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아니, 지도 있었지예. 쿤데 소리가 나서 방에서 나와 보이 이미 빙구행님 머리에서 피가 나고 넘어져 있었지예- 넘어져 있었다는 말까지 지어서 보탠다. 마루에 모로 쓰러져 누운 장서방을 아무도 일으키지도 않고 설왕설래하는 사이에 창호어마이와 광수에미가 장서방을 일으켜 앉히지만 장서방은 술이 취해서인지 아니면 머리라도 다쳐서인지 의식이 없이 그저 숨만 씩씩 몰아쉰다. 창호어마이가 치마 한쪽을 입에 물고 찍하고 찢더니 그 조각으로 장서방의 머리를 동여매주는데 장서방의 등짝을 자기 가슴팍에 기대주던 광수에미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광수 아부지! 뭐합니꺼? 업고 가입시더- 마누라가 부르는 소릴 듣고서도 태광이는 선뜻 등을 내주지 않는다. 머슴을 등에 업고 가는 종갓집 아들의 모양이 자꾸만 눈에 얼른거려서다. -태우, 니 일로 나와 봐라- 아직도 을순이 방안에서 문지방에 기대어 내다보던 태우를 태광이 부른다. -와예?- 엉덩이도 달싹하지 않은 채 눈을 올려 떠 태광을 보며 태광의 속셈을 미리 알기라도 한 태우는 머슴을 등에 올릴 생각도 아예 없다.
-나오라 안 카나!- 이번에는 광수에미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둠속이지만 광수에미의 눈이 매 눈같이 번뜩인다. 그래도 태우는 문지방에 한쪽 팔만 걸치고 외면을 하고 있자 갑자기 가슴팍에 기댄 장서방을 생각지도 않고 벌떡 일어서자 장서방이 이번에는 얼굴을 마루로 곤두박질치며 앞으로 쓰러지지만 광수에미는 개의치 않고 신도 신지 않은 채 을순이 방 앞으로 내달린다. -문디 같은 기, 하는 짓마다 말썽이고 집안 망신이나 시키고. 나오라모 나올 일이지 오데 따박따박 대꾸를 해!- 하고 문 앞에서 손을 뻗어 태우를 잡으려하자 태우가 엉덩이로 몸을 밀어대며 뒤로 빠진다. -내가 우쨌다고 내 보고 캅니꺼? 참! 내원!- 태우는 뒤팔을 방바닥에 댄 채로 문밖에서 들어오지는 않는 광수에미에게 타박을 한다. -고마 됐다. 가자!- 태광이 단호하게 일성을 남기고 마루로 엉덩이를 내밀자 창호어마이가 장서방을 들추어 태광의 등에 올리려 하지만 시체 같은 장정의 몸을 이기지 못하고 끙끙댄다. 그래도 광수에미는 매 눈을 뜬 채 거들 생각 없이 장서방을 안고 씨름하는 창호어마이를 노려만 본다. 장서방이 이렇게 미운 적이 없었다.
* * *
추석이 며칠 남지도 않은 대목장을 보러 큰아지매와 작은아지매 그리고 소향이 함창으로 나섰다. 그런데 지게라도 지고 따라나서야 할 장서방이 없다. 대신 동네 청년 하나가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장서방은 얼마 전에 입은 머리상처로 아직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방에 등을 대고 있고, 소향이 아니었다면 종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일찌감치 보따리라도 쌌을 것인데 통사정을 하며 사정을 해대는 소향이 덕에 두문불출하며 누워있지만 사실 일어설 힘도 없는 형편이다. 상체만 일으켜도 머리가 핑 돌아 앞이 캄캄해지고 나무둥치 마냥 픽 쓰러지니 아마도 그날 머리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라 믿는다. 괜시리 닭 한 마리 먹인다고 했다가 일이 사납게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다. 장서방은 속으로 추석이 얼마나 남았나 하고 세어보니 겨우 삼일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몸도 추스를 수 없는 상황에 머슴이 해야 할 태산같이 많은 추석준비를 어쩌나 하고 난감하다.
-계시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향이 일러준 말이 기억나 집안사람들 모두가 대목장에 나선 것을 안 장서방은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연다. 며칠째 방안에서만 머문 탓인가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가을햇살에 눈을 뜰 수 없는 장서방은 실눈만 뜨고 마당에 서있는 형체만 본다. -당신이 장서방이요?- 묻는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마치 저승사자 같이 보였다. 겨우 눈길을 튼 장서방은 순경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소만?- 하고 올려보자 순경은 산발된 머리위로 핏자국이 마른 광목쪼가리를 감고 있는 형편없는 장서방 몰골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고소한 사람이 있으이…. 지서에 나오시야 돼오. 낼꺼정 오시오- 하고 다시 한 번 장서방을 힐끗 보고 돌아서서 가버린다. 장서방은 놀라지도 않는다.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 일이 눈앞에 닥쳐도 그놈들이 당사자들이니 능히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내심 괘씸하다. -엿놈들!- 들이라는 것이 하나가 아닌 복수이니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태우와 꾸루와이를 싸잡아 부른 것이다. 내일까지 서로 나오라는 말은 듣긴 들었지만 도저히 나갈 힘도 없다. 안 나가면 지들이 잡으러 오겠지! 그러면 힘 안 들이고 서까지 갈 수도 있겠다 하는 마음이 드니 그냥 편해진다.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또 벌러덩 누워버린다.
* * *
소향은 무거운 몸을 열심히 재촉하며 홀가분히 걷는 큰아지매와 작은아지매의 발길에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그 뒤에는 느직느직 걷는 청년 하나가 지게 작대기로 길가에 난 잡풀을 이리저리 헤쳐대기도 한다.
지난 며칠간 소향은 장서방을 대신해 정신없이 일을 추슬렀다. 자신에게 먹일 닭 한 마리 때문에 빚어진 일인 것을 아는 소향은 미안함 때문에 큰아지매가 보지 않을 때 물을 길러오기도 하고 땔나무도 작은 단으로 조금씩 정기에 옮겨놓기도 하고 마당을 쓰는 것은 물론 뒷간 청소까지 깨끗이 해댔다. 장서방이 등짐 지고 누운 것을 표나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다.
또 큰아지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매정하게 내다 버리라고 한 닭 때문에 장서방이 폭음을 하고 그 술 때문에 무슨 사단이 난 것을 광수수에미로부터 들었다. 머슴이 머슴노릇 못하면 집에 둘 이유도 없지만 어느 정도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느끼는 큰아지매는 장서방 일은 여태 입에도 올리지 않고 소향이 틈틈이 장서방 방문을 들락거려도 상태를 묻지도 않았다. 속마음과는 달리 얼음장 같은 표정하며 태도로 종가의 면모를 지키고 있다.
반면에 작은아지매는 절구통 같은 몸매처럼 때론 후덕하게 또 다른 때는 앞뒤 없는 돌맹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게 행동한다. 문종이 한 장 사이인줄 알면서 마당에 들어서면서 머슴이 상전노릇하고 방안에만 있다고 타박을 해대다가도 저녁때에는 깨죽을 쑤어 소향에게 주면서 입맛 없을 때는 죽이 입맛을 돋군다고 한다. 그런 광수에미를 소향은 이해할 수가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장서방이 이집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소향의 심산이다. 아침에도 큰아지매는 무거운 몸을 핑계로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소향은 자신이 장서방 대신 추석장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억지까지 써가며 장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숨을 헐떡거리지만 아지매들 귀에는 들리지 않게 내쉬며 열심히 걷고 있다. 벌써 풀들이 떡잎을 드러낸다. 그럴 수밖에. 가을이 아닌가? 대목장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저기 논길을 따라 밭길을 따라 또 풀숲 사이로 난 지게길을 따라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걷고 있다.
오후 늦게 청년의 지게 위로 산더미 같은 짐을 올리고 그들은 종가로 돌아왔다. 장서방은 인기척을 어렴풋이 잠결에 들었지만 문도 열어 내다보지 않고 그냥 잠만 잤다.
* * *
내일이 추석이다. 종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동네 아낙들이 제사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느라 붐볐고 동네 아이들은 일하는 엄마들로부터 지짐이 조각이라도 얻어먹으려 붐볐고 종친들이 하나둘씩 인사차 또는 사당 청소하려 붐볐다. 태섭은 어제 출두하라는 명을 장서방이 어겼다고 들른 순경에게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방문을 열어본 순경은 그냥 돌아갔다. 가슴 조리던 소향에게 저녁상을 받으며 장서방은 말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너도 너무 마음 쓰지 말아라. 그리고 나는 원래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방바닥이다. 여기 아니라도 혼자 살 곳 없겠나?- 했다. 그 말을 들은 소향은 아무 대답도 못했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집에 온 뒤로 태산같이 의지하며 살지 않았든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마치 그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소향은 홀로 천길 난간에 선 기분일 수밖에.
추석 준비에 지친 사람들이 음식이 상하거나 짐승에 노출되지 않도록 공중에 매달거나 대소쿠리로 덮거나 광에 넣어놓고 추석맞이를 끝내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불어대는 선뜻선뜻한 바람이 예사롭지가 않다. 광풍처럼 휙 불어대는가 싶더니 또 언제 바람이 불었느냐 할 만큼 고요하고 방문이 흔들거리거나 삐거덕거릴 정도로 요란한 일진광풍이 가고 오기를 반복하지만 지친 몸들은 잠에 깊이 빠져버린다.
장서방은 시도 때도 없이 자고 깨는 바람에 요즘은 밤도 낮도 따로 없다. 유일한 놀이가 라디오를 듣는 것이다. 미제라디오를 통해 노래도 듣고 소식도 듣는데 그것도 전지 때문에 아껴가며 듣는다. 한밤중이라 소리를 작게 하고 듣자니 잡음이 심하여 잘 들릴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무슨 태풍이 제주도와 남해를 강타하고 북상 중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흔들어대는 바람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추석 전날 밤이라 대문을 닫지 않았다. 솟을대문의 키는 사람 키 두 배나 됨직한 큰 대문이다. 그것이 쾅쾅 닫히고 열려 젖혀진다. 장서방은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고 일어나 나간다. 거의 기다시피 하여 겨우 대문에 빗장을 질렀는데 이번에는 기왓장이 날라 장독대 위로 쏟아진다. 안방도 열리고 건넌방도 열리며 사람들이 나오고 소향이도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칠흑 한밤중에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다. -태풍이랍니다. 문 닫고 나오지 마십시오. 지붕이 벗겨진 모양이라 위험합니다!- 계속해서 무언가 날아다니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부서지거나 깨지는 소리가 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또 눈도 뜰 수 없는 강풍이다. -아저씨도 고마 드가이소예!- 바람을 이기려고 큰소리로 질러대는 소향의 목소리도 장서방의 귀에 겨우 들릴 정도다. 담 너머 별채도 인기척이 들리지만 곧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사방을 휘감고 몰아대는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 놀라서 짖는 개들 소리, 무언가가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들만 아득해진다.
장서방도 문고리를 안으로 잠근 후 흠뻑 젖은 옷을 벗어 짜며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그런데 아까까지 어질어질했던 머리가 감쪽같이 멀쩡하다. 찬비를 맘껏 맞아서인가? 찬바람을 실컷 쐰 탓일까? 잠가둔 문고리가 덜그럭거리지만 신기할 만큼 정신이 나고 몸이 추슬러진다. 태풍소리는 더욱 강해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난리통이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장서방은 차분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겠다 하고 느낀다.
담배도 없고 라디오도 잡음 때문에 들을 수 없고 그저 날새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서방은 바람의 광란에도 이제 지서에 가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힐끗 본 방문에 한줄기 번개가 번쩍인다. 이미 창호지는 들이치는 빗물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조금은 어질하지만 다잡은 마음 탓에 몸을 세운 장서방은 물기 축축한 옷을 다시 걸치고 문을 나선다. 멀리 구름 사이로 희미한 동이 트는 탓에 이제 사물은 분간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부터 살펴야 할까 하고 숨을 내쉬며 생각하는데 건넌방과 안방문이 열리더니 태섭이와 큰아지매가 마루로 나온다. 바람은 조금도 기운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 남겨진 방문은 부서질 듯 벽을 후려댄다. -아직 나오시기엔 이릅니다. 어차피 바람이 지나고 봐야 되니 들어가십시오- 소향도 문고리를 잡은 채 내다보는 것으로 봐서 한잠도 자지 않은 모양이다. 장서방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담 너머로 태광이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억지로 대문을 지탱하여 열고 광수네 집으로 가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담은 반 넘게 허물어져있고 그집 역시 기왓장이 벗겨져 안으로 물이 줄줄 새고 있다. 이제 날은 완연히 샜다.
* * *
동네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 들린다. 태광이는 서둘러 삽을 들고 나서고 장서방도 뒤따라 막연하게 나섰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테봉뜰은 뜰이 아니다. 바다다. 지평선은 간데없고 수평선이 아련하다. 아직 한 보름이나 남은 추수가 물속에 고스란히 잠겼다. 아마도 미처 나가지 못한 물이 퇴강에서 거꾸로 밀려 올라온 모양이다. 그래서 이름 붙여진 퇴강이라 들었다. 부러진 나무 위로 닭들이 여기저기서 젖은 날개를 접고 있다. 돼지도 밭 한가운데서 꿀꿀거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한 집이 없다. 초가란 초가는 모두 지붕이 날아가고 서까래가 덩그러니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집을 건사하기 앞서 들로 나와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다. 이제 입에 풀칠할 것도 없이 몽땅 수장시킨 절망을 토로하는 중이다.
장서방도 자신의 머리에 난 상처를 잊고 손끝까지 전해지는 낙심을 느끼며 그저 되돌아오고 있다. 동네를 흐르는 작은 도랑이 도랑이 아니고 일렁대는 물결이 마치 지옥 속에서 널름거리는 괴물의 혓바닥 같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뿐 여전히 불어대는 강풍 속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이 그저 신음만 내놓는다. 가로로 쏟아대는 빗줄기가 그리고 몸을 가눌수 없게 한 바람이 잦아든 것은 아침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동네 청년 하나가 역시 삽을 들고 나왔다가 장서방을 보고 사라호 태풍이라고 했다. 속으로 사라호라는 이름을 누가 붙여서 부르는지 몰라도 죄다 사라지게 만드니 사라호가 맞긴 맞다 생각했다.
추석날 아침에 맞은 태풍의 참상은 지옥이 따로 없다. 사람들은 추석도 까맣게 잊은 채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다. 남은 바람 자락들이 머리를 휙휙 쓸어 부쳐대는 동안 장서방도 종가의 피해를 살펴본다. 정기 쪽 처마를 시작으로 기왓장이 반쯤 벗겨졌고 그 조각들이 바람에 날려 장독으로 마당으로 쏟아져 내렸다. 별채와 가로지른 담도 제법 허물어져있고 헛간이며 뒷간은 속살을 다 드러내놓은 채 지붕은 아예 간데 온데 없다.
옷을 차려입은 태섭이 마당을 둘러보던 장서방에게 다가와 -들에는 가봤나?- 하고 묻자 장서방은 헛간과 됫간을 오늘 당장이라도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태섭의 물음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답한다. -안 가보는 게 나을 겁니다. 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심한가? 우떤데?- -올해 농사는 끝인가 싶습니다. 나락이 안 보이고 망망대해가 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장서방의 혼잣말은 종가를 걱정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태섭은 걱정이 덜컥 앞선다. 부랴부랴 입은 바지를 걷어붙이고 뒷짐을 지고 태봉뜰이 보일 곳으로 나가다가 가던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걸음걸이도 점점 더 느려진 것이다. 남정네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유독 아낙들의 통곡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태섭은 계속 걸어서 마을을 거의 벗어날 만큼 많이 걸었다. 어디가 도랑이었고 강이었고 논이었고 도무지 구분이 안 된다. 저만치 낙동강 뒤를 받치고 있는 산등선만 보일뿐 그 앞까지 펼쳐진 물의 광란은 태섭이 평생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모습이다. 아니다. 본 적이 있다. 일제 때 친구들과 간 강릉 앞바다가 바로 저렇게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철이 든 이후로 본 가장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있다. 소작은 날아갔다. 물론 한 해 농사 망했다고 길에 나설 형편은 물론 아니지만 선거를 코앞에 둔 처지에 돈쓰임이 어디 한두 군데나?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일다의 방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