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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광수에미는 뒤뚱거리며 뒷단으로 간다. 입을 연신 씰룩거리며 가진 자의 여유가 풀풀 풍기는 큰아지매의 태도 앞에서 가지지 못한 자의 빈약함으로 속내를 감추며 눈치 봐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대신 알아듣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거운 멍석말이를 하나 더 끌어내온다.
큰아지매는 아무 말도 없이 광속에서 이것저것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문 앞으로 내놓고 소향과 작은아지매는 멍석 위에 쏟아 붓는다. 결국 멍석이 모자랄 정도로 가득 널려졌다. 여느 집에서는 이미 정월이나 이월쯤 없어졌을 먹을거리다. 묵은 찹쌀이며 콩이며 팥이며 녹두에 양대까지 온갖 잡곡이다. 손으로 슬슬 펴가며 따듯하게 내려쬐는 햇살 아래로 고루고루 흩어 뿌리던 소향은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동을 느끼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옆에 있는 작은아지매에게 넌지시 묻는다. -아지매- 하고는 마루 위를 보니 큰아지매는 광속에서 청소라도 하는지 꼬리도 보이지 않자 다시 광수에미에게 말을 계속한다. -얼라 놓을 때… 마이 아픕니꺼?- 육중한 허리를 이리저리 놀려대며 오뉴월 장마에 벌레가 낀 곡식을 골라내던 작은아지매는 소향의 말을 듣고서도 엉뚱하게 딴말을 한다. -많다 보이 썩혀버리게 생깄다. 없어 못 묵는 집이 있고 많아 버리는 집이 있다. 세상 참- 하다가 소향의 말이 그제야 생각난 듯 -니 뭐라 켔노? 응. 아 놓을 때 아프다고? 그래! 아프지. 정신이 없제. 쿤데 다 잊자뿐다. 내도 지금 생각해 보이께네…. 그저 아팠었다 싶제. 꼭 남의 일 같다. 다 삼신할매가 알아서하는 일이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도무지 아프다는 말인지 아프지 않다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광수에미도 눈을 지그시 감고 광수나 재수를 낳을 때의 기억을 살려보려는 중인데 소향도 작은아지매의 아리송한 대답에 그녀의 얼굴을 마냥 쳐다보고 있다.
* * *
태섭이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 뒤로 빗어 넘기고 오랜만에 곤색 양복을 꺼내 입고 구두를 신었다. 이제는 날씨가 선선한 탓에 땀도 날 염려가 없어 모양낼 수 있는 옷이 제법이다. 하지만 다림질이 되지 못한 탓에 윗도리 뒤쪽이 구겨져있다는 걸 태섭이 본인만 모른 채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마당에 있는 소향에게 눈길을 주지만 소향이 눈을 피하자 광수에미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태광이는 뭐합니꺼?- 할 수 있는 인사말 중에 제일 무난하다는 생각에서다. 안방주인에게 돈이라도 빌릴 궁리에 골몰해있던 광수에미는 태섭의 말에 허리를 돌려 역시 인사말에 지나지 않는 대꾸만 한다. -모리지예. 할 일도 다 없어진 마당에 뭐 하는지는 알아서 뭐합니꺼?- 하고 도로 멍석위의 곡식을 쓸어대자 태섭이도 더 묻지 않고 그냥 나간다. 오늘 태섭이 모양까지 내고 나가는 이유는 인근 수해 피해를 조사하고 시찰한다고 서울에서 관료들이 온다고 연락을 받아서이다. 문경군수, 상주군수 그리고 도지사가 장관들을 대동하여 시찰을 한다는 것이다.
광속에서 비질을 하던 큰아지매는 햇볕 아래서 사이좋게 두런거리는 소향과 광수에미를 보고는 손에 든 빗자루를 내려놓고 소향을 부른다. -소향아, 광속에 청소 좀 해라. 지금!- 지금이라는 말이 그들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에서 튀어나온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 중에 분명 자신에 대한 말이 그것도 곱지 않을 말이 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행님요. 아 좀 작작 부려 먹이이소. 그 카다가 잘못 되면 어쩔랍니꺼?- 미운 얼굴에서 튀어나오는 미운 말이라 큰아지매는 싸늘한 눈으로 동서를 내려다보며 엉뚱하게 답한다. -자네는 해그름 해지면 곡식들 들이게- 하고 돌아서자 광수에미는 -행님, 이거 아무 케도 못 먹겠심더. 험해서. 벌레가 끼고 인제 곧 햇곡이 날 낀데-라고 한다. 마루에서 발걸음을 안방으로 옮기려던 큰아지매도 광속을 청소하다가 느낀 것이 생각나서 -그러면 자네가 알아서 하게-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 말을 들은 광수에미는 신이 났다. 큰바람 때문에 먹을 것이 금쪽 같이 귀해진 마당에 멍석위에 널린 푸짐한 오곡들이 웬 횡재란 말인가? 비록 꾸물거리는 벌레도 있고 날개 달린 나방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지만 그래도 횡재는 횡재다.
태섭은 타고 온 자전거를 함창 장터 입구에 있는 육솟간에 맡기고 바지를 툴툴 털어낸 후 면사무소로 가보니 벌써 면사무소 앞이 장사진이다. 촌에서는 보기 힘든 시커먼 지프차가 대여섯 대나 줄지어 서있고 하이칼라로 모양 낸 양복쟁이들이 여기저기 우르르 서있다.
태섭은 막상 오긴 왔지만 자신이 어디에 끼어들어야 될지 몰라 헛기침을 하며 어색함을 녹이는 중에 문득 눈에 띄는 자가 있다. 채씨 문중의 채시중이다. 그자도 역시 면사무소 입구에서 뒷짐을 진 채로 서있다. 조상 탓에 얻은 시중이라는 이름은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이름이라 평소에도 생각했었는데 그자 역시 대갓집 어른답게 하얀 비단 두루마기를 걸치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리번거리고 있다. 태섭은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마치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인사를 건넨다. -아이구, 채시중 어른께서 우짠 일입니꺼??- 하며 허리를 굽힌다. 인근에 인천채씨가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문중에서는 제일의 어른으로 알려진 노인이다. -아이구 이거 김회장 아인교? 어서 오이소. 태풍 때문에 근심이 많으시겠소- 나이로 봐도 태섭이보다 한참이나 더 많은 채시중은 뒷짐을 더 깊게 짓느라 허리가 휜다. 하지만 태풍이 휩쓴 다음의 호기는 농사를 바탕으로 호령께나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겉치레일 뿐 부자도 가난뱅이들도 모두 헛바람 새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태섭은 면사무소 입구에서 가을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보며 자신이 지금 왜 여기에 와있는지 어색하기만 하다. 면사무소 안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나 명칭도 없다. 그래서 죽어라고 참의원선거를 뛰고 있다. 참의원이라도 되기만 하면 자신도 저 사무소 안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읍소하고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에게 턱을 올려 말도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문밖에서 저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꼴이다. 군수가 사람을 시켜서 나와 달라는 연락을 받은지라 이것 역시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막상 나오긴 했지만 더 높은 사람들 틈에 있어보니 비로소 자신이 태봉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 후에 사람들이 우르르 문밖으로 밀려나오는데 민의원 강호식이며 상주, 문경군수며 그리고 모르기는 하지만 도지사가 고개 숙이는 걸로 봐서 분명 서울에서 옴직한 장관쯤으로 보이는 자까지 다 몰려나온다. 태식은 이 마당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그들이 지나갈 길을 피한 채 눈길로만 그들 중 누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열심히 두리번거린다.
-어이, 김회장! 오싰구려. 같이 갑시다. 그리고 채시중 어른도 같이 가시고- 말과 함께 눈길을 준 사람은 강호식 민의원이었다. 그들 중 제일 태식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민의원선거 때 태식으로부터 선거 자금도 얻어 썼고 서울에서 문경으로 내려올 때마다 기방에서 먹는 술값을 태식이 부담하거나 계집을 들이는 것까지 전부 태식에게 뒤집어씌운 대가로 내년에 있을 참의원 선거에 태식을 후원하기로 은연 중 약속을 한 강호식이지만 종이에 쓴 것도 아니요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다.
거나한 태도의 한 무리가 지프차에 오르자마자 부르릉 하고 줄이어 출발하자 뒤에 남은 먼지 바람 속에서 함창 지서장이 튀어나온다. -점촌으로 점심 잡수로 가싰심더. 우리도 퍼떡 가입시더- 태섭은 속으로 난감하지만 누구에게도 또 무엇을 표현할 수도 없다. 걸어서 한참 길이나 되는 점촌까지 가야 되는 처지, 지프차를 타지 못하고 또 아무도 태식이를 태워주지 않는 것까지 마음이 한없이 불편하지만 선거가 코앞이니 안갈 수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근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야 할 판이니 오늘 같은 좋은 기회가 또 흔한 것도 아니라는 마음에 맡겨놓은 자전거를 찾아서 열심히 발을 굴러대며 입으로는 더운 열기를 뿜어댄다. 지서장도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온다. -관동장이라고 합니더- 숨이 꼴깍하고 넘어갈 지경이다. 평소 같으면 세월아 네월아 하며 갈 일이지만 지금 지프차가 달려간 뒤라 늦걸음에 먹다 남은 음식 먹게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발걸음이 없었던 관동장이다. 자전거를 한 편으로 세워놓고 지서장과 들어가니 댓돌 위에 신발이 수북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다. 시끌시끌한 소리만 왁자지껄 하고 연신 반찬을 들고 드나드는 아지매들만 보일 뿐 누구도 자신을 반기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안 보인다. 방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인데 체면에 여기저기 빼꼼거리며 들여다볼 수도 없다.
태섭은 속으로 내가 참의원이 되기만 해봐라, 이놈들 하며 정수리로 치솟는 열기를 털어내느라 머리를 연신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고 내린다. 그래도 할 수 없는지라 댓돌 위에 서서 우선 큰 헛기침으로 자신을 알리고 고개를 빼서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한쪽 제일 큰방에서 새나오는 말소리가 민의원 목소리다. 이왕 여기까지 온 터 이제는 체면을 접고 들어가야 할 판이다. 뒤에 서있는 지서장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태섭은 구두를 벗고 방 앞으로 가니 다행히 문이 열려있어 바로 정면에 앉아있는 강의원과 눈이 마주쳤다. -어이, 김회장. 기다리고 있었구만. 이리 오시오. 인사도 올리시고- 말은 하지만 엉덩이도 들썩이지 않는 강의원이 건방지다고 생각은 들지만 태식은 일단 들어간다. 자신도 모르게 양손이 배 앞으로 모아지고 허리가 숙여지더니 발걸음도 고양이 걸음으로 방 한 편으로 옮겨진다. 길게 놓은 교자상이 세 개쯤 붙여져 있고 산해진미가 올려져있다. 이미 술잔이 돌려졌을까? 얼굴이 벌건 몇몇도 보인다.
-자자, 김회장. 인사 올리시게. 이분은 내무장관이시고, 이분은 도지사시고. 그리고 이분은….- 태섭은 그저 허리를 깊게 굽혀 강의원이 소개하는 사람 쪽으로 인사를 해댄다. 자신이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머리 조아려 인사해본 적이 없는 태섭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자책감까지 들지만 이미 일은 진행되고 있으니 멈출 수도 없다. -자자, 그기 앉게나. 안 그래도 김회장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빈말일 수도 있지만 우선은 듣기가 나쁘지 않은 태섭은 강의원에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아이구, 뭘 저 같은 사람을- 하며 송구한 표정을 짓자 강의원이 술잔을 옆에 사람에게 주며 멀리 있는 태섭에게 술을 건네라는 듯하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김회장. 김회장 오기 전에 여기 계신 장관님과 도지사님에게 내 김회장 얘기 많이 했소. 다 도움을 주실 분들이고 언젠가는 또 뵈야 할 분들이고 모실 분들이라 우리 지역에 젤로 가는 귀한 분이라 내 소개했소-
태섭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다. 지프차도 태워주지 않고 먼지바람만 남기고 달아나더니 갑자기 무슨 귀한 분이라니? 앉은 자리조차도 겨우 비집고 들어간 터라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할 만큼 비좁은데 그런 나를 갑자기 귀한 분이라고 장관 앞에서 부르다니? 태섭은 갑자기 눈알을 굴러대며 머릿속으로 무슨 말인지 헤아려 보려는데 이번에는 도지사라는 자가 한마디 한다. -존함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재난에 피해도 많으셔서 상심 또한 크실 텐데 이렇게 지역 시찰에 동참해주시고 일조하신다니 우리들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장관이라는 자는 옆에서 건네주는 잔을 받느라 도지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바쁘고 말하는 도지사와 듣는 태섭이만 눈을 맞대고 있을 뿐 사람들 모두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느라 관심도 없다. 일조를 한다? 태섭은 머릿속이 번쩍한다. 내가 언제 무슨 일조를 한다고 했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아무 말도 않고 도지사를 쳐다보자 언제 말을 듣고 있던 강의원이 끼어든다. -자자, 우선 한 잔하고 김회장! - 하고 너스레를 떤다.
태섭도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한 터라 앞에 놓인 술을 들어 목으로 털어 넣은 후 아까 들었던 일조라는 말을 되씹어보는데 이번에는 문경군수가 한마디 한다. -이번에 난 재해는 역사에 남을 만큼 막대하고 큰 피해입니다. 하지만 바쁘신 와중에도 장관님께서 친히 찾아주셔서 염려해주시니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하자 여기저기서 누구랄 것도 없이 그럼요, 혹은 그렇지요 하며 맞장구를 쳐댄다. 찾아주어서 해결이 되다니? 찾아오면서 쌀말이나 보리쌀 가마라도 지고 와야 먹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해결이라도 되지 그저 찾아와서 벌건 대낮에 요정에서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입방아만 찧어대면 입에 친 거미줄이 걷힌단 말인가?
태섭의 입맛이 쓰다. 또 술 한 잔을 손수 따라 마시는데 문밖에 아까 면사무소 앞에서 같이 기다리던 채시중이 벌겋게 익은 얼굴과 뒤로 젖혀진 갓을 쓰고 서있다. 역시 강의원이 호들갑을 떨면서 들어오라 하고 앉으라 하고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소개를 하고 채시중은 손을 모아 인사를 해대지만 강의원은 궁둥이도 들썩하지 않고 두 팔만 나댄다. 그리고 들리는 똑같은 소리다. 지역에서 제일로 귀한 분 채시중이라고 그리고 또 도움을 많이 주실 분이라고. 태섭은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이박사께서도 지금 미국과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교섭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시간이 걸리는지라 임시방편으로라도 각자의 지역에서 최선을 다해 수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점 유념하시고 행정에 착오가 없도록 하십시오- 거만한 장관이라는 자가 말을 마치고 한 잔을 손에 들자 모두 따라서 술잔을 들어댄다. 대통령을 이박사라고 부른다. 박사 호칭이 대통령보다 좋은지 높은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이박사라 부르고 있다. 장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상주군수가 조용히 입을 연다. -케서 디리는 말인데….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젤로 가는 만석꾼 집안이 김회장네하고 채시중 종가 아입니꺼?- 하고 둘을 보며 말한다. -까짓 만석꾼 집안에서야 기부금조로 돈 좀 내놓는다 케도 태평양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내는 것 맨치로 표도 안날 낍니더. 우짭니꺼? 나랏님도 카고, 장관님도 카시고. 지금 처해있는 지역 형편이 에룹다 보이 두 분한테 손 좀 벌리야 되겠심더. 김회장, 카고 채시중 어른!- 하고는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 그렇지. 이것들이 아쉬운 소리할 요량으로 무슨 귀한 분이니 젤로 가는 집안이니 떠들지 지프차도 안 태워주고 지들끼리만 팽하니 요정으로 달려온 것들이 무슨 지역 시찰이니 피해상황 집계니 하는 것은 핑계고 지금 요정에서 요리를 즐기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다. 채시중은 수염을 쓰다듬다가 나랏님이니 장관님이니 하는 말에 허리를 굽실거리더니 대뜸 -그럼요. 우리가 지역을 살피야지요. 카모, 지는 백만 환 내놓겠심더- 하고 허리를 곧게 세운다.
태섭은 귀가 번쩍한다. 백만 환? 큰돈이다. 지난번 신흥땅을 판돈이 사십만 환쯤 되었는데 그것이 대여섯 마지기였으니 백만 환이라면 논으로 따져보면 족히 열다섯 마지기는 되는 셈이다. 채시중 같은 촌부가 이렇게 덥석 먹이를 물고 호기를 내는 이유는 그들이 지극히 단순해서이다. 정치하는 자들이 내주는 것 하나 없이 그저 불러준다거나 들러준다거나 하는 것만으로 촌부는 위신을 세울 수 있으니 그 돈을 내놓고 뒷감당은 모두 땡볕에 논매고 밭 매는 농부들이 하는 것이다. 태섭은 난감하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참의원선거도 게을리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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