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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태섭은 비록 장서방이 자신보다 그저 한두 살 아래의 사내지만 단 한 번도 소향이에게 정답게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곱잖게 본 적이 없는데 막상 오늘 눈으로 보니 괜히 마음속에 대꼬챙이가 솟아오르는 듯하다. 하지만 어젯밤에 지서에서 들은 말과 그동안의 장서방의 사람 됨됨이를 생각하면 저놈이 남의 여자를 마음속에라도 품을 놈은 아니겠거니 하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서방의 얼굴을 보며 다리를 꼬고 바로 앉는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딱히 고할 일도 없고 또 김천에서 석방된 것도 종가에서 힘쓴 일이 아니기에 입 밖에 내지 않고 그저 인사만 한 장서방이지만 한편 마음속에는 지서를 통해 어쩌면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네 출타한 동안 태광이하고 마을사람들 모아서 자네가 제시한 그 일들을 전했소. 뭐 저거들한테 손해되는 일이 아이고 다 득이 되는 일이 되이께네 좋아하지만 자네가 명심하고 진행할 거는 달란다고 다 주지 말고 분명히 용도나 양을 확인하라는 말일세. 특히나 노름이나 기집질 하는 자가 있으모 그런 놈은 아예 알곡 하나도 주지 말고 돈도 한 푼도 주지 말아야 된데이!-
자신이 떠나있는 동안 겨울을 날 수 있는 방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말에 장서방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일 하십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확인하고 분명히 다짐받고 지출을 한 후에 상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쿠고 그 송아지 말인데. 정말로 탈 없겠나?- 그렇게 묻는 태섭의 내심은 돈 걱정 때문이다. 소작꾼들 모두 송아지를 원할 테고 그 많은 소를 사들이자면 자금이 보통 지출되지 않을 텐데 지난번 채시중이 내놓겠다고 한 백만 환을 맞추어 주느라고 이미 금융조합에 빚이 늘어난 상황이다. -물론 키울 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꼭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만 사주는 것이 원래의 종가의 목적이니 어렵더라도 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키울 여력이야 다 있다 할 기고…. 또 동네에 형편이 나은 사람이 오데 있노?-
말하는 태섭은 사뭇 부정적이다. 장서방은 물론 돈 때문에 일어나는 그런 태섭의 속내를 정확히 모르지만 뭔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은 감지하고 -종가의 일입니다. 또 종가의 돈이고요. 저는 그저 소작꾼들에게 힘든 겨울을 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자는 뜻에서 말씀드린겁니다. 결정은 종가에서 하셔야지요.- -태광이가 그 자리에서 덥석 말을 내놓는 바람에 안한다고 할 수도 없고, 참!- 하며 혀를 찬다. 장서방은 더 보탤 말이 아무것도 없어 그저 방바닥의 재떨이 위에 놓인 담배꽁초를 보니 반쯤 태운 담배가 수북하다. 돈 있는 자들은 담배도 건성으로 피우는구나 하는데 태섭이 -어제 김천에 전화를 했디만 자네가 방금 나갔다고 쿠데. 암튼 별일 없시 왔으이 됐네- 한다. 자신이 장서방의 수감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밝히는 정도로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나왔는지 알지만 모른 척한다는 정도로 태섭은 말한다. -예, 괜히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별일 아니라서 그냥 나오게 되었답니다- 장서방도 그 정도 선에서 넘어가고자 쉽게 말한다.
-쿠고- 또 무슨 할 말이 있는듯하던 태섭이 뜸을 들이다가 어렵게 이어간다. -겨울에 무신 바쁘거나 큰일이 있는 것도 아이고 해서 하는 말인데 자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내년 봄에 있는 선거가 인제 코앞 아이가? 자네도 나름대로 이 근처에서 머문 지가 상당히 됐제? 그라이 집안일이다 생각하고 여기저기 선거운동 좀 하게. 비용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게네- 하면서 장서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태섭의 마음속에 감찰실장과 친구 정도의 사이라면 선거에 제법 써먹을 용도가 있다고 여긴다. 그말을 들은 장서방은 한숨이 나온다. 송철이에게서 들은 바로는 선거가 불명확하다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허공에 돈을 뿌려대는 태섭이 안타깝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말할 내용도 아닌 듯싶어 -미력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고 만다.
* * *
정기에서 차리다만 점심상은 뒷전으로 하고 소향은 장서방이 준 보따리를 풀어헤쳐 보니 말린 건어물이 가지가지다. 꼬리하게 풍겨 나오는 냄새에 눈을 감고 음미하자니 삼천포 바닷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파도소리가 철벅거리며 꼬들꼬들하게 익은 생선을 손으로 쭉쭉 찢어주던 엄마가 눈에 선하다.
문득 장서방이 한말이 생각나서 보따리를 이리저리 헤집어보니 한쪽 귀퉁이에 종이에 쌓인 것이 있다. 요깡이다. 분명히 숙향이가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것이지만 돈이 없어 그저 남이 먹는 것만 보고 침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 종이를 벗기고 한입 덥석 물어 오물거려본다. 달다. 그리고 녹아내린다. 마치 봄 햇살에 내민 겨울 얼굴 같이 서걱거리지만 입속에서 풀어져버린다.
-맛있냐?- 장서방의 웃는 얼굴을 놀라서 쳐다보는 소향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숙향이를 봤지예?- 하면서 무거운 몸을 부뚜막에서 일으킨다. -그래, 이름이 숙향이라 하더라. 너 바로 밑이지?- -예, 갸는 이쁩니더. 지보다도. 글치예?- 하며 웃는다. 장서방은 그렇게 묻는 소향이 세파에 시달리느라 예쁨도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소향을 보면서 -너희집 식구들은 다 이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아침도 안 먹고 오느라 배가 고프네- 하고 정기를 휘둘러보자 소향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맞심더, 지도 무신 정신을 이렇게 놓고 있는지 점심 채리다 말고- 하면서 몸을 빨리 움직이려 하지만 눈에 띄게 굼뜨다.
소향이 아직 남아있는 아궁이의 숯을 긁어내어 장서방이 가지고 온 고기를 올렸다. 장서방은 불 옆에 앉아 굽기 시작하고 소향은 이것저것 반찬을 상위에 올리며 말을 주고받는다. -우리 어무이는예?- -응, 잘 계시더라, 장사도 잘되는 모양이고- 하지만 장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물어본 적도 없는 장서방이다. -국밥집 아지매도예?- -그래! 너 얘기 많이 물으시더구나, 그런데, 삼천포에서 그 무당이라 했나? 보살이라 했나? 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래예? 보살님 말입니꺼?- -그래, 전에 이 동네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데 그 사람이 갓난애를 하나 키우더라- -예? 애기를예?- 하고 허리를 펴고 이마에 손을 올려 머리를 쓸어 올리던 소향은 눈을 몇 번 껌벅거리더니 아무 말도 않고 상위의 그릇들을 정리하더니 -아저씨예, 이거 좀 들어다 주이소- 한다.
상이 두 개다. 장서방은 몸이 무거운 아이한테 상을 두 개씩이나 보게 만드는 종가식구들이 미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큰아지매는 혼자 밥상을 받게 되었고 태섭이도 마누라 인상 보지 않고 밥 먹는 것이 편하게 되어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늘 밥상이 하나는 안방으로 또 하나는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소향이를 대신해 상을 들인 후 장서방은 부엌바닥에 소향이와 함께 쭈그려 앉아 밥을 먹는데 소향이 구운 생선을 발라서 장서방 밥그릇 위에 올려주면서 이것은 무슨 생선이고 저것은 무슨 생선인지 설명까지 덧붙이고 자신은 머리와 뼈에 붙은 살점을 훑어먹는다.
* * *
광수에미는 마음이 불편하다. 괜히 광수나 재수에게 큰소리가 나오고 서방한테도 쓸데없이 신경질을 부리곤 한다. 도무지 그 여편네가 어떻게 오라비 만나는 걸 보았는지 손을 붙들고 울기까지 하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분명히 손을 잡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는데…. 혹시 떠나는 오라비 때문에 자신이 정말로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자 이제는 창호에미가 틀림없이 보았다고 믿기 시작한다. 이 일을 어찌 한다? 오라비라 하면… 그럼 왜 사람들 눈을 피해 뒷단에서 만나냐고 할 것이고 아니고 딴 남정네라 하면 더욱 후미진 곳에서 만난 것이 이상해질 것인데. 김장거리를 준비하느라 고추 꼬다리를 따면서 정신은 온통 딴 데 있다. 다행히도 고구마밭 한쪽에 심어놓은 배추와 무가 태풍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자라서 김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늘 하듯이 종가에서 김장을 담지만 모든 준비는 자신이 한다. 특히나 올해는 소향이조차 몸이 무거워 아예 일을 시키지 말라는 안방의 주문으로 고스란히 혼자 하고 있는데 그 입 싸고 말이 험한 창호어마이가 목격을 했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미리 입을 막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우매한 광수에미의 머릿속에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지금 끙끙 앓고 있다.
-아지매!- 하는 소향의 소리에 문을 열면서 한바탕 재채기가 터져 나온다. -에치! 아이구 꼬추 땜시 맵다. 에취!- 연거푸 두어 번 나온 재채기 때문에 콧물이 코끝이 달랑거려도 그걸 모른 채 -춥다, 들어온나. 와?- 하는데 소향은 들어올 생각 없이 -아이라예, 이거 드릴라고예- 하며 들고 온 생선을 마루에 놓고 돌아선다. 그러면서 소향이 -광수하고 재수는 여태 학교서 안 왔지예?- 하고 묻는다. -올 때가 됐제? 점심 무운 지가 운젠데- 하던 광수에미는 문득 소향이라면 무슨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소향이가 유일하게 자신과 오라버니의 일을 아는 사람 아닌가? -이따 가들 오민예. 지한테 오라 칸다 하이소. 줄 게 있심더- 숙향이 보내온 맛있는 요깡을 하나씩 나누어줄 요량이다.
-야야, 니, 그건 그렇고. 이리 좀 들어와 봐라. 내 할 말이 있다- 하고 열린 문을 더 활짝 열어젖히며 또 재채기를 한다. -뭔데예?- 하며 마루에 올라서는 소향이 아예 두 손 두 발로 기어서 올라간다.
-니 말이다. 알제?-
-아지매. 그때 말입니더. 을수이예. 을순이 죽을 때예, 아를 낳기는 했어예?-
-예? 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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