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여성의 재생산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검은 시위가 또 열렸다. 성과재생산포럼, 한국여성민우회,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등 15개 단체가 공동 주최한 이번 시위에는 시민 오백여명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진짜 문제는 낙태죄”라며,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외쳤다.
검은 시위 참가자들은 “인공임신중절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한 보건복지부의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이 철회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을 ‘낙태죄’로 처벌하는 형법(제27장 269조, 270조)이 존재하는 한, 국가의 처벌강화 정책이 있을 때마다 여성들의 몸은 언제든 볼모로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에서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를 고발하면서 형성된 ‘낙태 고발 정국’과 같은 상황이 언제 또 다시 연출될지 모른다. 당시 의사들이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꺼려하자,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해외까지 ‘원정 낙태’를 가거나 국내에서 수백만 원에 육박하는 수술비를 감당해야 했다. 중국산 ‘가짜 낙태약’이 온라인상에서 불법 유통되기도 했다.
지금처럼 형법상 ‘낙태죄’가 규정돼 있는 상황에서는 암암리에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병원이나 의료진에 대한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고, 안전하지 않은 시술로 건강을 위협받을 수도 있으며, 터무니없이 비싼 수술비용을 요구받을 수 있고, 심지어 고발까지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차이’를 가진 다양한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말하자
이 날 검은 시위에서도 참가자들의 자유 발언이 이어졌다.
서울에 사는 이유미씨는 “도대체 정책 입안자의 머릿속엔 뭐가 들었을까. 그들은 아마도 의사들이 반발할거라고 짐작은 했겠지만, 여자들이 이렇게 나서서 반대할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해봤을 것”이라고 말하며, 보건복지부의 이번 행태를 비판했다.
“아마 정책입안자들은 ‘낙태죄는 살인이라는 낙인이 있는데 여자들이 감히 나서서 얘기하겠냐. 결혼도 안한 여성들이 나와서 낙태 문제 외치면 자기 사생활 드러내는 건데 감히 나서겠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들을 얕잡아 봤다.”
이씨는 “왜 자꾸 낙태를 단속하려고 하는지 그 속셈이 뭘 지 생각해봤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 건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최악의 나라라는 뜻인데, 이러한 국가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서 ‘낙태 단속’이라는 카드를 사용하는 것 같다. 낙태하는 여자들을 ‘섹스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서 애는 낳기 싫은 이기적인 여자들’로 몰고 가면,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 힘든 사회적인 맥락이 삭제되니까.”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은 ‘생명존중’, ‘국익’을 위한 출산을 논하는 국가의 모순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산전 검사를 통해 암암리에 여아 낙태, 장애아 낙태가 이뤄져 왔고, 국가는 태어날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선별할 것을 권장해왔다. 여성들이 사익(私益)으로 인공임신중절을 선택해 온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익을 내세워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여성을 통제해 온 것이다.”
“점자 안내가 되어 있지 않은 임신 테스트기로는 임신 여부를 알 수 없어 누군가에게 임신 확인을 부탁해야 했던 시각장애여성,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에도 낙태할 병원을 찾기 어려웠던 지적장애여성, 깔창 생리대를 만든 빈곤한 십대 여성들, 이성애 정상가족 중심의 출산, 입양, 양육 정책에서 차별받았던 성소수자들은 알아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몸과 아이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 왔다.”
이진희 사무국장은 “우리는 국가에게 허락받는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 리스트를 늘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차이를 가진 다양한 여성의 경험을 나누고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재생산권’을 정의해 가겠다”라고 선언했다.
폴란드 여성들도 한국대사관 앞에서 검은 시위
이 날 시위대는 ‘낙태 합법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외국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폴란드어, 영어, 스페인어로 함께 외쳤다. 또 이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로, 유럽 국가들 내에서 아일랜드와 더불어 인공임신중절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지난 10월초 전면 낙태 금지법(산모의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5년 징역형에 처하는 내용의 법안) 의회 통과를 앞두고,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 법안을 폐기시킨 바 있다.
<페미당당> 활동가는 “폴란드 여성들은 ‘하나의 법안 막아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폴란드 프로라이프 단체들은 사후피임약 판매를 전면 금지하려 하고 있고, 집권 여당도 낙태죄에 관한 새로운 법안을 준비하는 등 낙태의 책임을 여성에게 강하게 물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폴란드 여성들은 한국에서 검은 시위가 열린 이 날, 폴란드 시각으로 오후 두 시에 한국대사관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한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여성들 “완전한 임신중단권 위해 싸우자”
수정헌법 8조를 폐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의 여성들도 메시지를 전했다. 아일랜드는 수정헌법 8조를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여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2012년 한 여성이 낙태 시술을 거부당하고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2013년에는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 만들어졌지만, 이 또한 굉장히 제한적이다. 2014년에는 성폭력으로 임신한 18세 여성이 낙태 시술을 거부당했고, 단식투쟁까지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제왕절개수술을 시행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페미당당> 활동가는 아일랜드 노동당 소속 한 여성의 메시지를 대독했다.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조항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며 우리가 배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12년 산모의 건강이 심각한 위협에 처했음에도 임신중절수술을 받지 못해 한 여성이 사망했을 때 우리는 분노했고, 당장 이 조항을 폐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부는 이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개정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우리는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완전히 합법적이며 완전히 안전한 임신중단권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2년 사건 이후 아일랜드는 임신중절한 여성을 최대 14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정부와 정당이 할 수 있는 절충안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런 종류의 토론에 부쳐져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의 임신중단권 요구 운동은 반드시 대담하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리를 외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완전한 임신중단권을 외쳐야 합니다.”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중인 혜원씨도 메시지를 보내왔다. 혜원씨는 “한국에서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지긋지긋한 여성혐오 문화를 온 몸으로 겪었다.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여성’이 아닌 ‘사람’ 대접을 받고자 온 이곳에서도 또 다른 여성혐오를 마주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이곳 아일랜드에서는 한 해 3천4백여 명의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이웃 나라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이곳 활동가들과 함께 본 다큐멘터리에서, 영국의 한 의사가 말했습니다. 임신중절 시술을 받으러 온 많은 여성들 중에, 유독 아일랜드의 여성들만 병원에서 눈물을 흘린다고요. 다른 여성들은 모두 임신중절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에 당당한 반면, 아일랜드 여성들만 유독 이 선택에 죄책감을 느끼고 수치스러워한다고 말했습니다.”
혜원씨는 “여성들에게 이런 죄책감과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선택에 대해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결정 때문에 국가에 의해, 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라고 물으며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여성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고 전했다.
검은 시위는 이날 서울뿐만 아니라, 진주, 대전, 광주, 대구, 부산에서도 진행됐다. 전북 일대에서는 낙태죄 폐지를 위한 릴레이 1인 시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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