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서
강표를 만난 느낌을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부러웠다. 아직 이런 직장이 있구나. 취재 때문에 비정규직, 기간제, 파견직 그런 고용형태만 쫓다가 강표가 말하는 평생직장 이야기를 들으려니 적응이 안 됐다. 강표는 공무원이었다.
“경쟁이 없어요.”
강표에게 장그래의 <미생>은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다.
“일단은 잘릴 걱정이 없으니까. 진급 같은 게 있어도 연차에 따라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저는 큰 욕심이 없거든요.”
공무원이 되기 위해 2년간 고시생 생활을 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과 학원을 오가는 거리에서 느꼈던 박탈감에 대해 잠시 이야기 나눴다. 어쨌든 강표는 또래들 눈에 보기에는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잘릴 걱정 없다는 안도에는 이면이 있었다.
강표는 자신의 성적 지향이 밝혀진다면 직장에서 해고나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강표는 자신을 ‘울지 못해 웃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연구 결과에 그런 게 있대요.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게 훨씬 더 힘들다고. 굳이 더 힘들게까지. 울지 못해 웃고 있어요.” 강표는 남자를 사랑한다.
홍석천씨가 커밍아웃한 후 방송 하차를 겪던 15년 전이 아니다. 2017년 한국갤럽은 ‘동료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해고된다면 이것이 타당한가’를 물었다. 응답자 중 80%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7년 사이 17%나 증가한 수치였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는 타당하게 해고됐던가. 해고의 용이함도 7년 사이 17%는 넘게 늘었을 게다.
안정된 직장의 ‘함정’
그런데 안정적인 직장은, 바로 그 속성 때문에 강표를 위협했다.
“직장동료들이 ‘평생 간다. 이 사람이랑 계속 같이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게 있으니까. 소속감이 강해요. 서로 챙기고 알려고 하는 게 있어요.”
20대 중반 나이에도 강표는 결혼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가상의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그 여자친구와 이별도 한다. 가짜로 할 수 없는 결혼이 걱정이다. “팀 사람들은 거의 다 결혼했어요.” 책상마다 아기 사진 하나씩 올려놓은 풍경이 ‘일반’이다.
강표는 동료들의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더욱 존재를 숨겨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괴리가 든다. 평생을 “가면 쓰고” 살아야 하는가. 강표는 성적 지향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납득시켜보려고 한다. “직장동료라 해도 내 잠자리까지 밝힐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곧 체념하긴 한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박탈감
정규직이라 행복한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동료들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자신에겐 오지 않는다. 숫자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차별에는 수당이 있다.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배치된 각종 수당(가족수당, 배우자 관련 경조비 등)에서 제외된다. 공무원인 강표의 경우 연금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저는 죽으면 연금을 다 국가에 줘야 해요. 나라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ㅎㅎ” 법이 인정한 배우자가 없다. 20년간 근속한다면 유족연금 금액이 1억원 쯤 된다고 했다. 동성혼이 합법화되지 않는 이상 강표는 애국자다.
그러나 숫자로 확인되는 차별보다 박탈감을 주는 건 따로 있다. 내 삶이 ‘일반’과 다른 궤적을 걷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사인 영진은 다른 동료들의 삶을 “그림이 그려지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삶. 아파트에 층층이 들어선 집들 마냥 정형화된, 그러나 같아서 안심되는 삶. 영진은 자신이 이 그림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3명 중 한 명인 영진은 덤덤하나 걱정한다.
비정규 파견직 성소수자들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성소수자들도 있다. 같은 교사지만 B는 결혼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한다.(<나, 성소수자 노동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 2011년 12월) 동료 중 “서른 넘고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는 기간제 교사다. “연애 해야지” 주변에서 말은 하지만 막상 이성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유야 알만하다. 기간제 교사 B는 ‘정규직이 그리는 그림’에 낄 수 없다.
그 그림은 익숙한 동시에 낯설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우리’의 삶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 부모들이 걸어온 삶이다. 호황기 시절, 그것도 중산층 부모들의 삶. 그 삶을 답습할 수 있는 건 한줌 사람들이다. 20대 때 무슨 결혼인가. 취업준비와 학자금 갚기도 버겁다.
그런 의미에서 B는 강표나 영진과는 접점만큼이나 거리감도 커 보인다. 젠더(남성)와 성적지향(동성애)이 동일함에도 말이다. 어쩌면 노동에 있어서는 지민과 공통분모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지민은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비정규직-파견 직원이다.
그리고 여기,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있다. 불안정 노동이면서 도무지 사장과 직원, 그리고 고객들과 거리두기가 가능하지 않는 일터. 을(乙) 중 을(乙)이다. “나이도 어린 게” “사장 나오라 그래”를 외치는 고객들과 “얼굴 보고 뽑을 거다” 당당히 내뱉는 사장 사이에서, 성희롱을 겪거나 폭력에 노출돼도 대처할 방법이 딱히 없다.
“사장이 남자직원에게는 말을 험하게 해요. 농담으로 ‘너 죽여 버린다.’ 여자들에게는 고분고분 말하는데, 대신 손으로 터치하거나 어깨를 만진다거나.”
외양이 다르면 고용하지 않는다. 주민등록 앞 번호와 성별표현이 맞지 않으면 면접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나마 기업과 국가가 양보한다며 하는 얘긴 “성전환 수술을 하고 와라”다. 우리 사회는 의학의 힘을 빌려 성별전환을 완료(?)하지 않은 이들을 트랜스젠더로조차 봐주지 않는다. “수술 안 했으면 아직 남자 아니야?” 직업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때로 성전환 수술은 선택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트랜지션(성전환 수술 및 호르몬 치료) 비용이 만만찮다. 트랜스여성 평균 1천515만원, 트랜스남성 평균 2천57만원(“한국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 관련 경험과 장벽”, 김승섭 외, 2018년 3월) 여기에 회복기간 동안의 생계비, 해외수술일 경우 체류비까지 더해야 한다.
요즘 세상에 정규직이 되려면 문화/경제적 자본이 필요하다. 서울대 합격률이 아파트 가격과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조사연구(<부동산 계급사회> 손낙구, 후마니타스, 2008)부터 20대 대졸자의 아버지 34%가 대졸자, 47%는 정규직이라는 조사결과까지(2017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증거는 무수하다. ‘할아버지의 재력,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은 교육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를 증명하듯, 2014년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트랜스젠더들이 다른 조사자들에 비해 학력과 소득수준이 더 낮고 고용상태가 불안정함을 보여준다.(2017년 6월 SOGI법정책연구회 주관, 김수영 “트랜스여성의 노동과 복합적인 젠더실천”에서 재인용) 특정한 몸이 사회적 성취(?)를 누리는 데 불리하다. 모든 것을 개인 능력으로 성취하라는 사회지만, 성취는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소수자 내에서도 몸의 ‘정상성’과 인적/물적 자원에 따른 위계가 있다.
불안의 확장
불안은 늘 성소수자들과 함께했다. 오늘 안정적 직업을 가질 수 없는데, 내일의 안정을 바랄 수 있을까. 그 내일을 혼자 살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안정이란 ‘가족의 형성’에 뿌리를 둔다. 그 ‘정상가족’을 이루는 성애와 (법적)결혼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노후는 ‘혼자’ 감당해야 할 무언가다.
“벌이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어요. 얼마 못 버는데도. 내가 오래 살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요. 늙어서까지 혼자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면 더 불안하니까. 오래 살 생각을 안 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지도.” -지연, 20대, 에이섹슈얼(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현저하게 낮은 경우), 현재 제조업 근무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시대는 이들을 외롭게 두지 않는다. 불안의 지평을 넓히는 중이다. 보수적으로 측정된 정부 통계마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최근 10년 사이에 두 배로 벌어졌다고 말한다. 좋은 일자리는 축소되고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사회적 안전망은 미비하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 결혼까지 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다.
감당할 수 없음의 직접적인 표현은 ‘n포’였다. 결혼도 포기한다. (여성들의 ‘비혼’ 선택은 단순한 ‘포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만) 너무 ‘신성’해서 동성애자들에게 결코 ‘허락’해줄 수 없다는 그 결혼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비정규직 계급의 포기와 불안은 성정체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글로벌하게 확장되는 중이다.
구매해야 하는 시민권
비혼을 선택하거나 결혼을 포기했다. 그래봤자 남는 건 또다시 불안이다. 우리는 가족을 사회구성의 기본 단위라 배웠다. 거기서 낭만적 요소를 빼면,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돌봄을 ‘가족’ 단위에서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남는다. 노후의 돌봄 또한 마찬가지다. ‘효’의 영역이라 했다. 가족이 없다면? 돈으로 구매해야 하는 돌봄이 남는다. 돌봄을 구매할 능력이 안 된다면? 노후불안은 자연스레 ‘고독사’로 연결된다. 비용감당이 안 돼 결혼을 포기했더니, 이번에는 돌봄(비용)이 감당 안 된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어디 돌봄 뿐이랴. 모든 것이 개인의 비용으로 처리된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학자금 빚지고 졸업해, 대출받아 어학연수 다녀와, 무급인턴을 거치며,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얻기 위한 비용을 개인이 감당한다. 그렇게 공들여 사들인 것을 우리는 ‘능력’이라 불렀다.
능력이 구매의 최종 결과물은 아니다. 능력이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우리가 사들인 것은 ‘시민권’이다. 천부인권이라는 말은 헌법에나 있는 좋은 소리. 이 시대 시민들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능력(쓸모)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권리를 가진다.(노동 또한 권리이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남들보다’ 두세 가지 과정을 더 거치는 게다. 추가비용이 든다. 성전환 또는 엄격한 패싱. 트랜스젠더의 경우 천만 원 단위 비용을 들여 전환(수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면접장에 들어갈 수 있으며, 노동하는 국민으로 시민권을 얻는다.
신자유주의 시민권(성원권) 획득은 비용지불로 이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의 성취는 구매이다. 동시에 배제의 기준조차 돈이다. “소비력이 없는 사람들부터 추방이 이루어”진다.(<한국남성을 분석하다> 엄기호 외, 교양인, 2017) 스펙도, 성별도 살 수 없는 하류시민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밑바닥 불안정 노동으로 간다.
비용과 구매의 전쟁
시민권(또는 성원권)을 얻기 위해 20/30대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너무 크다. 젊음을 갖다 바친다. 그나마 비용이 덜 드는 ‘시험’으로 몰린다.(2017년 공무원 시험 경쟁률 46.5:1) 세상의 불공정함은 다 아는 일이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입사채용보다, 소수점자리마저 확인 가능한 점수를 택하겠다는 판단도 있다.
그 소수점이 ‘공정’의 상징이 된다. 점 아래 숫자 몇 개가 주는 명확함을 붙잡고 안도를 찾아야 할 정도로 경쟁은 치열하다. 강표는 “파이는 이미 바닥났다”고 했다. 취업준비생들은 (누군가 가져가) 몇 조각 남지 않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다.
경쟁한다. 치열하다. 모든 획득과 성취가 ‘개인’에게 맡겨진 사회에선 당연한 일이다. 결국 어떤 개인이 더 잘 ‘구매’하는가만 남는다. 취업에 쏟는 ‘시간’마저 자본주의의 구매 목록이다.(‘시간이 금이다’는 근대의 발명품 같은 말이다) 구매할 능력 없음은 간단한 말로 치부된다. ‘무능’. 비용 부족으로 인한 결과는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우리는 불안하므로, 세상에 ‘불안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빈곤도 차별도 ‘나’ 또는 ‘너’의 문제다.
모든 것을 구매해야 영위되는 삶. 이것이 사회적 소수자들이 그토록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는’ ‘일반의’ ‘평범한’ 삶의 모습이라니, 그 또한 불안하다.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 중 일부는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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