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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아이구, 내 정신 좀 보래이, 불을 지펴놓고서리- 장서방과 소향에미의 재회를 누구보다도 기쁘게 쳐다보던 대포아지매는 가마솥에 불을 넣어두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화들짝 정기로 들어간다. -소향이는 우떻습니꺼?- 소향이 소식을 묻는 소향에미의 얼굴이 장서방을 똑바로 쳐다본다. 곧 소향이 소식에는 내외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는것 이렷다. 간절하다는 것이다. 장서방도 무엇보다도 소향이 소식이 제일 궁금할 것을 알기에 시원하게 쏟아낸다. -몸도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지냅니다. 몸이 무거워진 것은 산달이 다가와서 그렇지만 집안사람들이 잘 돌봐주고 소향이도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듣고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인사말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소향에미는 지척에서 조석으로 같이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소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래예? 다행이네예. 쿤데 산달이 운제라 캅디꺼?- 어느새 둘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서 소향에미는 장서방의 얼굴에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물으며 장서방은 어색함을 녹이느라 다시 남은 술을 한잔 더 따른다. -저도 확실히 들은 바는 없습니다만 이런저런 눈치로 보아 동짓달 아니면 섣달이지 싶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소향이도 스스로 부끄러워서 입에 단 한 번도 올리지를 않았고 장서방도 누구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 짐작할 뿐. -예. 카모 힘이 마이 들 때네예- 하다가 비로소 씨받이로 보낸 딸에 대해 능청스럽게 말을 나누는 창피함이 소향에미에게 스며드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숙인다.
-국이 잘 말아졌심더. 드시이소. 시장하실 낀데- 대포아지매가 김치그릇과 옹기국밥을 들고 탁자로 와서 내놓고 둘을 번갈아보며 웃는다. -그래, 소향이는 우떻심니꺼?- 이미 소향에미와 말을 나누었지만 듣지 못한 대포아지매에게도 그것이 제일 궁금한 소식이다. 하지만 두 번 말 시키는 것이 미안스러운 소향에미가 대포아지매 옷소매를 붙잡고 작은 소리로 얼른 말한다. -잘 있답니더- 장서방은 숟가락을 들고 우선 허기부터 메워나간다.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국물이지만 하루 종일 지친 몸에 고기국물이 들어가니 그야말로 온몸이 녹아든다. -그래도 간간히 갱상도 드나들던 보살님이 소향이 소식도 전해주고 했는데 요새는 발길도 뚝 끊고 아 키운다고 꼼짝도 않하이께네 우리도 소향이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잘 오싰습니더- 대포아지매는 시원하게 국밥을 비우는 장서방을 보며 한마디 한다.
-안 그래도 운젠가? 소향이한테서 팬지가 와서 보살님 한번 오시란다고 했디만 아 땜시 못 간다고 하십디다- 소향에미가 털보무당을 말하고 있다. 국을 먹고 있던 장서방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보살이다. 나이가 이미 초로에 가까운 여자인데 난데없이 대포아지매 입에서도 또 소향에미 입에서도 애기 말이 나오는 것이 의아하다. -그 상주 문경에 드나들던 보살님 얘깁니까?- 김치 한 조각으로 입가심을 하며 물으니 -와 아입니꺼?- 하고 대포아지매가 답한다. -그 보살님이? 아를 키워요?- 흥미 있는 상황이라 대수롭게 웃으며 장서방이 묻는다. 하긴 사변 후로 고아가 천지에 깔렸으니 그중 하나쯤 데려다 키우는 것이 얘깃거리는 아니지만 먹고살기 힘든 시절인데 입 하나 더 건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또 아니었다. -울매 전에 장보로 나오시가 국밥 자시로 오싰을 때 보이께네 아가 제법 꼬물거립디더. 딸아라 카던데- 장서방은 속으로 그저 흥미롭게 생각한다. -쿤데 아저씨! 아들 맞겠지예?- 하고 대포아지매도 코를 바짝 들이밀며 묻는다. 장서방은 웃으며 나오는 트림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며 -제가 삼신할매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하늘이 하는 일을- 고개는 숙이고 있었지만 소향에미도 그 질문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서방을 보고 있었다. -보살님이 안 쿠더나? 아들이라고! 걱정 마래이- 하며 허리를 곧게 펴서 자신감을 보이지만 그야말로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소향이 헛고생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소향에미의 마음속에 든다. -다 잡샀십니꺼? 술 한잔 더 하실량교?- 대포아지매의 청을 쉽게 물리친 장서방은 녹아드는 몸을 눕히고 싶은 생각에 잠자리가 간절하다. -낼 아침에 다시 말씀 나누시고…. 오늘은 이만 여관엘 갈까합니다. 피곤하군요- -그래, 소향이 니가 여곽에 가서 방 하나 잡아디리고 온나. 쿠고, 낼 아침도 여 와서 잡숫고-
* * *
초저녁에 바느질하는 윗동네 여자가 다녀갔다. 그 자리에 소향이는 빠지고 광수에미와 큰아지매가 끊어온 감을 내놓고 무엇을 만들고 어떻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태풍 때문에 살림이 어려워진 사람들이라 그저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허리 굽혀 받는다. 광수에미는 그 와중에서도 마치 자신이 주문이라도 하는 양 턱을 치켜 올리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큰아지매의 주문이 광수에미에게 떨어졌다. -광목은 적어도 한 세 번은 푹 삶아야 되네. 양잿물 넣고. 행굴 때도 방망이질로 굵은 올이 풀리도록 두드려야 부드러워질 테니. 폭은 그대로 쓰면 되니 길이만 어른팔로 하나씩 잘라서 하면 돼- 애기 기저귀를 광수에미에게 맡겼다. 돈 주고 누구 시킬 수도 있는 일을 자신에게 시키는 큰아지매가 밉지만 돈을 아직 빌리지 못한 처지라 입을 꾹 다물고 그리 하겠다고 했다.
배내옷을 만든다, 포대기를 만든다, 요와 이불을 만든다 하면 임산부가 한없이 기쁠 일이지만 소향은 남의 집 제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에는 뱃속에 든 아이를 쑥 빼내주면 삼천포로 달려가서 꼬릿한 갯내음을 실컷 맡아보리라고 생각했는데 뱃속에서 아이가 꾸물대며 손으로 발로 배를 밀어붙이고부터는 자신의 심장 한 쪽이 아이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이다.
시월상달이 닫아놓은 방문을 훤히 비추고 있다. 장서방이 서울로 가서인지 웬지 무서움이 소향을 에워싸자 일어나 문고리를 잠그고 다시 눕는다. 담이 있고 대문도 있고 또 그집 방안에 있는데도 늘 있던 장서방이 저쪽 방에 없다는 생각이 소향을 그리 만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무언가 비몽사몽간에 들리는 듯하여 눈을 뜨고 귀를 세우니 문고리가 달각거린다. 그리고 아주 낮게 들리는 소리. -소향아. 내다- 후다닥 일어나 방문을 보니 달빛에 비친 남정네 그림자가 보인다. 멈춘 숨도 쉬지 못하고 정신을 가다듬어보니 말도 영감 목소리고 그림자도 영감 모습이다. 일단은 안도한 후 어쩔 수 없이 기어서 문고리를 벗기니 문이 밖으로 열리며 영감이 후딱 들어온다. -어휴, 인젠 춥다 추버- 하며 들어서는 태섭을 보니 소피 보러 나온 속옷차림이다. 자다가 소피 기운에 잠을 깬 태섭이 뒷간 가느라 나왔다가 휘영청 밝은 달에 하늘을 보다가 문득 아침에 눈에 띈 소향의 방문을 보고 안방에 들리지 않을 발걸음으로 소향의 방문을 흔들어댄 것이다. 소향은 옷을 오므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자리에 앉은 태섭은 괜히 방바닥에 손을 대며 -안 춥나?- 하고 소향을 쳐다본다. 소향은 난데없는 태섭의 침입으로 잠이 확 달아났다. -괘안아예. 와예?- 왜 묻느냐인지, 왜 왔느냐인지 둘 다를 묻는 듯한 소향의 질문에 태섭이 못 올 데를 온 듯 느껴진다. 그래도 무언가 체면은 차리고 가야될 성싶어 -군불이라도 떼고 자나 해서- 하며 소향의 얼굴을 본다. 아까 문고리를 흔들 때만 해도 음심을 품었는데 지금 자신을 보는 소향의 얼굴은 영 그게 아니다. 입맛을 다신 후 그냥 일어서서 허리춤을 움켜잡고 고개를 숙여 나와 고양이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벌렁 누워버린다.
* * *
빈속에 들어간 술과 고기 국물 탓에 장서방은 세상 모르고 잤다. 밖이 시끄러워서 눈이 떠진 장서방은 천장에 보이는 서까래가 노란색으로 아주 잘 말랐다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물이 좋길래 한 마리 샀지. 요새는 대구철이 아인데 우짜다 한 마리 잽힌 모양입디더- 말소리가 귀에 익다. 대포아지매다. 어찌 소향에미 대신 대포아지매가 여곽에 왔는지 알만도 하다. 그래도 풀어헤치고 장사하는 대포아지매가 죽은 서방 뒤로 하고 아이들 키우는 소향에미보다는 여곽에서 잠자는 남정네 깨우기가 쉬웠을 것이다. 옷을 벗지 않고 잔 장서방은 문을 열어젖히고 인기척을 낸다. -오셨습니까? 제가 늦게까지 잤군요- 하자 대포아지매는 대구 한 마리를 높이 치켜들어 보이며 -오늘 아침에는 국밥 대신 이놈으로 할랍니더. 퍼떡 가입시더- 하며 웃는다. 달랑 가방 하나뿐이라 문을 나서면서 머리만 대충 쓸어 올리고 대포아지매를 따라 국밥집으로 향하는데 벌써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으로 봐 장날이 분명하다.
-오늘이 장입니까?- -예, 가을빛이 좋아서리… 어물들이 좋은 기 마이 나왔으이 소향이네도 바쁘겠네. 오늘- 하며 이전 저전을 휘휘 둘러보며 육중한 허리를 이리저리 재껴가며 걷는 아지매 뒤를 장서방도 느릿느릿 따라 걸어 국밥집에 도착하니 소향에미가 정기에서 분주하다. -야야, 니는 점방 안 지키고 여서 뭐하노?- 하며 대포아지매가 나무란다. -숙향이가 있습니더. 아침이라도 거들어야지예- -내가 포구에 지나다가 철이 아인데도 보이길래 대구 한 마리 샀다. 이걸로 국 끼리가 우리 같이 묵자. 내가 하꾸마. 니는 이따 내가 부르면 오고. 가거라 퍼떡!- 하며 재촉한다. 소향에미는 쭈뼛쭈뼛하며 앞치마에 손을 감싸고 나오면서 -그럼 이따가 아지매 내 좀 있다 오께예- 하고 서둘러나가는 모양새가 장날이라 점방을 비우기 어려움이 분명하다.
장서방도 -아지매, 저도 장구경이나 하고 오겠습니다. 천천히 하십시오- 하자 -그라이소, 국 끼릴라모 좀 있어야 됩니더. 갔다오이소- 하는 대포아지매의 말을 뒤로 하고 장 구경을 나섰다. 역시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의 장터는 달랐다. 서울에서도 볼 수 없던 문경이나 함창이나 점촌에서도 볼 수 없는 여러 가지가 널려있다. 어구들하며 각종 건어물은 물론이며 생활에 쓰이는 잡기들이 여기저기에 쌓여있는데 문득 북치며 장구 치며 타향살이가 서글프게 나오는 라디오를 틀어놓은 화장품 장사치가 보인다. 분도 가지가지 통에 담겨있고 여러 가지 알지 못할 기름이 유리병에 담겨있고 구리무통도 보인다. 광수에미가 얼굴에 바르면 좋다는 뭔가를 사다달라던 생각이 떠올라 발을 멈추고 들여다보니 장사치가 달려든다. -옙! 뭣을 찾으십니까? 다 있습니다. 다!- 말소리가 이 지역이 아님을 장서방도 알 만하다. -여자들 얼굴에 바르는 구리무도 있는교?- 우습게도 자신이 경상도 사투리를 묘사하며 묻자 장사치는 당연하다는 듯 -뭘로 드릴깝쇼? 좋다는 미제도 있고 일제도 있고 한국에서는 제일로 가는 락희구리무도 있습니다. 마님이? 아님 따님이?- 화장품에 대해 무지한 장서방이라 딸인지 마누라인지 묻는 장사치의 물음에도 상관없이 무엇을 살까하다가 그래도 미제로 사기로 했다. -그 미제라는 거 한 번 봅시다- 제법 비싸게 준 것이라 생각하지만 두 개를 산 장서방은 하나는 광수에미에게 그리고 또 하나는 소향에게 줄 심산이다. 잊고 있던 주문을 마침 장구경하면서 사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 들었다.
돌아오니 이미 소향에미와 대포아지매가 탁자 위를 가득 채웠고 기다리고 있다. 뚝배기에 담긴 김이 슬슬 스리는 대구탕이 보기에도 좋다. -어서 드시이소. 식기 전에- 하며 소향에미가 수저를 챙겨 내밀고 체면 차릴 것 없이 장서방이 덥석 밥과 국을 싹 비웠다. -이건 좀 무거워도 들고 가이소. 줄 기 별로 없심더- 하며 소향에미가 한쪽으로 보따리를 밀어낸다. 대포아지매는 큰소리로 소향에미를 대신해 -야가 소향이 아 놓고 먹으라고 미역하고 또 뭐꼬 거 암튼 건어물들 샀심더- 장서방은 웃으며 -그럼요. 무거울 게 뭐 있습니까? 당연히 전해드리지요. 그리고 소향이는 정말로 잘 있으니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괜히 제가 들려서 폐만 끼쳤군요. 그래도 소향이 잘 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드리려 왔답니다- 진심이었다.
-무신 말씸입니꺼? 운제든지 오이소. 카고 소향이한테도 우리 잘 있다고 전해주이소- 하는 과정에 점방 문이 열리면서 소란스럽게 들어서는 여인이 있다. -무신 냄시가 이리도 좋노?- 탁자에 앉은 셋이 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서방도 눈에 익은 그 보살이라는 여자다. -이이구, 오십니꺼. 장 보러 나오싰구만- 대포아지매가 일어서서 여인이 안고 있는 포대기를 살포시 들추며 안을 본다. -가루우유 좀 살라고 안 나왔나. 쿤데 없네. 오늘 미제 장사가 안 나왔다. 좀 있다 나올란가?- 털보무당은 아직 장서방을 못 알아보고 빈자리에 앉는다. -아가 얼굴이 마이 살아났네예. 인제 잘 묵습니꺼?- 하는 대포아지매의 말과 함께 아기의 울음소리가 포대기 속에서 새나오는데 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다. -지도 살라고 하는지 묵긴 묵는데 오죽 하것나? 젖을 무야 되는데 그 가루우유를 믹이니- 하며 털보무당은 연신 아기를 얼른다. -비워났던 집이라… 손볼 것도 있을 낀데. 인제 날도 추버지고… 우짭니꺼?- 소향에미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털보무당은 대수롭게 -괘안타, 니 덕에 그래도 지붕 가리고 안 사나?- 하고 웃으며 좌우를 돌아보다가 비로소 장서방을 보았다.
-이기 누군교? 그 태봉에서- 하고 털보무당이 동그랗게 두 눈을 뜨자 장서방이 먼서 인사를 한다. -예, 김씨 종가에 머슴 사는 사람이지요. 안녕하셨습니까?- 하자 무당은 당황하는 듯하더니 -내 정신 좀 봐라. 아 미길 우유는 안 사고 여서 이카고 있다. 지 먼저 일납니더. 천천히 가시이소- 하고 내빼다시피 한다. 영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는 무당을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만 별로 관심두지 않는다. -지난번에 보살님이 아를 하나 델고 와서 살 집을 하나 구한다고 해서 소향이가 지가 살던 덕호집을 내놨심더. 어차피 빈집이라 다행이제. 뭐- 대포아지매의 말이 장서방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쿤데, 니는 그거 그저 살라고 준 거가? 아니모 돈 받고 판 기가?- 대포아지매가 묻지만 소향에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장서방을 향해 -소향이에게 여는 아무 탈 없이 지낸다고 해주이소. 그저 몸 성하게 있다 오라고- 하고 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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