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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조의 마음이 장서방의 뇌리에 서리자 관자놀이에 핏발이 설듯 화가 치밀어 오른다. 높은 자들은 떨어지기가 무서울 테고 많이 가진 자들은 두지 밑바닥 긁는 빈 바가지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테니까 그저 사람들은 자기 손톱 밑의 가시 박힌 것이 남들 오장육부 헤집어내는 고통보다 더 클 것 아니겠는가?
앞에 놓여있는 탁배기 속의 술이 무슨 맛인 줄도 모르고 연거푸 마시고 있는 장서방을 태섭이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도저히 합석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느낀다. 손도 발도 쓰지 못하고 그저 나약하게만 비춰지는 자신이 장서방의 눈 속에 비춰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네. 더 할란가? 내는… 이만 갈라네. 천천히 오게나. 뭐… 바쁜 것도 엄꼬하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태섭이 일어나 돈을 치르고 문을 열고 나서지만 장서방은 한 마디의 말도 않고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았다.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혼자 계속 마셔댄다.
어렴풋이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의식을 차리는 장서방은 등짝에 전해오는 냉기가 비로소 느껴진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래도 자기가 기거하는 방에 누워있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어젯밤 기억이 없다. 덜컥 문이 열리고 고개를 들이민 태광이 문지방에 손을 대고 엎드려서 큰소리로 말한다. -와 대답도 없소? 일나소 고만! 해가 중천인데- 섣달해가 중천이라니? 장서방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머리가 쇠몽둥이로 맞은 듯 띵하고 어지러워 도로 푹 고꾸라진다. -어제 술 했소? 정기에 밥 있으이 잡수소. 카고… 이따가 내캉 얘기 좀 합시다- 하고는 문을 도로 닫고 가버린다.
밥이고 뭐고 도통 정신이 없다. 엎드린 채 방바닥에 닿은 손의 촉감으로 구들이 싸늘한 것으로 봐서 일어나긴 일어나야 한다. 머슴 아닌가?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난 장씨가 마당으로 나선다. 정말로 해가 중천에 걸려있는 것으로 봐서 아침이 아니라 짧은 겨울에 벌써 점심때는 됨직하다. 갈증이나 우선 채우고 볼 심산으로 정기에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나니 비로소 눈에 사물이 제대로 보인다. 정기바닥에 소반이 놓여있다. 광수에미가 차려놓은 것이렷다. 하지만 없는 입맛 탓에 손도 대지 않고 불이나 지필 생각으로 마당으로 나서는데 광수에미가 마당으로 들어온다.
-장씨 아저씨예, 우짠 일로 불이 안 듭니더. 안방 아궁이에. 카고… 물 좀 길러다 노이소. 소향이도 엄꼬- 하고는 마루로 올라서서 광문을 열고 속으로 들어간다. 무얼 챙기려는 것이려니. 아주 쇳대를 손에 쥐고 있으니 안방주인 없는 핑계로 맘대로 열고 닫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깟 종가의 일이니 무슨 상관이랴 하며 주섬주섬 나무를 한 아름 안고 우선 태섭이 방부터 불을 지핀다.
우선 태섭이 방에 불을 넣어놓고 다음에 아래채에 또 불을 지피는데 광수에미가 무슨 보자기에 싼 것을 들고 장씨를 힐끔거리며 마루에서 내려온다. 또 뭔가 챙겨서 나오는구나 하다가 그렇지! 어제 광수에미가 소향이를 보러 갔다고 했지! -광수어머니- 하고 부르자 종종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려던 광수에미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손에 든 보따리를 옆으로 감추며 -와예?- 하고 몸통은 돌리지도 않고 그저 고개만 모로 돌려서 답한다. 장서방이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가서 -소향이 보고 오셨다면서요?- -예. 안됐지예. 뭐… 우찌 될건지- 하고 한 발짝 대문 쪽으로 발을 옮기는 것으로 봐서 빨리 줄행랑을 놓고 싶은 심정인 모양이다. -예- 하고 장씨가 돌아서서 그냥 광수에미를 가게 버려둔다.
태광으로부터 들은 바가 다인 장서방은 소향이 사건이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물어볼 사람도 하나 없다. 이제 소향은 그저 홀로 내려지는 법의 심판을 받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인가? 아무것도 모른 채 삼천포에서 소향을 기다리는 소향이 어머니가 마음에 걸린다.
댓돌 위에 놓인 신발을 아까부터 보았다. 태섭이 건넌방에 있다는 말인데 아침저녁 두 번 때는 군불을 때지도 않아 방이 식었을 터인데도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방에만 들어앉아있다. 장서방이 문 앞으로 간다. -장서방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에 익숙해진 이집 식구들이다. 헛기침부터 해대는 태섭이 문을 열지도 않고 -방이 차네- 대답 대신 불을 넣으라는 말이다. -지금 불은 지펴놓았습니다. 음… 그리고 잠깐 상주에 다녀왔으면 합니다. 소향이 옷가지라도-
방안에서 아무 말이 없다. 태섭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괜스레 집안으로 사건이 전이되는 것을 애초부터 막자고 한 태광의 말에 동의한 후 사건으로부터 외면하자는 게 형제의 말이었다. -거기는 와 갈라고?- 하는 말과 함께 문이 열리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씨를 쳐다본다. 봉당에 서있는 장씨도 태섭을 응시한다. 장씨의 눈에 미운털이 크게 박힌 태섭이다. -미우나 고우나 한솥밥 먹던 아입니다. 대외적으로 종가에서는 못 간다 해도 인정상 같이 종살이하는 저는 가봐야 할 것 아닙니까?- 눈도 깜짝 않고 태섭에게 한 장서방의 말에 종살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종이 없어진 지 오래 됐지만 당신들이 하는 작태가 우리쯤은 종으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는 장서방의 질타다. 태섭도 그런 의미를 금방 눈치 챈다. -그 무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나무랄 듯 하는 말조지만 다음 말은 끊어지고 없다. 태섭의 속마음이 상주에 소향을 보러간다는 장서방을 나무랄 만큼 당당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까 제수씨가 하는 말이… 정기에 불이 안 든다던데? 그것도 우찌 손 좀 보지- 가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가라는 말도 아니게 어정쩡하게 엉뚱한 아궁이 말을 한다. 창호지 하나로 막혀있으니 마당의 말도 들릴 수밖에.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상주 다녀와서- 상주부터 갔다 오겠다는 장서방의 의견이 또렷하게 전해진다. 태섭은 문을 닫으며 -그러게나. 내도 맘은 안됐지만 우쨀 방법이 엄따- 하고 말꼬리를 흘려버린다. 그 길로 장서방은 상주서로 갔다.
아마도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경찰서임이 분명하다. 벽에 발려진 시멘트가 거미줄같이 갈라져 있고 기와로 이어놓은 관공서라는 건물이 왜놈들이 전형적으로 지은 것이 한 눈에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칸으로 가로 막혀있는 안쪽에 연탄난로가 타고 있고 그 주위에 검은 제복을 입고 허리띠에 가죽으로 두른 순경들이 여럿이 모여 있다가 들어선 장서방을 힐끗 보더니 무관심한 듯 도로 그들의 얘기로 돌아간다.
-저… 면회를 왔는데요- 순경 한 명을 보며 말하는 장씨는 영 장씨답지 않게 말이 어눌하다. 난롯가에 있던 순경 하나가 아예 장씨 쪽으로 올 생각도 없이 등을 돌려 난롯가에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며 서서 -누굴?- 하고 눈만 장씨를 본다. -예. 김소향이라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인간들 앞에서는 그저 굽실거려주면 일이 쉬워진다는 것을 장씨는 안다. 소향이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그 순경이 가슴 높이의 가로막 앞으로 오더니 -도민증 주소- 하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슨 장부를 펼친다. -저… 옷 갈아입고 오니라 안 가져왔는데요- 쭈뼛거리며 말하는 장씨를 순경이 눈만 올려 뜨고 다시 말한다. -요새 도민증도 없이 다녀요? 시대가 어떤 시댄데? 당신 누구요?- 세상이 한참 어수선한 마당이다. 여전히 빨치산 잔당이 피해를 입히고 서울에서는 연일 데모가 일어난다. 올해 초에 조봉암이 간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간첩들이 들끓는다고 불심검문이 어디엘가도 행하여지니 도민증 없이 검문을 당하면 꼼짝없이 잡혀가기 일쑤였다. -예. 지는 그 집에 머슴입니다. 소향이 있던 집에- 머슴이라는 말 한 마디가 순경으로부터 더 이상의 질문을 막는다. -이쪽으로 따라 오소-
한쪽 옆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얼굴에 미치는 한기가 서늘하다. 순경들이 있는 곳은 그래도 난로의 온기가 맴돌지만 한 구비 돌아있는 유치장은 달랐다. 남자들 두어 명이 웅크리고 앉아서 지나가는 장서방을 보고 그 바로 옆에 순경이 쇠창살에 열쇠를 넣고 돌리면서 말한다. -오늘 오후에 구치소로 이송됩니다- 하고 문을 열어준다. 오후에 구치소라면? 벌써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소향이 구석에 담요로 몸을 두른 채 앉아 있다가 쇠창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떠 장서방이 서있는 걸 보고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올려버린다. 소향이 자신도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이 지경까지 내몬 것에 후회스런 마음이 가득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일로 인하여 큰아지매와 한 약속이 다 물거품이 될 것이란 생각에 그리고 삼천포에 있는 엄마와 동생들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추위만큼 소향을 옭아매고 있다.
유치장 안으로 들어선 장씨는 무릎을 굽혀 소향이 옆에 쪼그려 앉아서 -춥구나, 안이. 괜찮나?- 하고 소향의 어깨 위를 손바닥으로 토닥거린다. 소향은 죽은 듯이 꼼짝도 않고 말도 없다. 멀쩡한 처녀가 이제 감옥 갈 입장이 되었으니 모든 게 그저 두려움으로 그녀를 에워싸고 있겠지 하고 장서방은 측은한 마음에 고개를 떨군다. -소향아. 자초지종을 한번 말해봐라.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더라- 그래도 소향은 여전히 담요만 뒤집어쓴 채 얼굴도 내놓지 않는다. -소향아!- 하면서 정서방이 소향의 어깨를 또 흔들어 보지만 아무 반응도 없이 몸을 더 웅크린다. 한참을 둘이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장서방이 일어서서 유치장을 나와 아까 그 순경에게 묻는다. - 저기… 담당하시는 나으리가 누구신지- 하고 양손을 앞에 모으고 묻는 꼴이 마치 영락없이 죄지은 사람 형상이다. -와 묻소?- -예. 무신 일인지 지대로 알질 못해서리. 소향이도 암말도 안 해주고 해서…. 나으리한테 물어나 볼라고요- 나으리라고 칭하는 사람이 아직은 남아있는 세상이다. 젊으나 늙으나 군수나 경찰서장, 또는 판사나 검사를 영감이라고 부른다. 나으리도 그 밑에 있는 관료들에게는 통하는 지칭이다. -형사 계장님이신데… 오데 계신가? 아까 전에 계싰는데?- 하며 고개를 휘둘러 찾아보다가 마침 들어오는 사복을 한 사람을 보고는 -아! 오시네. 계장님. 이 사람이 찾심니더- 하고 계장이라는 자에게 장서방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아예 장서방을 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이 난롯가로 가서는 그 순경에게 -누고?- 하고 묻는데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장서방은 저만치 서서 그 모양을 다 보고 있다.
-김소향이 면회 온 사람이랍니더- -면회 왔으몬 면회하고 갈끼지 내는 와?- 하더니 비로소 장씨를 보고 -우째 왔소?- 하고는 여전히 난로에 등을 댄 채 고개만 돌려 말한다. 장씨는 두어 발자국 다가가서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손을 또 앞에 모으고 -예, 소향이 자가 아무 말도 안 해줘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나 물어볼라고예- 계장이라는 자는 장서방을 향하는 게 아니고 아예 허공에 대고 말을 한다. -함창지서에서 넘어온 조서대로지 뭘 알끼 있다꼬? 상이용사한테 업신여기고 낫질까지 한 살인미수사건 아이요?- 소향이 상주서로 이첩될 때 함창지서에서 꾸민 조서까지 같이 넘어온 것이 틀림없다. -그럼 소향이 조서도 받았단 말입니까?- 장서방의 질문을 들은 형사계장은 의외라는 듯 장씨를 삐딱하게 보며 -가는 물어도 암말도 안하이. 피해자가 하는 말에 동의한다꼬 보는 수밖에! 쿤데, 당신은 누구요?-
정색을 하고 묻는 것이 소향이 조서라는 장서방의 말 때문이다. 관료들 앞에 있는 서면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치는 호통을 듣기만 하거나 아니면 죽는시늉을 하는 게 보통인데 이 자는 조서라는 말과 함께 받았느냐고 묻기까지 하니 입은 형색은 남루하지만 필시 뭘 좀 아는 자로 보인 것이다.
-예. 지는 그 집 머슴입니다. 소향이가 하도 불쌍해서리- 하고 또 굽실거린다. 그서야 계장이라는 자는 느긋하게 가슴을 펴며 -불쌍해도 우짤 도리가 엄째. 벌어진 일인데- 하고 옆에 있는 순경들과 잡담을 나눈다. 귀찮은 일이니 빨리 조서를 꾸며 법원으로 이송해 버려야 경찰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다 끝난다는 말이다. 소향이 불쌍한 만큼 태봉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짐승같이 느껴진다.
장서방은 다시 유치장 안으로 들어와서 어떻게든 소향의 입을 열게 해볼 마음으로 -내가 삼천포에 갔다 왔다- 하고 한 마디 던지자 소향이 담요를 홀딱 벗어버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달싹 거린다. -참말로예?- 그러나 말에는 힘이라곤 전혀 없다. 지치고 추위에 오그라든 목소리다. -그래. 부산에 들릴 일이 있었는데 삼천포가 바로 옆이라 네가 준 편지를 전해줄라고 들렸지. 국밥집 아지매도, 너 어머니도 다 만나고 왔다- 하고 장씨는 소향의 눈을 보며 소향의 반응을 살핀다.
갑자기 볼이 메이는 표정을 짓더니 금방 눈물이 떨어진다. 소향이 들썩거리며 울어대지만 장씨는 기다려준다. 한참 후에 이번에는 소향이 먼저 묻는다. -우리 어무이는?- 하고 그저 장씨의 눈만 쳐다본다. 그제야 장씨도 아예 시멘트 바닥에 다리를 정좌하고 내려앉으며 웃음 띤 얼굴로 여유롭게 말한다. -너거 어머니… 잘 계시더라. 점방도 참하고. 장사도 아주 잘 하시는 것 같더구만- 하며 소향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주거니 받거니 삼천포 얘기에 소향은 묻기도 답하기도 하며 어느새 쓰고 있던 담요를 벗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릴 만큼 평정을 찾는듯하여 장씨가 슬며시 사건을 물어본다. 하지만 소향이 전후사실을 말하기보다 장서방이 유도하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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