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게재됩니다.
한 싱글맘이 글쓰기 시간에 한 말이 떠오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만 없는 게 아니에요. 뜯어먹을 게 없으니 관계에서도 자꾸 소외돼요. 세상에는 나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애벌레로 태어나 벌레로 살다 죽게 되지요. 저는 목소리를 내고 다르게 살고 싶어서 글쓰기를 배우게 된 거예요.”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뜯어먹을 게 없어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멀리하지만, ‘가난’의 지표는 그러한 소외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소득이 없는 것이 가난한 것이고, 가난을 극복하려면 소득을 늘리면 되는 것, 직업 교육을 하면 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가난이 배제하는 것은 더욱 광범위하고 은밀하게 퍼져 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시선에서, ‘넌 돈이 없잖아’ 하는 지나치는 말에서, 기다리게 되는 시간에서, 오지 않는 답장에서 가난은 만들어진다.
일하면 된다고 하지만 일을 할 수 없게 하는 요인들-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가사노동의 전담자이며, 딸로서 물려받은 자원이 없고, 아내로서 부당한 처우를 감내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침묵에서 가난은 증식한다. 가난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다. 구조적 문제라는 것은 더 많은 여성들이 가난해지며, 가난한 여성으로 만들어지도록 이 사회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왜 여성들은 빈곤에 취약한가
“여성들은 남성 생계부양자 규범에 의해서 빈곤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한 여성들의 대부분은 ‘가장’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다. 남성은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은 보살핌을 책임지는 성별 분업 규범은 중산층 중심의 가족 규범일 뿐이다. 저소득층의 여성들은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정상적인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편의 폭력을 견디고 있었다.
남성 생계 부양자 규범 때문에 여성들은 빈곤에 취약하게 되고 이들의 이야기는 가시화되지 않았다. 성 역할 규범과 모성 규범, 정상가족 규범 등 가족을 중심으로 작동되는 규범들은 빈곤의 여성화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실질적인 차별 기제이다.
여성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생애 과정에서 작동되는 차별의 누적 결과라 할 수 있다. 가족 해체라고 하는 사건은 이러한 누적된 차별의 결과가 가시화되는 계기일 뿐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가난은 단지 소득 결핍이라는 물적 차원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다. 성 차별적인 노동시장 구조와 가부장적인 가족 규범은 다차원적인 배제와 차별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경제적 지원을 넘어선 통합적인 접근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일자리만 제공된다면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가정은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빈곤 신화로 작동되고 있다. 하지만 여성에게 빈곤은 물적 결핍의 결과만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남성과 관계 맺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 정재원 <숨겨진 빈곤>(푸른사상, 2010) 7p
가난이 만들어지는 과정
미혼모를 취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미혼모가 철없거나 불운한 엄마, 그러니까 훈계를 하거나 동정을 하거나 거리를 둘 사람들로 여기는 편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 곁에 있는 노동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엄마다운’ 보살핌과 양육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압박을 미혼모들도 느끼지만, 사회적 지원이 미비하고, 오히려 차별의 기제가 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노동권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과 ‘좋은 생계부양자’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 배제 속에서 빈곤은 재생산된다. 이 책에 나오듯, 가난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자녀양육의 책임을 나눌 길 없게 되며, 지속되는 노동으로 건강을 잃게 될 위험이 크고, 노동시장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이 흔들리게 된다. 가난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성들은 그것에 저항하고 선택을 해나간다.
“사회적 배제의 다차원성은 바로 가부장적인 가족과 성 차별적 노동시장을 지탱하고 있는 남성 생계 부양자 규범, 모성 규범, 정상가족 규범, 성 역할 규범, 성 규범에 의해 유지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강고한 형태로 유지된다.” – 233p
“여성 가구주가 경험하는 빈곤이 다차원적인 사회적 배제의 악순환 결과라는 사실은 여성 가구주의 탈빈곤 전략이 경제적 지원을 넘어선 통합적인 접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일자리만 제공해준다면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빈곤 신화는 물질적 지원 이외에 보육, 교육, 의료, 심리 정서적인 지원 등 비물질적 지원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여성의 빈곤 과정이란 자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과정이며, 여성들의 노동과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젠더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여성에게 빈곤 과정은 ‘아내’, ‘어머니’, ‘딸’이라는 사적 영역 내의 역할에 의해 발전되고 구성되어 온 자신의 정체성과 ‘가장’, ‘노동자’, ‘시민’이라는 정체성과 갈등하고 협상하는 정체성의 변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여성의 빈곤 과정은 모성과 경제적 독립에 관한 사회적 관념과 규범이 작동되는 과정이며, 노동과 모성에 대한 의사결정과 태도가 드러나는 과정이며, 취업경험과 직업 정체성 그리고 가족 정체성이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이다.” – 246, 247p
여성의 목소리로 가난의 이야기를 듣자
돈을 버는 일과 아이를 돌보는 일이 다른 일이고 다른 세상에서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통념, 이제는 실체도 없는 정상 가족이 제일 떳떳한 가족이라고 가정하는 독단은 여성 가구주의 가난을 실제로 만들어낸다. 중립적인 듯 보이는 규범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가난한 여성을 비가시적 존재로 추방한다. 여성들은 적응하고 선택하고 해석하고 저항한다. 계급과 노동과 가족. 그녀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이고 자신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이해하고 행동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무기력과 우울과 분노는 개인이 극복할 심리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놓여 있는 위치 때문에 생겨난다. 위치는 권력의 문제이며 ‘권력의 작동방식은 배제의 메커니즘’이다. ‘불평등의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고 여성의 권력을 제약하는 성별화된 권력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여성의 목소리로 가난의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다. 그 시간을 그녀/우리가 어떻게 겪었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아냈는지 경청하자는 것이다.
빈곤을 만들어내는 체제는 우리가 꿈꾸는 안락한 삶이라는 환상 또한 만들어낸다. 그 환상의 이면 속에서 여성이 처한 위치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여성들이 얼마나 견뎌내며 그 이상으로 살아내는지, 얼마나 꿋꿋하게 그리고 위태롭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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