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환만 주십시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97화

김담 | 기사입력 2015/05/20 [15:35]

"만 환만 주십시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97화

김담 | 입력 : 2015/05/20 [15:35]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지전이라곤 만져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까맣다. 하다못해 곡식이라도 내다 팔아야 그나마 고무신 하나라도 살 현금이 생기건만 겨우 먹을 양식만 얻어 나온 광수에미에게 돈으로 바꿀만한 곡식도 넉넉히 없는 편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아이들을 시켜 큰아버지나 혹은 큰엄마한테 돈 달라고 시키는 것이 고작이고 또 그것으로 충분히 이어나가는데 오늘은 유독 돈타령을 하고 있다.

 

-갑자기 돈을 꾸어달라니? 자네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는데? 아이들이 필요하다면 나한테 보내면 되지 형제간에 무슨 돈을 꾸어주고 말고 하나?-

-행님요, 그래도 이제 살림이라고 따로 났는데 언제꺼정 염치없이 큰집에 손 벌리고 살낍니꺼? 딴솥에 밥 끼리모 주머니도 따로 차야 된다 캅디더, 좀 채해주이소!-

-시끄럽네, 그래! 얼마나 필요한데?-

시끄럽다는 말이 꾸어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얼마냐고 묻는 말은 돌려받을 생각 없이 그냥 주겠다는 뜻이다. 그동안 둘이 한집에 살아온 경험에서 알 수 있는 말이다.

-아입니더. 가을에 꼭 갚아 드릴게. 채해주이소.-

액수를 말하지 않고 갚을 것을 내세우는 광수에미의 태도가 큰아지매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자네 큰돈을 말하나? 도대체 얼만데? 필요한 게?-

-쌀 두가마예-

-그걸 자네가 머리에 이고 장에 갈 건가? 현금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만 환예. 꼭 쓸데가 있어서 그래예-

 

지난 함창 장날이었다. 꼭 살 것이 있어서 나가기도 하지만 그날은 그저 동네 아낙들과 장에 나섰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이것저것 만져보고 하는데 왠지 무언가 눈이 자기를 따라오는 느낌이 있어서 육솟간 뒤편으로 보니 허름한 몰골의 거지가 자기를 보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난 광수에미는 동행 속으로 몸을 섞어 넣고 뒤꼭대기에 눈을 달다시피 하고 그저 무리가 돌아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한가한 틈에 그놈이 언제 왔는지 자기 옆에 와서 한마디만 남기고 뒤도 안보고 걸어갔다.

 

-대장님 땜에 왔심더- 

오라버니가 문둥이라는 사실이나 또는 자기가 여동생이라는 사실이나 그 누구도 알지 못할 텐데 어찌 엉뚱한 자가 자기에게 오라버니의 이름을 팔아 자기를 부른단 말인가? 심장이 요동을 치고 정신이 들락거린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혹시라도 동행 중 누군가가 눈치라도 챌까 어지러운 심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중 그자는 이미 육솟간 뒤로 간 후였다. 

오라버니의 소식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만일 가지 않으면 그 자가 또 자신에게 접근할 것이고 그러면 동네사람들 눈에 띨 수도 있겠다 싶은 광수에미는 동행 무리가 장구경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슬며시 장터 뒤로 갔다.

 

점방을 돌아서자마자 그자가 서있었다. 얼굴을 수건으로 푹 싼 것으로 보아 그자도 문둥이가 틀림없다.

-여서 못살게 돼서 딴 데로 가야 된다고…. 만 환만 달라고 전하랍니더. 담 장날에 여서- 하고는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아득한 정신을 차린 후 천천히 동행들과 합류하여 집으로 왔지만 그런 큰돈을 일방적으로 요구한 오라버니가 야속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자가 남긴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여서 못살게 돼서”라는 말이 광수에미의 심장을 멎게 할 만큼 중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정말로 창호아바이 죽음과 오라버니가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동안 그저 막연하게 혹시 하는 심정과는 영 다르게 머리가 온통 벌집처럼 윙하며 울어댄다.

 

-그런 큰돈을 자네가 왜 필요한데? 그 정도면 삼촌보고 영감한테 말하라 하게. 그게 보기도 좋아-

-안됩니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큰소리가 목에서 튀어나온 걸 느낀 광수에미는 다음 말 대신에 입을 손으로 막고 큰 목소리 낸 걸 후회부터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큰아지매의 눈매가 매섭게 변한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 있나?-

덜렁거리는 버릇이 이런 자리에서 튀어나온 걸 후회하지만 만 환의 돈을 마련해야만 오라버니를 먼 곳으로 보낼 수 있고 또 자신과 오라버니의 관계를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행님요, 지가 꼭 필요해서 디리는 말입니더. 묻지 말고 좀 해주이소. 낼꺼정-

광수에미는 벌떡 일어서서 대문 쪽으로 줄행랑을 친다. 그 자리에 더 앉아있으면 왜놈 순사 같은 큰아지매의 눈에 덜렁이 자신이 필경 모든 걸 들키고 말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황급히 피하고 보자는 심산이다. 큰아지매도 평소와 달리 이상한 행동을 하는 광수에미를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해보지만 그런 큰돈이 왜 필요한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금방 나갔던 광수에미가 또 허겁지겁 도로 대문으로 들어서서 마당 가운데쯤 오더니 -행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이소예. 정말입니더- 하고 팽하니 나간다.

평소 같으면 실없는 사람이거니 하고 넘어갈 일이지만 이번 일은 광수에미의 행동이 전에 보지 못한 언행이라 큰아지매도 의아하다.

 

-소향아. 잠깐 이리 와봐라-

풍로 앞에서 연신 탕관에 씌운 종이를 걷어보며 부채질을 하던 소향이 숯불에서 나는 매운 연기 때문에 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마루로 걸어 나온다.

-너 혹시 보살님 언제 오실지 들은 적 있니?-

-언지예, 아지매 오기 전에 왔다가 가싰는데. 운제 오신다는 말은 없었어예-

-그래-

-와예?- 하고 묻는 소향의 서있는 모습을 큰아지매는 물끄러미 본다. 문득 배가 부르다고 느낀다. 딸이라면 앉혀서 다정하게 알아도 보겠지만 또 동서쯤 된다 하더라도 스스럼없이 임신상태를 알아보겠지만 소향에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음… 아니다. 좀 봤으면 해서-

짧게 답하는 큰아지매의 눈길이 자신의 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소향은 갑자기 어색하다. 몸을 돌려서 마루 중앙에 있는 큰 기둥 뒤로 숨으며

-카모… 지가 편지를 쓸까예? 삼천포에?-

큰아지매의 눈이 커지며 소향의 얼굴을 보고

-편지를 써? 너가 글을 아니? 언제 배웠는데?-

소향은 몸을 배시시 꼬며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광수한테 배웠으예. 삼천포에 팬지도 써봤으예-

-그래? 대단하구나! 그래- 하면서 소향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듯하다. 당돌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언제 소리 소문도 없이 글도 배우고 또 이미 편지도 보냈다는 사실에 큰아지매도 소향이 달리 보인다.

-약 탈지 봐라. 그리고 니가 쓸 수 있다니 하는 말인데 보살님 보고 한번 들리시라고 하고-

-예-

달갑게 대답하고 정기로 들어가는 소향의 몸이 깃털같이 가볍게 보이는 것으로 봐서 소향도 기분이 좋음이 틀림없다.

 

태섭이 한밤중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요즘 들어 매일같이 집에서 밥을 먹는 적이 없다. 큰아지매는 물론 무슨 일 때문에 출입이 잦는지는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평소의 영감이 자신보다 신중하다거나 치밀한 성격이 아닌 걸 아는 탓에 내년 봄에 있을 참의원선거에 나선다는 명목으로 지역을 휘젓고 다니는 것은 알지만 과연 실속 있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지 여간 신경 쓰이지 않다. 돈도 얼마나 쓰고 다니는지 또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지만 아녀자가 간섭한다는 빌미를 남길 것에 묻지도 않고 그저 동정만 살피고 있는 중이다.

 

평소에도 사람들 만나는 일에 술이 없을 수 없으니 늘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지만 어쩐지 오늘은 댓돌 위에 구두를 벗는 모습이 꼬장꼬장한 것으로 봐서 술에 취한 모습이 아니다.

-저녁은 잡숫고 오십니까?-

안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누라를 보며 각방을 쓰는 태섭으로서는 안방을 자기 방으로 여겨본 적이 없고 또 불쑥 건넌방으로 가기도 민망하여 어정쩡한 태도로 마루에 서서

-묵고 왔소. 안자고 있었네. 드가소-

할 말이 없는 탓에 참으로 한심한 말만 내놓는다.

-들어가시지요-

마누라의 말을 들으며 태섭이 건넌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누라도 뒤따라 들어온다. 조용히 마누라 특유의 단정한 자세로 앉더니

-요즘 바쁜 건 알지만 통 말이 없으시니 저도 궁금하네요. 어떻게 돼가는지-

태섭은 성냥으로 남폿불에 불을 댕기자 비로소 마누라의 얼굴이 보인다. 윗도리만 벗어 옆으로 밀친 태섭이 궁금해 하는 마누라에게 알릴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행정상 상주이다 보니 문경에 선거에 나서는 것이 다소 불리한 면모도 있다고, 하지만 자유당 민의원 강호식이 자신의 연줄을 총동원하여 태섭을 지원하고 있다고, 각 마을마다 어른들을 찾아본다거나 종가의 종손을 만난다거나 또는 유지들과 함께 지리를 마련하여 민심을 유도하는 중이라고.

 

-부부지만 묻기 어려운 말입니다만… 돈은 어떻게 마련하고 계십니까?-

이들 둘은 각방을 쓰는 만큼 각자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돈에 대해서도 역시 서로의 영역이 따로 있다. 태섭이 소출을 돈으로 바꾸면 늘 하듯이 일정한 금액을 마누라에게 건네고 그리고 나서 나머지는 모두 태섭의 조합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누라에게 건넨다는 돈의 크기도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이지만 그래도 종가살림을 하는 종부로서 일일이 남편에게 돈을 요구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자는 마음으로 또 거느리고 사는 서울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싫은 마음으로 뭉칫돈을 주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서로에게 여간해서 돈의 행방을 묻는 일이 없는데 오늘밤에 마누라가 자신의 돈주머니를 묻고 있다.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돈이 에법 많이 드가네, 마이 드가는 정도가 이이고. 무지 마이 드가네 그려!-

태섭의 말끝이 흐려지는 것으로 봐서 큰아지매의 귀에 돈이 받쳐주는 뒷심이 부족한 듯 들린다.

-제가 알아야 될 일이나 혹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도록 하시고-

역시 마누라의 말꼬리가 희미하자 태섭이 묻는다.

-왜 그러시나?-

비록 딴방 쓰는 부부지만 그래도 한 이십 년 가까이 살지 않았는가? 알만큼 알고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만한 무딘 사람들은 아니다. 

-예. 여유가 있으면 한 만 환만 주셨으면 해서요. 실은 서울에 있으면서 조카들 살림이 넉넉지 못해 좀 보태주고 왔답니다. 입치레 값으로 여기고. 그러고 나니 집에 가용이 없어서-

사실 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수만 환은 있지만 꼭 서방에게 돈을 받아 내자는 마음이 아니라 그로인해 태섭의 주머니를 한번 들여다보자는 심산이다.

 

-아! 카모, 진작에 말하지. 알았소. 내 낼 조합에 들리지. 케도 말 나온 김에 당신한테 상의를 해야겠소-

다리를 꼬아 바꿔 올리는 태섭이 우선 담배부터 한 대 입에 올린다. 마누라가 싫어하는 줄 알지만 굳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심각한 말이기 때문이다

-선거자금이 마이 들가네. 케서 하는 말인데… 아무 케도 땅을 좀 처분해야겠소. 내년 봄 선거까지 아직도 일곱 여덟 달이 남았는데 사실 지금부터가 더 돈이 들어가는 때라서-

 

큰아지매는 한쪽 다리를 세워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조용히 듣고 있다. 태섭의 돈주머니가 비어간다는 말이다. 적은 돈도 아닐 텐데 그 돈을 다 써버렸다는 말인가? 지난 수년간 집안에 대소사도 없었고 또 땅을 사들이거나 집을 지은 적도 없었으니 돈이 모였을 텐데. 그 돈을 다 썼다는 말이렷다. 그리고 이제 땅을 팔아서 선거자금으로 쓰겠다는 말이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지금 나서서 여자가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저 듣고만 있다. 말없이 자신의 눈만 쳐다보는 마누라의 눈길이 남포 불길에도 훤히 보이자 태섭은 침묵이 어색하여 계속 말을 이어간다.

 

-뭐 마이는 아이고. 저쪽 원흥에 있는 땅마지기만 처분하모 선거는 치를 낀데 케서- 하고는 마누라의 눈치를 본다.

그래도 마누라는 미동도 없고 대구도 없다. 큰아지매는 나름대로 원흥의 땅을 머릿속에 넣고 재보고 있는 것이다. 그쪽 논배미도 사오십 마지기가 넘을 텐데 도대체 얼마나 처분한다는 말인가? 태섭은 눈을 흘낏거리며 마누라의 표정을 읽어내려고 하지만 남폿불이 어두워 거기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심정에 또 담배 한 대를 더 입에 물고 넋두리로 대신한다.

-아, 내 이참에 참의원에 당선되기만 하모 그까짓 논 몇 마지기가 문제요? 마음만 무모 까짓 수백 마지기도 살낀데?-

 

허풍을 떨어대도 마누라는 여전히 꼼짝도 않고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다. 참의원이 무슨 돈방석에라도 앉는 자린 줄 알고 있는 태섭의 말에 한숨이 나오지만 참는다. -그런 건 영감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차질 없이 하시도록 당부만 합니다- 하고 일어나서 안방으로 건너가 버린다. 태섭은 비로소 바지를 벗고 훌러덩 누워 마누라의 시선을 벗어난 안도감을 만끽한다.

 

이튿날 조합에 들린 태섭은 마누라에게 줄 현금 십만 환을 찾았다. 비록 마누라가 만 환을 말했지만 땅을 팔겠다는 자신의 의도도 전한 마당에 넉넉한 뭉칫돈을 전하겠다는 심산이다.

 

*   *   *

 

장서방은 모가 무릎까지 차오르자 소작하는 사람들에게 잔소리가 늘어만 간다. 논둑에 풀도 베야 하고 논에 잡풀도 뽑아야 하고 물길도 때 맞춰 마르지 않도록 살펴야 하는 까닭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독려를 하지만 사람들도 나름대로 피곤하고 게으른 이유로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심지어 태광이가 짓기로 한 논의 꼴도 장서방 눈에 그다지 차지 않는 마당이다. 일찍 들판을 둘러보고 아침을 먹으러 집에 오는 길에 별채에 들린 장서방은 태광을 찾았다.

 

-광수아버지. 아침은 잡수셨나요?-

마침 나른한 초여름에 일하기 싫은 마음이 낮잠으로 변해 목침을 목에 고이고 깜박 잠에 취했던 태광이 허리를 일으키며 밖을 내다본다.

-장서방, 우짠이로? 들에 나갔다오는 길인교?-

-예, 그런데 광수네 논도 좀 메야 하겠던데요? 모보다 풀이 더 키가 컵디다-

 

그걸 모르는 태광이 아니다. 그동안 자신이 집사 노릇하며 소작꾼들한테 오만소리 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농사라고 지어보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고 해도 해도 일이 끝도 없고 몸살이 나려고 해도 날 시간이 없을 지경이라 슬슬 꾀를 피우고 있던 중인데 그걸 장서방이 꼬집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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