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됐다고 조금 들떴다. 어제나 오늘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 새로운 다짐을 할 에너지를 얻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분이 좋다.
올해는 ‘조금 너그러워지기’를 목표로 삼았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그러워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일상 관계에서의 걸림 때문에 피로를 호소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단어로 사람들을 지레 판단하고 마음속으로 벽을 치기 바빴다. 물론, 때에 따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관계 차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터지는 사건사고에 질려버린 상태이다 보니,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거다. ‘그래서 넌 내 편이야? 적이야?’라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에 갇혀 상대를 감별하기 바빴다.
조금 너그러워져야겠다고 생각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남성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실제로 점수를 매기는 건 아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플러스에서 시작해서 빼기를 한다면, 남성은 마이너스에서 시작해서 더하기를 하는 식이랄까.
새로 시작한 그림 수업 선생님은 기혼 남성이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는 거의 없었고, 수업에 대한 기대치만 이만큼 올라간 상태였다. 어쨌든 돈을 내고 듣는 수업이니 얻어갈 것만 얻어 가면 그만이지 않겠나 했다.
수업은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가지치기를 해서 이미지화 시킬 것인가’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회적 이슈나 개인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리. 선생님이 먼저 젠더 문제를 거론했다. 본인은 잘 알지 못하지만 아내분과 경험을 나누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런 경험을 하는 남성들이야 많겠지만, 그 태도에서 묻어나오는 조심스러움이 보였다.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공감하며, 처방이 아니라 경험을 나누어주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경험이 꼭 답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이상적인 ‘완성형’의 상태는 없는 것 같다며, 늘 ‘과정형’으로 살아갈 뿐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흔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되는 말이니까. ‘진짜 페미니스트’같은 건 없고 그저 다들 조금씩 배우고 행동할 뿐이다. 돌아보면 나도 얼마나 무지했었나. 미래에서 보면 지금도 무지한 상태겠지만.
너그러워진다는 건, 예민해지기를 포기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중무장하기보단 계속 성찰하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별로인 인간이지만 어제보단 덜 별로인 인간이고 싶다.
이 기사 좋아요 1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일다의 방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