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몇 년이 지나야 제가 이 일을 잊고 일상과 사회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디자인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새출발하기에 만만한 나이가 아닙니다. 그동안 예체능 하나만 바라봤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기도 정말 막막합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디자인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성폭력 피해를 입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후 제 삶은 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디자인이 너무 싫습니다. 반쪽이 나버린 포트폴리오와 망가진 제 커리어를 소생하기엔 그들이 망쳐놓은 게 너무나 많습니다.”
편집디자인 전문업체인 디자인소호에서 작년 5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피해자는 회사 측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피해자가 이 사실을 인터넷에 올려 알리자, 회사와 가해자들은 명예훼손과 업무방해죄로 피해자를 고소했다.
SNS상에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폭로한 피해자들이 가해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등의 보복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건 작년 10월이니, 디자인소호 성폭력 피해자는 이미 그 전에 고립된 싸움을 먼저 시작한 셈이다.
성폭력 알린 후 해고…SNS에 폭로하자 명예훼손 고소
지난 7일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해고하고 고소한 디자인소호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는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에서 주최했으며, 피해자가 직접 참석해 증언하였다.
피해자는 작년 5월 술자리에서 직장 상사 두 명에게 언어적, 신체적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들은 ‘오늘 야한 팬티를 입었네’ 등의 성희롱 발언을 하였고, 이 중 한 명은 피해자의 허벅지를 만지는 등 성추행했다.
이후 피해자가 충격으로 회사에서 실신하는 등 문제가 불거질 조짐이 보이자, 가해자들은 먼저 사측에 성폭력 사건에 대해 알렸다. 디자인소호에서는 진상조사위원회를 열어 이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들에게 ‘감봉’ 징계를 내렸다. 피해자는 성추행을 한 가해자를 고소했지만 이후 고소를 취하했고, 가해자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사측에서 갑자기 6월 2일 피해자를 불러 근태(勤怠) 문제를 지적하며 해고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동안 피해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피해자 측의 설명이다. 당장의 생계와 커리어 문제로 절박했던 피해자는 대표 이사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간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 없이, 오롯이 이 사건의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했던 피해자는 인터넷에 자신의 성폭력 피해와 사측의 해고통보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디자인소호 측은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피해자를 따로 불러 괴롭히고 “사과문을 작성해라, 안 하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피해자는 말하고 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6월 15일 피해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알고 보니 이미 대표 이사는 명예훼손으로 피해자를 고소한 상태였다. ‘해고 통보를 한 적 없고 근태 지적만 한 것이었는데, 인터넷 상에 왜곡된 사실을 유포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 고소의 이유였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피해자에게 약식기소 명령으로 벌금 300만원을 주문했다.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전과자가 된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피해자는 SNS에 유서를 게시하고 자살 시도를 했다. 그러자 디자인소호 대표이사는 성폭력 가해자들과 함께 피해자가 유서에 쓴 내용을 문제 삼아 또다시 피해자를 명예훼손 및 업무 방해로 고소했다.
‘폭로하는 것밖에 제게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검찰의 벌금 300만원 처분에 대해, 피해자는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지난 2월 2일 서울북부지방법원 형사6단독 재판부는 디자인소호 측의 1차 고소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가 게시한 글이 허위라고 볼 수 없고 (…) 사측의 구두해고 통보가 있었다는 피해자의 주장이 더 신뢰할만하다”는 것이 판결 요지다.
그러나 2차 고소로 인해 또 다시 지난한 법정 공방이 예상되고 있고, 피해자는 사건 이후 일상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다.
피해자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지난 10개월 동안 중증 우울증, 수면장애, 공황장애에 시달려왔다”며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심정을 낱낱이 밝혔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인터넷 상의 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제가 인터넷에 이 일을 공론화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을 아무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사 동료들은 자기 살 길을 위해 모른 척하고 선배들은 윗선에 저를 모함하기 바빴습니다. 이제 막 4개월 차 된 신입직원의 편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대신 가해자를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을 가족이라도 있었다면, 인터넷에 공론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디자인소호 대표이사는 시각디자인정보협회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디자인과 외래 교수직을 맡고 있고, 편집디자인 업계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 공고한 카르텔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에 이 문제를 공개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랐습니다.”
피해자는 “애초부터 가해자들과 회사가 공모해 왔다는 걸 알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보고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가해자 중 한 명은 본인이 온갖 악플에 시달리며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으며, 제가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을 이용하고 동정심을 유발해 모금활동으로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성추행 가해자가 아니라는 왜곡된 주장을 하면서 ‘이로 인해 신혼생활에 지장을 입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죄가 없음에도 제가 왜 디자인을 포기해야 합니까? 왜 제가 잘못한 사람인양 긴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까?”라고 물으며, 성폭력 사건 폭로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일상을 파괴하는 현실에 분노를 표했다.
문화예술계 여성 공동의 싸움이다
기자회견 자리에는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를 포함해 문화예술계 종사자 30여명도 참가했다.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의 김린씨는 “문화계 내 성폭력은 여성 개인의 불운이 아니며, 이번 싸움은 여성 공동의 싸움이다”라고 말했다.
김린씨는 이어서 “피해자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기도 하다. 여성문화예술연합(문화예술계 내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SNS상의 해시태그 운동 이후 만들어진 조직으로,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 찍는 페미, 페미라이터 등 9개 조직이 속해있음)의 이름으로 연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 대리인인 박진희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은 “디자인소호는 업계 안에서 ‘경험을 쌓게 해 준다는 명목 하에 직원에게 노예가 될 것을 요구하는 회사’로 악명 높다. 이번 사건에 대응하면서 노동자가 존중받지 못하는 폭력적인 일터일수록 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우며 여성일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디자인소호 측은 기자회견이 있기 하루 전날,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측에 피해자에게 사과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디자인소호의 이동현 이사는 2월 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고소를 취하할 의향이 있으며, 언론노조와의 면담을 통해 보다 명확한 입장을 정리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는 디자인소호 측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이미 피해당사자는 고통을 받을 대로 받았다. 이제 와서야 여론이 두려워 나서고 있지만 너무 늦은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예정되어 있는 디자인소호 측과의 면담에서, 제대로 된 사건 해결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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