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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창호어마이가 오라버니 사건만 입에 올리지 않았어도 당당히 걸어 들어가 물었을 텐데 괜히 제 발 저린 광수에미는 그냥 돌아온 것이다. 겨울마다 벌어지는 노름판이라도 벌어진 걸까? 그동안 태광이 몇 번은 끼어들었지만 단 한 번도 꾸루와이와는 한자리에 있지는 않았으니 설마 싶었다. 종갓집 아들이라는 바람에 그래도 태광은 심하게 노름판을 전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노름은 안하겠지. 그래도 왜 돌아오지 않는지는 영 모르겠다. 방안에서 나는 소리들로 보아 싸움질하는 것은 아니니 일단 마음을 놓기로 하고 팔을 베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그냥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후다닥 잠결에 일어나 방안을 보아도 서방은 없고 아이들만 이불을 걷어찬 채 자고 있다. 창호지에 먼동이 비치고 있다. 화는 나지 않지만 불안한 마음이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 또 문을 열고 나선다. 이번에는 들어갈 요량이다.
창호네는 아침인데도 조용하다. 밤새 정기를 들락거린 창호어마이도 새벽쯤에는 방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을순이방에 장을 편 골패꾼들은 열기를 더해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나무에 패인 구멍 세기에 정신이 나가있다. 짝 맞추기 패를 돌리고 있다. -와~ 오늘 와이카노? 정말로. 뭐 되는 기 없노?- 태광이 패를 방바닥에 내리치며 허탈하게 지껄인다. 물주가 새 패를 돌리는 동안 주전자를 들어 술을 잔에 부어보지만 빈 주전자다. 상위에는 김치조각만 남았고 먹다 남은 닭 뼈다귀만 수북하다. 창호어마이는 버버리집에서 한 마리 잡아다가 볶아 내놓은 닭과 술값, 그리고 복채도 이미 챙길 대로 다 챙긴 후에 방안에 잠을 자고 있으니 더 나올 것도 없다.
태광의 속이 탄다. 얼마나 잃었나? 꾸루와이에게 꾸고 또 꾸고 한 것이 이미 쌀 두어 가마니 값은 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만 잃어도 뒷감당을 못해 나가떨어지고 말았는데 지전이 주머니에 있는 꾸루와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태광은 태광대로 체면치레하다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원래 노름은 뱃심이 좋거나 아니면 주머니가 불러야 이기는 법인데 꾸루와이는 일전에 태섭으로부터 챙긴 지전 때문에 넉넉한 주머니 사정이라 여유롭게 패를 주고받고 돌리지만 태광은 어느새 잃고 난 후의 열기가 얼굴을 뒤덮고 말았다.
-아재, 만 환만 더 내 놓으이소- 태광이 꾸루와이를 보며 청한다. 패를 손에 쥔 꾸루와이는 태광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패를 펴가는 손에만 집중하며 -카모 전부 얼만데?- 한다. 셈을 모를 리 없는 꾸루와이는 태광의 입으로 듣고자 묻는 것이다. 타성바지인 꾸루와이는 마누라가 종친집 여자라 자연스레 한동네 사람이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영 남남이다. 하지만 태광은 연장자인 그를 필요에 따라서 아재라 부른다. 속이 훤히 보이는 꾸루와이의 콧구멍에 밤새 호롱불에서 나온 그으름이 시커멓게 달라붙어 있는 것까지도 보일 정도로 날이 밝았는데 태광은 집이고 뭐고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저놈에게 돈을 잃었다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두어 가마니 쌀값을 어찌 물어내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울매는 뭐가 울매요? 다 해봐야 사만 환이구만- 억지로 대수롭게 말하는 태광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속으로는 큰돈이라는 것을 안다. 돈도 내놓지 않은 채로 앞으로 돌려진 패를 집어 들려던 태광을 향해 꾸루와이가 -돈을 내놓고 패를 집어야지- 하며 넌지시 책망을 해대자 태광이 눈을 뒤집는다. -뭐요? 내가 이깟 몇 푼 땜에 안 주고 떼묵을까 카요?- 험상한 얼굴을 하지만 원래 태광의 얼굴은 험상한 얼굴이 아니라 그저 잔뜩 오른 열만 비추어진다. 그렇게 돈 앞에 장사 없고, 가난하고 힘없고 희망 없는 나약한 남정네들이 날이 밝는 것도 상관치 않고 골패를 손에 쥐고 제살 뜯어먹기를 하고 있다.
광수에미는 안방에다 대고 조용히 부른다. -창호야- 불러도 새벽녘에 곯아떨어진 창호어마이가 대답이 없자 다시 부르기가 건넌방에 있는 남정네들 귀에 거슬리 것 같아 그냥 마루로 올라서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머리가 북대기 같이 얽힌 채로 잠에 곯아떨어진 창호어마이를 흔들어 깨운다. -일나봐라. 내다- 창호도 세상 모른 체 옆에서 자고 있다. 그래도 눈을 비벼대며 일어난 창호어마이는 광수네인 걸 알고는 -와?- 하고 잠결에 묻고는 또 쓰러져버린다. -건넌방 가서 우리 아 아바이 좀 나오라 케라- 그러나 창호어마이는 그냥 잠속으로 빠져버린다. 그래도 광수어마이는 계속 어깨를 흔들며 재촉을 하자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꽥 지른다. -니 서방 니가 찾을 끼지, 와 내보고 카노?-
일전에 광수에미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창호네는 꺼릴 것 없이 인상을 써대며 광수네를 노려본다. 광수에미는 어이가 없다. 한동네에서 빌붙어 먹고사는 주제에 비록 둘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히 종갓집 며느리보고 하는 태도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행동이다. -니? 지금 뭐라 켔노? 말이모 다 하는긴 줄 아나? 니 서방? 언제부터 니 그카고 살았노?- 눈을 부라려 보지만 할 말이 그것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내는 모리겠다. 니가 나오라 카던지 들어가라 카던지 맘대로 해라- 하고 창호어마이가 휙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써버린다. 화가 꼭지까지 치솟지만 광수에미는 이불속에서 숨만 들썩거리는 창호어마이에게 딱히 대들만한 이유도 없자 그냥 씩씩거리며 방을 나와 마당에 섰다. 방안에서는 태광이 관자노리를 벌렁거려대며 골패를 쥐어짜대고 방문 밖에서는 동네에서도 내놓은 창호네에게서 말로 한 방 얻어맞은 광수에미가 씩씩거리고 있다. 광수에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방문을 왈칵 열어젖힌다.
-광수아부지, 고마 가입시다- 찬 공기가 확 밀려들어오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방밖에 있는 광수에미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기가 찬 것은 태광이다. 안 그래도 끗발이 떨어질 대로 다 떨어져 오는 패마다 맞는 짝이 없는 지경인데 난데없이 마누라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니, 이기 뭐꼬? 퍼떡 문 안 닫나?- 꾸루와이를 보고 지은 험한 얼굴보다 한층 더 험한 얼굴로 변한 태광이 마누라를 보고 겁을 준다. 그러나 광수에미도 방안의 광경을 보고는 물러서고 싶지도 않다. 그곳에는 태우도 보이고 실쭉하게 웃어 재끼는 꾸루와이며 난장판이 된 을순이 방에 서방이 같이 끼어들어 앉았다는 것이 화가 난다. -뭐합니꺼? 지금, 날이 샜구만, 가입시더- 하고 문고리를 잡고 서방을 닦달한다. 태광은 엉덩이를 들썩거린 후 마누라가 잡고 있는 방문을 낚아채고 확 닫아버린다. 그러나 광수에미는 도로 열어젖히고 더 큰소리로 태광을 노려보며 독 오른 소리로 앙칼지게 재촉하고 연이어 태광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마누라를 문안에서 확 밀어버린다. -이기 서방을 뭘로 알고 아무데서나 지랄이고? 가라모 갈 끼지- 하고는 땅바닥에 넘어져있는 마누라를 노려보고는 문을 닫아버린다.
-행님, 와카요?- 그중 겨우 태우가 한마디 할 뿐 죄지은 사람들처럼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광수에미는 땅바닥에서 전해오는 찬 기운에 정신이 든다. 절구통 같은 허리를 일으키기도 쉽지는 않지만 동네 남정네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분이 무거운 몸도 번쩍 일으켰다. -가자 카이 이기 뭡니꺼?- 그래도 남들 앞이라 서방에게 험한 말은 할 수 없는 광수에미는 하소를 했다. 그러나 이미 밤새 녹아내린 두어 가마니 쌀값에 체면이고 마누라고 보이는 게 없는 태광은 이제는 아무 말도 없이 방밖으로 나오더니 다짜고짜 마누라를 두드려 패댄다. -예팬네가 이카이 밖에서 되는 기 없다- 악쓰는 광수에미의 말은 태광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끌리고, 맞고, 뒹굴고 만다.
요즘 소향은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지만 잠은 왜 그리 쏟아지는지 또 헛간 출입은 왜 그리 잦은지 괴롭기만 하다. 심지어는 목이 말라도 물 마시기가 겁이 날 정도로 오줌을 자주 누는 통에 잠을 자다가도 깨어서 요강을 찾곤 한다. 어제도 초저녁부터 잠에 취해 자면서도 잠결에 오줌을 참아가면서 자다가 새벽나절인가 비몽사몽간에 아랫도리가 축축한 걸 느끼고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세상에, 오줌을 쌌다. 다 큰 여자가 오줌을 지린 것이다. 아무도 볼 사람이 없음에도 닫힌 방문을 다시 보고는 소향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난감한 일을 어찌 하나 고민을 하다가 이불호청을 뜯어내고 옷을 벗어서 둘둘 말아서 챙겼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방을 나서지는 않을 테니 얼른 옷가지와 호청을 빨아 널 요량으로 정기로 갔지만 막상 집안사람들이 먹기도 하는 물독에 있는 물을 퍼서 자기가 싼 오줌거리를 빤다는 것이 꺼림칙하다. 궁리를 하다가 기어이 무거운 몸에 물동이를 이고 샘으로 나섰다. 한 동이만 이고 오면 다 해결될 것이라 동네여자들이 모여드는 도랑까지 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모처럼 오는 샘가다. 장서방이 하루에도 두어 번씩 물지게를 지는 통에 정기의 물독은 항상 물이 가득하여 소향이 자신이 샘가에 올 일이 없다. 골목을 돌아 샘가에 다다랐을 때 샘 바로 맞은편 창호네에서 난데없는 여자의 악쓰는 소리가 들린다.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저렇게 여자가 큰소리를 내는가 의아하여 귀를 기울이니 그곳은 을순네집이고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바로 작은아지매 목소리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귀를 쫑긋 세워 들어본다. 태광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잡고 악에 돋은 광수에미의 욕지거리까지 귀에 들린다. 동이를 땅에 내려놓은 채 소향은 뒤뚱거리며 창호네 집으로 가자 마당에 쓰러진 광수에미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태광은 발길질을 해댄다.
-망할 년, 여가 오데라꼬 와서 지랄이고? 가라모 갈 일이지 오데 대가리를 디밀고 주디를 지끼노?- -그래, 직이라, 직이봐라- 이미 찢어진 태광이 합바지 가랑이 밖으로 허연 살이 보인다. 사람들은 말리듯 하지만 둘이 엉겨 붙은 상황이라 제대로 떼어놓지를 못하다. 두어 명은 슬금슬금 뒷발질하여 삽짝 밖으로 가버리고 꾸루와이는 아예 내다보지도 않고 태우조차 문고리를 잡고 그러지 말라고 말만 하고 있고 창호어마이도 언제 나왔는지 마루위에 서서 큰소리로 -여서 와이 카노? 너거 집에 가서 카던가!- 할 뿐이다. 태광의 분이 엉뚱하게 마누라에게 튀어버린 꼴이었고 창호네로 인한 광수에미의 분도 엉뚱하게 서방을 향해 뿜어져버렸다.
-아이고 아지매예, 와이 캅니꺼?- 소향은 급히 광수에미의 팔을 제지하며 안아버린다. 소향이 안중에도 없는 광수에미는 여전히 서방을 올려다보며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 하자 태광이 잡힌 바지를 휙 뿌리쳐 다리를 뽑아버리자 소향과 광수에미가 동시에 뒤로 벌러덩 나가떨어져 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광은 삽짝을 나서 집으로 가버리고 소향이 뒤로 넘어지면서 땅에 머리를 되게 부디친 탓에 정신을 차리고자 팔을 허우적거린다. 광수에미는 남들 앞에서 서방에게 당한 것이 창피하고 억울하고 분하여 상황을 모면할 핑계를 찾아야 할 판인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옆을 보니 소향이 불룩한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워있지 않는가? 정신이 번쩍 난 광수에미는 소향을 붙들고 -야, 야, 니 괘안나?- 하며 부축을 하지만 소향이 실눈만 뜰뿐 힘이 없자 겁이 더럭 난다.
-누구 좀 나와봐라. 아 죽겠다. 퍼떡!- 방안에다 지르는 소리인지 허공에다 하는 소리인지 그저 큰소리로 악을 쓴 후에야 방안의 태우가 비실거리며 나와 광수에미 옆으로 왔다. 태우가 소향을 둘러업고 뒤에는 머리가 산발이 된 광수에미가 뒤따르고 종갓집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광수에미는 비로소 큰일을 냈구나 하고 겁이 난다. 작은 소리로 태우를 향해 -안에다 눕히거라- 하며 소향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며 안방과 건넌방을 동시에 보는데 일치감치 깨어있던 큰아지매가 인기척을 못 들을 리가 없다.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며 뜰을 보던 큰아지매는 눈이 커지며 -동서, 무슨 일이야!- 하며 아직은 속치마 바람인데도 대청으로 나와 태우의 등에 업힌 소향과 광수에미를 놀란 눈으로 번갈아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우는 방안으로 소향을 들인 후 어느새 나와 있는 태섭과 장서방과 눈만 마주치고는 훌쩍 대문을 도망치듯 나와 버린다.
소향의 얼굴을 쓰다듬어대며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광수에미는 후회가 막심하다. 어느새 들어온 큰아지매도 경황이 없어 보인다. 얼마나 공들인 뱃속의 아이인데 새벽에 그것도 태우의 등에 업혀 들어왔다니 큰아지매는 어이가 없다. -동서, 무슨 일이야?- 앉아마자 소향을 어루만지는 광수에미에게 물어댄다. 소향도 큰아지매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난다. -그리 됐심더-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본 광수에미는 알만하다는 눈치로 대수롭게 여기지만 큰아지매는 어이가 없어 -어찌 오줌을 싼단 말이냐?- 하고 뱃속에 든 아이 걱정보다 경우 없는 여자노릇을 탓하고 있다. 소향은 창피해서 죽을 노릇이지만 자신의 몸을 누른 채로 괜찮다만 연발하는 광수에미 탓에 일어나서 이불을 감추고 싶어도 그리 할 수가 없다. 꼴은 엉망이지만 광수에미는 그런 큰아지매가 미운지 굳게 다문 입을 달싹 거리며 -뱃속에 든 아가 나올 때가 다 돼가이 오줌보를 울매나 눌릴 깁니꺼? 아를 안 낳아본 행님은 모립니더- 하고 책망을 하며 또 소향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다독인다. 무슨 일로 소향을 둘러업고 왔는지는 큰아지매도 광수에미도 잠시 잊은 채로 오줌 싼 일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 큰아지매도 순간 광수에미의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는지라 할 말이 없어 비로소 무슨 일인지 다시 묻는다.
그렇게 사건이 터지고 나서 태광이는 태섭에게 못 들을 소리를 실컷 듣고 마침내 송아지 구매에서도 손 떼라는 명도 함께 받았다. 광수에미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서방이 쌀 두어 가마 값을 빚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꾸루와이보다 태우보다 서방보다도 노름판을 제공한 창호어마이가 더 미워죽겠다. 그년 얼굴을 손톱으로 다 찢어내고 싶지만 돈은 서방이 잃었으니 마땅한 이유도 없다. 속만 부글거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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