이 오시서 탁주 한 배기 하고 있는 중입니더-

문이 열리고 얼굴만 내밀었던 태광이 장씨를 알아보고 일어서서 나오며 -기별 들었싯구만… 올라 오이소. 마침 행님도 계시고. 잘됐심더-

여전히 뒤에 열려있는 문안으로 한 무더기 사람들이 보인다.

-제가 온다고 오는 날이 집안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인가 봅니다?-

계단 밑에 선 채로 장씨가 인사 겸 좀 난처한 입장을 섞은 말로 화답하자 태광이 손을 내저으며

-행사는 무신 행사요. 그저 집안사람들하고 농사도 끝나고 해서리. 술 한 잔 나누고 있는 중입니더. 행님! 장씨 오싰네예-

 

사실 태광이 깍듯이 장씨를 대하는 것은 첨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일하는 일꾼 정도로 여겼지만 별채를 수리할 때, 샘일을 할 때나 정각을 지을 때 특히 샘의 석축이 무너져 주섭이가 산 채로 매장될 뻔한 그 순간에 장씨가 보여주었던 그 통솔과 대응에 태광은 장씨가 여느 일꾼하고는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나? 들어오시라 해. 마침 잘 오싰네-

그저 방안에서 태섭의 목소리만 태광과 장씨에게 들린다.

이왕지사 여기까지 왔는데 가릴 것이 뭐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댓돌에 군화를 올려놓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갓을 머리에 올려놓은 제법 머리가 허연 노인 두어 명이 태섭의 양쪽에 자지를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방 주위를 빙 에워싼 채 둘러앉아있지만 어느 누구도 장씨에게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태광이 장씨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며 문간에 있는 젊은 사람을 발로 툭 차며

-좀 밀치거라-

태광이 덕에 겨우 자리를 잡은 장씨는 눈치 채지 않게 주위사람들을 둘러본다. 제법 낯익은 사람들로 봐서 젊은이들은 샘터에서 봄직한 사람들이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본 적이 없다.

-태광아. 장씨한테 한 잔 디리라. 아 저 사람은 요 얼마 전에 우리 별채도 손보고 또 제각도 수리했고 샘도 새로 쌓은 사람입니더-

태섭이 좌중에게 장씨를 소개하는 말을 함과 동시에 장씨도 그저 고개를 숙여 말없이 인사를 한다.

그리고 이어 광수에미는 손에 대소반을 들고 들어와서 전거리를 상위에 쏟아붓고 하나를 집에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술은 있습니꺼?- 하고 주전자를 들어 가늠한다.

-사람이 몇인데? 그 술가지고 되나? 좀 더 들라라!-

태광이 가볍게 핀잔한다.

 

주위는 다시 장씨의 등장도 잊은 채 이런저런 얘기로 돌아섰다. 태섭의 잔으로 목을 축인 장씨는 주위의 주고받는 말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지만 또 마땅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이유도 없는지라 기회를 엿보며 태섭과 눈을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어디서 온 젊은인가?-

그중 제법 나이든 노인이 아까부터 궁금한 눈빛으로 장씨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그 말을 받은 장씨는 좌중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림을 느낀다.

-예. 저는 이댁에서 머슴을 살아볼까 해서 왔습니다-

주저함 없이 입에서 머슴 살라왔다고 술술 내뱉은 장씨의 말에 사람들은 조금은 놀란다. 아직은 체면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이라 배에서 꼴꼴거리는 소리가 나도 배부르다 하고 어금니가 뭉개질 정도로 추위를 참아도 춥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여기 웬 사람이 스스로 나는 머슴이 되려고 왔소! 하는 말에 당돌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다.

 

노인은 태섭을 돌아보며

-농사지본 사람 같지 않는데… 하긴 농사는 다 소작꾼들이 하니.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할 건 없제- 하고 다리를 꼬아대며 장죽을 입에 댄다. 얼마 안 되는 집안일에 큰 일꾼 쓸 필요 없다는 말이 곧 농사꾼 같지 않는 장씨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태광으로부터 술을 한잔 더 받은 장씨가 쭉 들이키고는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저의 작은 머리로는 하석상대(下石上臺) 정도는 할 줄 안답니다. 곱게 봐주십시오-

시물거리는 경상도 사투리 대신 똑 부러지는 서울 말씨에다가 마치 노인의 그 어려운 말을 알아듣고 하는 대답처럼 글귀를 섞어서 대답을 하며 노인에게 적당히 고개를 숙이는 장씨에게 주위는 또 한 번 은근히 놀란다.

 

태섭은 얼굴에 웃음 띠우고는 자기보다 한참은 나이가 많을 그 노인을 보고

-아제, 저 양반이 보통사람이 아입니더, 케서 내가 우리 집에 와주십사 부탁해서 온깁니더- 하고 간단히 분위기를 녹여준다.

아제라고 부르는 것으로 봐서 항렬이 그런 모양이다.

-태광아. 니가 여 있거래이. 그럼 내는 장씨하고 얘기 좀 하구로- 하고 일어서서 나오고 장씨도 목례로 주위에게 인사를 한 후 태섭을 따라 방을 나온다.

-날이 마이 추버졌소. 인제- 하고 안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장씨의 눈에 오랜만에 보는 방다운 방이다. 여인네의 냄새가 배어있다. 농이며 문갑이며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역시 대갓집 안방답다. 그런데 이 방의 주인은 어디에 있길래 빈방인가? 잠시 기억을 되살려 보는 장씨는 한복을 가지런히 차려입은 그 중년의 여인이 기억난다. 별채에서 일할 때 몇 번 보았던 기억이 나지만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앉으소. 불을 때놔서 따시구만- 하고는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문질러보며 태광도 눈을 이리저리 휘둘러댄다. 그도 역시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안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 안 그래도 지목수한테 좀 보자고 전했디만 오늘 오싯구만. 이렇게 오싯으이. 오늘 말 끝내고 좋은 방향으로 정합시다-

태섭은 작정하고 말해보자는 태도다.

-예, 그러지요-

짧게 답하는 장씨의 얼굴을 보며 태섭은 속으로 생각한다. 아까 아제가 한 말 정도를 알아듣고 대구를 할 정도라면 필시 배워도 한참은 배운 사람이고 또 그동안의 이렇게 저렇게 보여준 면모로 봐서도 삽자루나 손에 쥐고 땅과 씨름하는 무식꾼은 필시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머슴을 하겠다고 왔다?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 지난번에 우리가 주점에서 만났을 때 남은 말은 새경이었는데… 울매나 생각하고 있소?-

사실 장씨가 사경을 받아본 적도 없고 머슴을 살아본 적도 없다. 떠돌이 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참에 어디 한 방에서 잠자고 한 부엌에서 먹을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덥석 해본 말이 장씨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실은 제가 머슴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전에 이집에서 머슴에게 주던 사경이 얼마나 되었는지 먼저 말씀해보시지요. 그러면 그것이 저에게 합당한지 저로서는 쉽게 계산이 될 수 있습니다-

태섭은 장씨의 말에 이해가 간다. 한 번도 머슴살이를 해보지 않았다니 사경이 얼마나 되는지 시세를 알 리가 없겠지.

-요새… 이 근처에는- 하고 버릇처럼 누군가와 밀고 당기는 셈놀이를 할 때면 나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아! 상머슴이몬 네 섬 주고 중머슴쯤이몬 그저 두 섬 반인데. 우리 집이야 다 소작들이 농사를 지니 그저 집안일 돌보는 정도라서리. 한 석 섬이면 우떻소?- 하고 장씨를 쳐다본다.

창호지 밖으로는 여전히 웃음소리며 잡다한 말이 함께 들리고 드나드는 발자국소리도 들린다. 장씨는 궁금하다.

-지금 말씀하시는 섬이라는 것이 나락입니까? 아니면 쌀입니까?-

태섭은 놀란 듯이 다리를 바꿔 꼬며

-그기사 당연이 나락이지! 아! 쌀로 그맨치 준다민사 아! 머슴 안 살 사람이 오데 있노?-

말꼬리가 금방 하대로 바뀐다.

 

장씨는 생각해본다. 겨울이면 봉명광산에서 막장 탄가루를 마셔대고 고작 받는 것이 쌀도 아닌 싸래기 간주이고 그마저도 겨우 한 말쯤이고 또 그마저도 제때에 잘 나오지도 않는 것이렷다? 아니면 지목수와 함께 여기저기 일을 하려 다니더라도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일 못해서 돈 쓰고 일 마치고 난 후에도 받을 돈을 제때에 받지 못하면 또 공치며 기다리느라 돈 쓰는 게 일쑤이다? 서울에 한두 달에 한 번씩 그저 천 환 정도만 줄 수 있다면. 그러면 일 년이면 적게 잡아 오천 환이고 많이 잡아 만 환이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쌀값이 조석이 다르게 변한다 해도 요즘 쌀값이 한 말에 이백 환인가? 아! 올해 화폐개혁이 되었지… 그리고 올해 미곡값이 폭락이라 했겠다. 그럼 백오십 환? 나락 석 섬이면 쌀로 세 가마이고 다시 한 말 값을 곱해보면… 일 년 사경이 지전으로 사천오백 환 정도라… 장씨는 조금 모자라는 느낌이다.

 

-화폐개혁 후에 그리고 미곡값이 폭락을 하니 사경이 돈으로 따져보면 좀 낮은 듯합니다. 욕심을 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지만 제가 지고 있는 짐을 벗자면 상머슴 사경은 받아야 되겠습니다. 대신 상머슴만큼의 일은 해드리겠습니다-

다부진 목소리로 줄 것과 받을 것을 정리해서 내놓았다.

장씨의 생각에 그 정도만 받는다면 떠돌면서 호구지책을 찾는 것보다는 심신이 덜 피곤할 것이라 느낀다.

태섭은 속으로 많이도 요구한다고 느끼지만 장씨의 쓰임새가 여러 모로 있을법한 느낌 또한 든다.

 

-하지만… 그건 좀 많다… 물론 곡가가 하루가 다르게 밴한다 케도 그래도 쌀은 쌀인데- 하고는 말을 끊고 장씨의 얼굴을 보며 반응을 살피지만 장씨는 아무 말이 없다. 그 뜻은 주장을 물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말없이 서로 기다리는 싸움에서 태섭이 지고 말았다.

-카모 내 그리 하지, 대신 그저 내 집이다 싶은 마음으로 집안일을 돌보고 다 내 식구다 하는 마음으로 여기주소-

큰 선심 쓴 듯 담배 하나를 빼내어 입에 댄 후 불을 붙이고 재떨이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소향아! 재수씨!- 연달아 불러댄다.

연이어 문밖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린다.

-예-

소리의 크기나 모양이 아까 전에 본 그 아지매가 아니다.

-응, 재떨이 좀 가오고. 여 작은 술상 하나 들이거라-

태섭은 문득 마누라가 한 말이 생각난다. 안방에서는 담배 좀 피우지 말라던. 그래도 아직 마누라가 돌아오려면 보름이나 남았으니. 무슨 상관이랴 싶은 마음으로 마음 놓고 피운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한두 달에 한 번씩 서울을 다녀와야 합니다. 그저 하루나 이틀 정도 말미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말아주시고-

미리 알려고 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장씨는 사경만큼이나 중요한 조건을 더 제시한다.

조건이 달린 것에 어느 주인도 반가워할 리는 없지만 태섭은 대수롭게 생각한다. 아마도 식구가 딸린 모양이겠거니 하고

-그카지 뭐. 그기사 에루번 일은 아일끼고. 미리 날 잡아서 말해주민 되고. 카몬, 우리 인제 말 끝났는가?-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정리가 된 느낌이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만?- 하면서 장씨는 태섭의 의향도 묻는다.

-됐소. 카몬… 음-

하고 태섭은 속으로 이 자를 언제 들어오라 하나? 하고 생각한다. 당장 아궁이마다 불 때는 것부터 하다못해 조석으로 넓은 마당을 쓸어대는 것까지 당장이라도 품이 하나 더 있어야 하지만 선뜻 입으로 내일 오라는 말을 하기가 싫다. 마누라조차도 소향과 자신에게 중차대한 후손 만들기의 대업을 위해 자리를 남겨놓았는데 갑자기 객꾼이 끼어들어서 방해받는 것이 싫다. 아직 섣달 보름이 한 열흘은 넘게 남았겠다?

 

-마누라가 지금 절에서 공을 들이고 있니라 내도 들락거리니 장씨는 이달 보름이나 그 다음 날쯤 오민 되겠네. 그리 되겠소?-

장씨는 걸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오직 서울 출입하는 것만 빼놓고는 그저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산 지가 벌써 해방 전부터 아닌가?

-아! 저는 그리 해도 무방합니다. 그럼-

마치 모든 사무가 끝나서 가려는 듯 일어서려는데 비로소 아까 태섭이 이른 술상이 들어온다.

-오데~ 앉으소. 기왕에 상이 들었는데 한잔 하고 가야지-

태섭은 가급적 우위를 미리부터 인식시켜 놓으려는 듯 여기저기서 말을 놓기도 한다.

 

분명히 그 처자다. 샘일을 할 때 두어 번 본 그 처자인데 장씨의 눈에는 딸이라고 하기엔 뭔가 둘의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또한 새사람이 집에 들어올 것이면 당연 인사라도 나누게 할 것인데 태섭이 아무 말도 없이 처자를 내보내는 것이나 처자 역시 눈을 내리깐 채 상만 달랑 앞에 놓고 나가버리는 것이 어색하게 보이기도 한다.

 

태섭이 먼저 주전자를 들어 한손으로 태섭이 앞에 놓인 잔에 붓지만 장씨는 잔을 쳐다만 볼뿐 손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잔이 차자 장씨가 주전자를 받아든 후 두 손으로 태섭의 잔에 채우지만 이번에는 태섭도 잔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그저 기다린다. 장씨는 장씨대로 두 손으로 술을 따른 것으로 예공을 보이고 태섭은 태섭이대로 잔에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응대한 것이다.

 

둘이는 동시에 술을 마신 후 태섭이 안주를 집어 씹으면서 먼저 말을 한다.

-아래채에 있는 방이 장씨가 쓸 방이라오. 동생이 별채로 살림나기 전까지 쓰던 방이라 괜찮을 건데 그래도 이따 한번 보고나 가야지. 불은 잘 들거고. 아! 안 들면 당신이 고치민 되지. 안글소?-

술상이 앞에 놓여있지만 둘의 말은 그저 할 것이 없다. 장씨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태섭은 도대체 이 자가 누군지 더 알고 싶지만 아까 들은 말이 기억난다. 알려고는 하지 말아달라던. 그러니 물을 수도 없겠다. 그래서 엉뚱한 말로 떼어 붙인다.

 

-오데? 안동이 본관인가?-

인근에는 허다한 안동장씨가 널려있는지라 그렇게 물었다. 장씨는 과묵하게 입안에 든 안주를 천천히 다 삼키고 난 후에 태섭의 눈을 똑바로 보며

-안동이 아니라 인동입니다. 고려시대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의 후손입니다. 인동지역이 옥산으로 불리기도 해서 혹자는 옥산을 본관으로 부르기도 하지요-

태섭은 기가 차다. 머슴 살 놈의 입이 조상들 족보까지 꿰차고 있다니 머슴은커녕 동네에서 배웠다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학식이 있겠다 싶다.

-아! 글쿠만. 암튼 장씨가 내 대신 집안을 좀 잘 돌봐야 돼. 내는 바깥일로 앵간히 바빠야지 - 하고는 또 한 잔을 들이키는 태섭의 얼굴이 온통 홍당무처럼 붉다. 원래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태섭이다.

 

날이 다 저물었는지 방안이 어두워졌다. 장씨는 일어선다. 그리고 말을 한다.

-그럼 음력으로 보름 다음날 오겠습니다-

고개를 정중히 굽혀 인사를 남기고 어두워진 밖으로 나온다.

술에 달구어진 얼굴이 섣달 저녁 공기에 싸하게 느껴진다. 헛기침을 하고는 마루에 앉아 군화 끈을 조여 매는데 정기에서 육중한 허리를 오리걸음으로 흔들며 그 아지매가 나온다.

-와예? 가실라고예? 저녁 막 들일라꼬 하는데?-

-아닙니다. 마신 술이 저녁값을 합니다. 안주도 넉넉히 먹었고. 고맙습니다-

 

장씨는 허리를 적당히 숙여 인사를 건넨 후 돌계단을 내려와 대문으로 나서는데 뒤에 있는 광수에미가 넋을 놓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장씨를 보고 있다.

우짜민… 저리 넘넘할까? 두부모판처럼 모든 게 반듯한 장씨의 말과 행동이 그저 두루뭉실하게만 살아온 광수에미에게는 신랑과 비교가 안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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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 2014/09/24 [23:04] 수정 | 삭제
  • 소향전을 읽다보니 어느새 사투리가 익숙해졌다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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