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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소향은 잔뜩 부른 배를 하늘로 놓은 채 큰아지매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일어나보기라도 하려고 했지만 기운이 없어 도로 머리를 방바닥에 떨구고 마는데 옆에 있는 작은아지매는 어느새 코를 드르렁거린다.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진 큰아지매는 훤하게 밝은 봉창을 한번 힐끗 보더니 또 손바닥으로 광수에미의 허벅지를 후려갈긴다. -동서!- 벼락같은 소리가 깨웠는지 아니면 송곳이 찌르듯 전해지는 큰아지매의 손바닥 매운 맛 때문인지 광수에미는 화들짝 일어나지만 잠에 취해 정신이 없이 그저 고개만 휘휘 둘리며 무슨 영문인가 정황을 알아차리려는 얼굴이 영락없는 정신 나간 사람 모습이다. -지금 자네는 잠이 오나?- 매서운 눈으로 광수에미를 노려보지만 광수에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머리만 쓸어 올리며 아직도 얼얼한 허벅지만 어루만지다가 비로소 잠이 깨면서 전후 사실을 기억하는 눈치다. -케도 와 사람을 그리 때립니꺼?- 하면서 비로소 소향이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니는? 괘안나? 배 안 아프나?- 하며 따발총같이 물어대는 통에 소향은 대답할 겨를도 없다. 눈만 두꺼비같이 크게 뜨고 광수에미와 큰아지매를 번갈아 보며 편치 않는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원하고 있다. 모든 게 불편하다. 고쟁이도 벌컥벌컥 벗겨 내리는 작은아지매도 마냥 불편하고 남산만한 배를 내놓고 있는 자신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쳐다보는 큰아지매도 방에서 나가주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자네, 여기는 나한테 남겨두고 빨리 아침부터 챙기게나. 이러다가 덜컥 일이라도 터지면 집식구들 꼼짝없이 끼니 건너뛰게 생겼네. 빨리!- -행님도 참! 덜컥 일이 생기모 다행이지 모가 그리 큰일입니꺼?- 하며 또 핀잔을 시작한다. 큰아지매에게는 실제로 자기 집에서, 자기가 공들여 만들어내는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는 일을 아직도 그저 무슨 사건으로만 여기고 있다.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광수에미는 태연하게 머리를 고치고 옷을 매만진 후 심지어 소향에게 당부까지 한다. -배 안 아프나? 혹이라도 배가 아프모… 아이다! 내가 여 있을 낀데 모가 걱정이노? 니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삼신할매한테 정성이나 디리고 있거래이. 카고 행님요, 지는 도랑골에 기별 넣고 오겠심더- 하고 일어서자 큰아지매가 정색을 하며 -빨리 아침이나 해. 산파는 장서방더러 불러오라 하면 되지- 하고는 큰소리로 장서방을 부른다. 동네에서 산 한 모퉁이를 돌면 같은 마을이지만 도랑골이라 하는 떨어진 부락이 있고 거기에 산파가 있다. 이미 달포 전에 말을 전해놓은지라 부르기만 하면 오도록 광수에미가 만들어놓았다.
문을 열고 봉당에 있는 신을 신을 때 부르는 소리를 들은 장서방이 뒷단에서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나오며 광수에미와 눈이 마주치자 큰아지매 대신 광수에미가 시킨다. -장서방, 아저씨. 저 도랑골 가서 산파 좀 불러오이소- 장서방을 부르는 광수에미는 아직도 호칭에 대해서는 편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보아온 장서방의 면모들이 다른 머슴하고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기 때문에 덜렁거리고 허세 심한 광수에미조차 머슴인 장서방을 어렵게 생각한다. -지금이 몇 신데 여즉- 하며 큰소리로 솟을대문을 들어서던 태광이 마누라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고 그 뒤로 재수 광수가 줄줄 따라 들어온다. -엄마야, 밥 안주나? 학교 늦는데- 광수의 말을 듣고서야 거의 중천에 있는 겨울 해를 보고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걸 깨달은 광수에미는 황급하다. -오이야, 쪼매만 있거래이. 당신, 아들 델고 건넌방에 들어가 있으이소. 내 금방- 하고 정기로 뛰어가다시피 한다.
새벽이었는지 밤중이었는지 시각도 기억이 잘나지 않는 태섭은 아래채에서 소동이 일어난 후 선잠을 잤다.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라도 나는 태섭은 부산한 인기척이 궁금하지만 물어볼 체면도 없이 그저 무슨 소식이라도 들고 들어올 마누라를 기다렸지만 매정한 마누라는 아무 기별도 없이 다시 잠잠해졌고 그 틈에 자신도 눈을 붙였지만 다시 마당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목침에서 머리를 일으키고 앉는데 벌컥 열리는 문으로 태광이 들어오고 그 뒤로 조카들이 들이닥친다. -행님, 오늘 행님도 비로소 아 아바이 되지예? 좋은 꿈 꿨십니꺼?- 하며 빙긋이 웃는다. -안춥나? 이리 들어오거라- 태섭은 광수 재수를 보고 이불자락을 걷어주며 아랫목을 내주지만 태광의 말에는 아무 말도 안한다. 동생은 이미 십수 년 전에 겪었던 일은 자신은 이제야 경험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또 아직은 이르다는 뜻이다. 조용히 마음으로만 기원해야지 호들갑을 떨어대면 삼신할매가 노할 수도 있어서다.
-요새 우떻노?- 밑도 끝도 없이 태광에게 묻는 태섭을 태광은 눈을 올려 뜨고 무슨 영문이냐는 듯 되묻는다. -아, 그 동네일 말이다. 송아지하고, 구호미하고- 못 알아듣는 것을 탓하듯 퉁명스럽게 말하자 태광이 -아, 그거 말입니꺼? 다 잘됐심더. 아무 일도 없심더- 하고 대답하는 태광이 못 미더운 태섭이다. 자초지종 부연설명도 없이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반달 동안 시끄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노름판을 기웃거리던 몇몇이 태광의 앙심 탓에 송아지를 얻지 못하고 또 창호네집에서 사단을 경험한 광수에미는 동네사람들 중 노름판에 있던 집에서 곡식이라도 얻으러 오면 갖은 핑계로 곤혹을 치르게 한 탓에 자연히 시끄러운 소리가 동네에 일어나고 그것은 애초에 종가에서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진행이었기에 장서방의 말을 들은 태섭과 큰아지매가 태광과 광수에미를 불러 앉히고 크게 나무랐다.
선거를 앞두고 누구에게서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듣기 싫은 태섭은 당장 무마하기를 태광에게 주문했었다. 장서방이 앞장서서 또 소장터에 간 후 몇 마리의 송아지들이 동네에 풀렸고 광수에미도 큰아지매의 질책에 장부까지 만들어 일일이 기록을 해대며 곡간에서 나간 곡식의 양과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만 글을 모르는 광수에미는 밤마다 서방에게 입으로 전달하고 태광은 호롱불 밑에서 적곤 하는 것이다. -인제 몇 달 안 남았다. 니도 집안 생각해서 말 한 마디도 조심히 하고 발 한 걸음도 조심해서 디디라- 선거를 말하는 줄 태광도 금방 안다.
-쿤데 행님, 요새 이런저런 말이 있던데. 그기 사실입니꺼?- 무슨 말인지 궁금한 태섭은 -뭐가?- 하고 묻자 -신흥땅을 팔았다고 온 동네가 다 알지만… 얼매 전에… 행님이 또 잽히먹었담서요?- 태섭은 아무 말도 안하고 다리를 바꿔 꼬며 대수롭게 여긴다. 속으로는 그럼 그 송아지들은 무슨 돈으로 샀단 말이냐? 또 선거자금은 어디 땅속에서 솟아오른단 말이냐? 그런 심정으로 담배를 피워 천장을 보며 연기만 뿜어댄다. 사실 금융조합에서 큰돈을 빌렸고 땅은 판 것이 아니고 담보로 잡혀놓기는 했다. -니는 알 것 없다. 오데, 우리만 어렵나? 온 세상이 다 에로봐서 묵고 살기도 힘든데. 한두 해 농사만 하늘이 거들어주면 다 지나가는 바람 같을 끼다-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 하늘이 도와만 준다면 그깟 정도는 두 해 농사거리로도 충분히 변재할 것이고 또 하늘이 도와만 준다면 참의원선거에서 이길 것이고 그것은 곧 돈방석을 말하는 것이다.
큰아지매가 나가주었으면 하는 소향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큰아지매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소향의 배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순간 소향은 입이 딱 벌어지며 실낱같은 한줄기 그것도 아주 강한 고통이 배위를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순간의 일이어서 아! 하는 말조차 할 시간도 없이 그저 입만 벌린 채로 있었다. 그리고는 금방 너무도 감쪽같이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한 것이지만 그 순간을 큰아지매는 눈치를 챘다.
-왜?- 하고 큰 눈과 함께 한마디만 묻는다. 딱히 물어볼 만한 경험이 없는 큰아지매다. 하지만 분명 소향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차린 큰아지매는 소향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지만 소향은 마치 없었다는 듯 지나간 고통이 믿어지지가 않아 -아니라예. 괜찮아예- 하며 눈길을 피해 벽으로 고개를 돌린다. 큰아지매는 배가 아프냐는 동서의 질문이 기억나 -배가 아프냐? -하고 물어보지만 소향에게는 그 고통이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순간 자신이 잘못 느꼈던 일인지도 구분이 안될 만큼 순간적인 일이어서 -언지예. 괜찮아예- 하고 대답하고 만다.
국물이 뜨끈하게 서린 밥상이 따로 아래채에 들어왔지만 소향은 입맛도 없어 그저 쳐다만 보고 있는데 억센 광수에미가 숟가락을 쥐어주며 -무야 된데이. 케야 힘도 쓰지. 자, 자,- 하고 억지를 부리는 통에 마지못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큰아지매의 눈길 아래서 깨작거리기만 하는데 또 억! 하는 입도 다물어지지 않는 고통이 창자를 비틀었다. 소향의 손에서 숟가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본 광수에미는 소향의 팔을 움켜잡고 -아프나?- 하고 거의 고함에 가깝게 묻는데 또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벌어진 입이 아직도 다물어지지 않고 눈을 껌벅대며 고통을 기억해보고 있는 소향에게 -니, 운제 아프기 시작했노?- 하고 광수에미가 다그치자 소향은 그제야 입을 다물고 느릿하게 밥상을 뒤로하고 돌아앉으며 -아까 전에예- 하고 두 팔로 방바닥을 지탱하며 뒷짐을 짓는다. 큰아지매는 분명 자신이 물을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소향이 지금 광수에미가 물으니 대답하는 소향이 은근히 밉다. 마치 자신을 따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카모, 아직 멀었다. 와? 밥 안 묵노?- -안 물랍니더. 못 묵겠으예- 하는 소향의 대답을 들은 큰아지매는 속이 은근히 탄다. 자신이 얼마나 공들인 종손인가? 그런데 그 산모가 밥도 안 먹고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산파도 아직 없다. 안 먹는 밥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광수에미를 보고 -산파도 아직 안 왔는데- 하고 급한 마음만 있지 그 다음 말이 안 나온다. 광수에미는 밥을 입에 구겨 넣으며 듣는 둥 마는 둥 관심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큰아지매가 더 가소롭게 여겨져서 놀려먹는 중이다. 십수 년 전에 자신이 광수를 놨던 일이 떠올라 -행님, 아직 멀었심더. 오늘 중으로 나올라나 모리겠네예. 첫아라서리- 하며 볼 가득한 밥만 우물거린다.
장서방이 느릿걸음 하는 산파를 앞세우고 종가로 돌아온 것은 해가 거의 중천에 있을 쯤이다. 칠십이나 된 노파는 산파를 젊은 시절부터 해왔지만 나이도 나이 인지라 이제 그만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어디에서나 누구나 부르기만 하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종가의 부름은 특별한 것이다. 만일 아들이라도 받아내 주기만 한다면 비단옷 한 벌쯤은 떼놓은 당상일 테고 웃돈도 얻어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저 바람일 뿐 하늘이 점지해주지 않으면 다 공산염불이고 지전 한 장 겨우 손에 쥘 수도 있다.
-어떻는교?- 하는 말이 묻는 말인지 왔다는 인사말인지 불분명하지만 산파가 왔다는 것은 방안에 있는 모두에게 들렸다. -할매요, 오이소. 힘드싰지예?- 광수에미는 문을 열어젖히며 비켜서며 말하고 큰아지매도 앉은 채로 한쪽으로 자리를 내주며 돌아앉는다. 방안의 정경을 마당에서 지켜보던 장서방은 아직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픈 배를 채우러 정기로 들어간다. -보자, 우떻노? 배가 마이 아프나?- 산파가 소향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묻자 대답은 광수에미가 한다. -아까 전에 아프다 말다 하네예- 산파도 광수에미도 심지어 소향이도 지신을 뒷전에 두는 것이 내심 불편한 큰아지매는 방안에 있는 것도 편치 않지만 그래도 내 자식인데 내가 자리를 뜰 수는 없다 하는 심정이다.
-카모 더 기대리보자- 하더니 산파도 느닷없이 소향의 아랫도리를 들추어보는 통에 소향이 기겁을 한다. -야가 와 이카노?- 하고 정색한 얼굴로 산파는 소향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이불을 덮어주고는 비로소 큰아지매를 향해 돌아앉으며 -숯이며 고추며 좋은 걸로 마편해놓이소. 집안에 정성이 가득 하이 아들일 깁니더- 하고 웃는다. 큰아지매는 자신이 방안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던 참인데 마침 산파가 일러준 금줄에 걸어놓을 것들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예- 하고 작은 목례를 남기고 조용히 일어서서 나와 그냥 안방으로 들어와 버린다. 일단은 산파와 동서에게 소향을 맡겼으니 다들 경험 있는 자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안도감과 함께 몸이 늘어지는 것을 느낀다. 새벽에 쌓인 피곤이 몰려오는 중이다.
해가 서산에 걸려 광수에미는 또 정기에서 저녁을 끓이고 있건만 소향은 조금 더 잦아진 고통의 횟수만 반복될 뿐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이유도 없이 한줄기 눈물이 눈가를 적시며 삼천포 엄마며 대폿집 아지매가 방안에 함께 있어 주었다면 하는 생각뿐이다. 이제는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고통이 아니라 긴 밧줄을 잡아당기듯 굵고 무겁고 요동치는 고통이 창자를 뒤집는다. 소리도 마음대로 내지 못하는 소향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절로 입이 벌어지고 악이 튀어나온다. 땀이 젖어들고 누구의 손인지도 모르지만 움켜잡고 있다. 방안에는 작은아지매와 산파가 연신 소향의 아랫도리를 쳐다보며 소향에게 무어라고 이르지만 소향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어두워진 지도 오래 됐다. 저녁밥을 마친 태섭과 태광은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신음소리가 귀에 거슬려서다. 안방 큰아지매도 안방지기 노릇만 할뿐 자신이 거들 일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낮에 잘 익은 고추와 튼실하게 보이는 숯덩이를 골라 채반에 담아 장독대 위에 햇빛 보게 놓아둔 것이 유일하게 자신이 한 일이다.
장서방은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핀다. 가마솥은 이미 낮부터 물이 끓고 있는 중이지만 계속 불을 지피고 있다. 방안에서 악!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장서방도 흠칫흠칫 놀란다. 작은 고통이라도 소향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저 마음뿐이다.
자정도 지났다. 산파도 지쳤다. 광수에미도 연신 하품을 해대며 눈꺼풀을 비벼대지만 그렇다고 방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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