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지에 반대하는 배 ‘평화마루’

오키나와 헤노코 항의선 선장 소마 유리를 만나다

시미즈 사츠키 | 기사입력 2015/01/12 [11:10]

美 기지에 반대하는 배 ‘평화마루’

오키나와 헤노코 항의선 선장 소마 유리를 만나다

시미즈 사츠키 | 입력 : 2015/01/12 [11:10]

미군의 신기지 건설이 추진될 예정인 오키나와 헤노코에 ‘항의선’을 조종하는 여성 선장이 있다? 현지에 가면 꼭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2014년 10월 드디어 헤노코를 찾게 됐다.

 

미군 기지 반대 연좌 농성이 진행 중인 천막에서 만난 소마 유리 씨(37세)는, 나고시의 헬리콥터기지 반대협의회가 소유한 ‘평화마루’ 4대 선장이다. 헤노코 방문자를 싣고 오우라만을 돌며 커다란 산호나 듀공의 이빨 자국, 간척 예정지 해안 등을 안내하며 오우라만이 가진 풍요로운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8월에 선박 면허를 딴 신참이에요.”

 

유리 씨는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겨우 두 달째. 평화마루는 정원 13명의 배이다. 승선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다. 처음 몇 주 동안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고.

 

오키나와 바다와 어르신들을 지키기 위해

 

▲  ‘평화마루’선장 소마 유리 씨(37)   © 이시다 기미에

선장이 되기 전, 유리 씨는 돌봄요양사로 일했다. “중학생 때 자원봉사를 하러 노인시설에 갔는데, 어르신들과 함께 있는 게 즐거웠어요.” 라고 말하는 유리씨. 어릴 적 부모님이 관리하던 하코네 소재 기업의 요양소에는 이리오모테섬과 가까운 하토마섬 출신의 노부부가 일을 하고 있었다. 노부부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진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유리 씨를 키워주셨다.

 

유리 씨의 가족들은 모두 바다를 좋아했다고 한다. 유리 씨는 어른이 되어 치바현 후나바시시 병원에서 돌봄요양사로 일하던 때에, 다이빙을 처음 배우고는 이내 빠져들었다. 다이빙을 하러 매달 오키나와를 오가던 차, 아예 오키나와로 거주지를 옮기는 게 낫겠다 싶어 2000년 스물두 살 때 이리오모테섬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하토마 할아버지가 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이리오모테의 시설에 일자리가 생겨”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 다이빙뿐 아니라 달빛 아래에서 조개잡이를 하는 즐거움도 익혔다. “헤노코 싸움이 끝나면 하토마 할머니네로 가고 싶어요!”

 

이리오모테 시설에 있던 어르신들은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어.” 라고 말했다. 목욕을 도우면서 본 곪은 상처가 “오키나와 전쟁 때 생긴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여든, 아흔의 인생 속에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분들이 ‘오키나와 반환’(1972년 오키나와 현의 영유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감) 당시 시위나 연좌 농성을 통해 비폭력 투쟁을 관철시켰기 때문에 지금의 오키나와가 있다.

 

(오키나와 전쟁은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 미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쟁이다. 오키나와는 고유한 역사를 지닌 류큐 왕국이었으나 일본에 점령당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지역을 지키는 방어선으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다. 오키나와 남부에선 아시아 태평양 전쟁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현민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큰 희생양이 되었다.)

 

“이 어르신들을 지키는 게 저의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키나와 헤노코 바다에 미군 기지 건설을 위한 간척 계획이 있다는 사실은, 같이 일하던 후나바시시 병원의 한 직원으로부터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이리오모테의 시설에서 어르신들에게 ‘헤노코의 투쟁 현장으로 거처를 옮길까요, 이리오모테에 남을까요’ 고민 상담을 했다. 그랬더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신들을 대신해 헤노코에 가줬으면 한다는 부탁을 받았다. ‘오키나와 반환’ 때 싸웠던 사람들의 말이었다.

 

유리 씨는 2년간 살던 이리오모테에서 나하로 거처를 옮겼다. 한 어르신으로부터 나고시에 비어있던 큰 집을 소개 받아, 지금은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헤노코와 연을 맺은 지 14년이 됩니다. 이 바다를 지키고 싶다는 제 강한 의지를 이해해준 전임 선장 선배들이 저에게 선장을 해보라고 얘기해줬어요.”

 

소마 유리 선장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요양사로서 어르신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이곳에서 바다와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바다를 파괴하는 일이 전쟁터로 사람을 보내는 일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미군의 마음에도 상처를 입히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헤노코의 기지 건설에 반대합니다.”

 

‘항의선’ 평화마루가 ‘유람선’이 되는 날을 희망한다

 

작년 8월, 보링 조사(boring survey, 지중의 지질을 조사하는 방법 중 하나. 보링 기계를 사용하여 지름 50mm 정도의 구멍을 뚫어 흙이나 암석을 채취하여, 지질과 지하수의 상태 등을 조사함)에 대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해상 보안청과 마찰이 있었다. 면허를 갓 땄을 무렵, “여자 선장, 저리 비켜! 적당히 하시지!” 하며 해상 보안청의 구명정에 포위당한 경험도 있다.

 

유리 씨가 조종하는 배 ‘평화마루’는 해상에서 기지 반대 항의 행동을 하는 카누 부대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해상 경계선을 넘지 않았음에도, 평화마루에 난입한 해상 보안청 직원들에게 조종키를 뺏길 뻔한 적도 있었다. 선박 면허 교습에서, 해상 보안청은 바다의 룰과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배운 참이었다. 정반대의 짓을 하니 분개할 수밖에.

 

평화마루에는 전국에서 헤노코 연좌 농성에 참여하러 오는 사람들이나 시찰을 하러 온 의원 등이 탄다. 취재하던 날에도 2백명의 단체 승객이 있었다. 이런 때는 하루 4회 운항을 하기도 한다고.

 

유리 씨는 정말로 바다가 좋다. “해상 보안청도, 해녀도, 저희들도, 모두 어서 원래 일로 돌아가 이 바다에서 친구처럼 놀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해상 보안청 직원들도 바다를 동경해서 그 직업을 찾았을 테니 말이다.

 

2014년 11월 16일 선거에서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오나가 다케시 씨가 현지사로 당선됐다. 그럼에도 공사는 재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유리 씨는 기지 건설이 중단되어 평화마루도 ‘유람선 평화마루’로 활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희망이란다. 지금이야말로 평화마루에 올라타 헤노코의 바다를 봐줬으면 한다고.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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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carnadine 2015/01/13 [13:13] 수정 | 삭제
  • 씩씩한 사람 보니까 좋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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