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선언의 시대, 북한여성과 어떻게 만날까

탈북여성에 관한 상호문화신학 연구자 나진 인터뷰(하)

하리타 | 기사입력 2018/06/26 [20:29]

종전 선언의 시대, 북한여성과 어떻게 만날까

탈북여성에 관한 상호문화신학 연구자 나진 인터뷰(하)

하리타 | 입력 : 2018/06/26 [20:29]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탈북여성을 혼종적, 능동적 주체로 다시 보기

 

나진님은 탈북여성에 관한 소논문 <‘사건’으로서의 환대와 민중메시아의 가능성 엿보기 – 2017년 탈북여성에 관한 상호문화신학적 자아문화기술지>에서 탈북여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리타: 탈북여성에게 ‘오클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죠. 논문을 보니까 오클로스는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마가복음을 민중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서 조명한 용어인데요. ‘비자발적으로 귀속성을 박탈당한’ 소수자 중의 소수자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고요? 마가복음에서 민중은 의도적으로 ‘오클로스’라는 단어로 쓰였지만 예수의 회당 장면에서는 한 번도 안 나와서 오클로스는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니었고, 회당 밖으로 아예 밀려난 ‘비존재’로 해석된다고 배웠어요. 인상적입니다. 탈북여성에게 이 개념을 적용한 것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나진: 안병무의 오클로스 개념을 오늘날 지구화 시대에 두고 본다면, 국경을 넘어 삶과 존재의 공간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노동자이고, 결혼이주여성이며, 난민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노숙자인거죠. 중심의 질서에 의해 외부자로 배제되고 뿌리 뽑힌 오늘날의 오클로스, 탈북여성도 여기 포함돼요. 탈북과 유랑, 정착 과정에서 물론 최하위계층으로서 도구화되고 비극적인 일을 겪어요. 하지만 오클로스가 민중신학에서 메시아이듯이 탈북여성들 역시 자기 삶의 개척자입니다. 이들이 부여받은 삶의 조건에서 탈출하고 변화를 꾀하면서 점점 주체화되어갈 수 있거든요. 또 우리에게 낯선 그들과 만나면서 우리도 변화의 계기를 맞고요. 

 

▶ 나진님은 얼마 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삶을 마감한 장소를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유대인의 무덤처럼 생긴 동굴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그 끝은 ‘영원의 창’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하늘로 향한다. 소외된 민중, ‘오클로스’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은 고인의 글귀를 발견하고 마음에 새겼다. “유명한 이들보다 이름 없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 더 어렵다.”(Schwerer ist es, das Gedächtnis der Namenlosen zu ehren als das der Berühmten.)    

 

하리타: 이들이 혼종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나오는 힘을 북돋아야(엠파워먼트)한다는 주장도 참 좋아요. 탈북여성들이 다양한 경계와 접촉의 시공간, 예를 들어 북중접경지대, 한족-조선족 사회, 미등록체류자-난민-망명, 남과 북, 국정원과 하나원을 파란만장하게 거친 몸이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달라 보여요. 이제 소논문에 나오는 ‘K모녀의 섹슈얼리티와 시공간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볼까요. 그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나요?

 

나진: 2017년 상반기 동안 어떤 지역의 하나센터에서 정착도우미로 활동했어요. 당시 탈북 여성을 연구하겠다는 목표가 잡힌 상태였고, 연구대상자인 사람들을 좀 더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만나고 싶어 자원활동을 자처한 거죠. 나중에는 질적 연구의 데이터로서 탈북자와의 인터뷰도 할 계획이었는데,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들은 인터뷰를 포함해 하도 이런저런 제의를 많이 받아서 사례비 없이는 섭외 자체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돈 주고 하는 인터뷰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저는 좀 더 시간과 정성을 들여 먼저 친구가 되는 방법을 원했어요.

 

하리타: K모녀도 교회에 다녔나요?

 

나진: K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려고 했어요. 하나원에서는 목사님을 돕는 역할까지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역으로 배정 받아 와서는 적응을 잘 못했고요. 반면 K의 어머니는 북에서 장교였기 때문에 체제교육을 이미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시각도 이미 갖고 있었고, 그다지 즐겨 다니지는 않았어요.

 

탈북여성의 ‘다른’ 섹슈얼리티와 시간이 준 해방감

 

[(…)어머니는 딸의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나이도 많고 제대로 직업도 없는 중국인 남자친구를 이제 그만 정리했으면 한다고 하셨단다. 그런데 어느 날, (…) K가 옆방에서 중국말로 통화하다가 목소리를 높이더니, 황당한 얼굴로 와서는 남자친구가 지금 인천공항이라는 것이다. 온다고 하길래 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왔다며 화를 낸다. 그러고는 나에게 인천공항에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도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그런데 방법이 없고 또 공항에서 서로 못 찾을까봐 걱정이 되어 같이 길을 나서기로 했다. K가 시내에 모텔도 예약해달라고 하는데, 옆에서 어머니가 들으시더니 “아니, 너는. 중국 낯선 곳에서 너 힘들 때 그렇게 옆에서 도와준 사람을, 너한테 온 손님을 말도 안 통하는데 모텔에 데려다 놓니? 집으로 데려오라우.” 라고 하신다. 나는 더 당황스럽다. 남자친구를 계속 못마땅해하시던 어머니 아니셨던가. 내 생각엔 공항에 데리러도 못나가게 할 판인데, 집으로 데려오라니.

 

어디에 가자고 약속을 하자면 모녀의 시간성은 아침나절, 오후 혹은 저녁나절 중이다. 나는 신경증적으로 처음엔 그러한 몽뚱그려진 시간에 늘 구체성을 덧붙인다. “9시면 되시겠어요?” 그러고서도 9시 아파트 앞에서 만나자 하면, 9시에 나오는 법은 없다. 나는 재촉을 하고, 채근을 하다가 지쳤다. 약속을 해놓고도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갑자기 취소하거나 하는 일이 왕왕 있으면서 한국의 빡빡한 시간을 살고 있던 나의 시간성은 (물론 밀려오는 짜증과 허무와 함께) 점점 무너져간다. 나중엔 잘 해봐야지 하는 마음에도 힘이 빠진다. 어느새 나도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해보기도 한다. 나도 모녀의 시간성에 전염된 것인가. 하다 보니 별로 답답하지도 않다. 서로가 급하면 급한 대로 맞춰가진다.

 

내가 K모녀를 만나면서 겪었던 가장 큰 이질감은 그녀들의 섹슈얼리티 규범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반대하는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재우라는 일처럼, 그동안의 나의 사고방식의 틀에서 이들의 행동은 모순적이다. (…)이들 모녀에게 맞선을 주선하는 이의 전화가 왕왕 왔다. 실제로 선도 꽤나 여러 번 나가는 것 같았는데, 갔다 오면 대부분 상대는 바로 ‘남자친구’가 된다. (…)연애가 괴로워 썸만 탄다는 남한 사회의 동시대적 관계 양식과는 다르게 모녀는 하루만 보고 와도 쉽게 ‘남자친구’라는 호칭을 붙인다.

 

어느 날 통화를 하다가 어머니가 나에게 속마음을 살며시 드러낸다. “선생님, K 때문에 속상해죽겠어요. 글쎄 그놈의 새끼가 애가 있다잖아요. 이혼은 아직 안하고 따로 산다는데 그래도 어떻게 남의 애를 키워요. K도 속상해서 헤어지자고 하고, 바람 쐬러 나갔어요.” K가 그래도 몇 주를 만나는 것 같은, 오가며 인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라, 나는 깜짝 놀란다. “아니. 어찌 그랬대요. K가 좋았으면 애초에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어야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인데 잘 헤어졌네요. K는 그래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힘들어서 어째요.” 하고 공감해주고 혼자 어딜 갔으려나 걱정이 된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 K는 좀 어때요?”하고 안부를 묻자, 어머니는 “선생님, K 남자친구가 너무 훌륭해요. (나는 잠깐 예전의 남자친구랑 다시 만나기로 했는가 생각한다.) 돈도 잘 벌고요. 성실하고 얼굴도 잘 생겼어요. 내가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기에, 돈 잘 벌어서 K를 공부시키겠다고 서약서 쓰고 가라고 해서 서약서도 썼어요” 라고 한다. 알고 보니 바람 쐬러 고모 집에 갔을 때, 고모부가 눈여겨두고 있던 착실한 탈북청년을 K에게 붙여줬는데 그 청년이 K에게 푹 빠져서 며칠 쫓아다닌 것을 K가 마음을 받아줬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 실연한 K의 마음에 머물러있고, 함께 애도 중이었는데, 성급히 그 마음을 거두어야 해서 당황스럽지만, 어머니에게 별로 표를 내진 않고 “네, 어머니. 좋은 사람을 만났다니 다행이에요” 한다.

 

어머니는 남편과 결혼시킨 모친을 평생 원망할 정도로 결혼생활 내내 K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서 속을 썩였고 아이들 봐서 이혼할 마음은 없지만 보고 싶지는 않다고 그랬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남편이 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사귄 남자친구 자랑을 하신다. “사람이 정이 있어요. 돈은 많이 없어도 나를 아주 살뜰하게 챙겨준다고요. 길가다 이쁜 옷 보면 ‘저거 사주어야 하는데’ 해요. K 생각도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돈 벌어서 K는 공부시키자 그래요.”

 

나는 혼자서 어머니의 북에 있는 남편과 남한의 남자친구 사이에서 나의 마음의 위치를 고민한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는 별로 그런 고민은 없는 듯하다. 이미 북은 돌아가지 못할 단절된 공간이고, 한국보다 입을 만한 옷이 훨씬 많다는, 그러나 신분이 불확실한 채로 불안한 ‘비존재’로 살아야 하는 중국도 중국에서 여기로 손님이 오지 않는 한, 한국보다 더 체화된 공간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금의 일상에서 고려되는 공간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삶의 공간인 지금여기의 남한사회. 어머니의 섹슈얼리티적 마음은 (삶의 괴로움을 감당해낼 수 있을 정도의 무의식적 타협이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분절된 북한/중국/남한의 공간들처럼 분열된 채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모녀는 그러한 분열된 마음을, 그리고 각각의 공간에서 좀 더 손쉬운 듯한 생존의 도구화를 나에게 숨기지 않을 만큼 남한에 살고 있던 나의 윤리와는 다른 윤리와 규범의 섹슈얼리티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남자를 잘 만나면 뭐해요.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지. 그게 주체사상이에요”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용한 젠더체계 내의 생존방식에 능숙한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만의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진님의 논문 중에서)

 

하리타: 소논문에서 조금 엿본 K모녀의 섹슈얼리티와 시간 개념이 제게도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들 모녀의 사례를 탈북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섹슈얼리티로 일반화해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나진: 네, 저는 공통된 경험에서 비롯된 탈북여성들 간 유사한 섹슈얼리티라고 봐요. 우선, 탈북자들이 특히 많이 나온 고난의 행군 시기(1990년대 중후반)와 그 이후에 생존하던 북한 여성들은 섹슈얼리티에 어느 정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유사 전시와도 같은 어려움 속에서 특히 성윤리가 타협의 대상이죠. 다른 가치들도 그렇지만 성 윤리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거든요. 가령 굶어죽게 생겼을 때도 지켜야할 건 아니죠. 그 때는 윤리가 배부른 소리죠. 탈북 이후 얼마간 지낸 중국에서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어요. 중국의 다수민족인 한족의 성문화는 남한 사회보다도 훨씬 개방적이에요. 연애나 결혼에서의 행동양식, 낯선 남성과의 관계 맺기 등은 중국서 익히고 실천한 섹슈얼리티의 요소일 거라고 봐요.

 

한편으로 탈북여성들이 가부장제 억압에 대한 비판의식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는 북한의 고유한 공산주의 체제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어요. 북한은 기존의 가부장제 토대에서 공산주의를 발전시켰고, 국제연대를 주요 가치로 한 과거의 타 공산주의 정권과는 달리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웠어요. 김정일은 아버지, 당은 어머니, 여성 인민은 그런 당에 봉사하는 존재로 개념화되어 있었어요.

 

김일성 정권 때는 정책 속에서 실천하려했던 공산주의 남녀평등 사상은 이후에 점점 무너져갔어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여남평등을 외쳤지만, 여성에게 국가와 가정을 위한 희생을 요구했지요. 개인이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체제의 논리를 깊숙이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수밖에 없었겠죠. 허기가 질수록 현실의 비참함을 견디는 방편은 허상이라 할지라도 체체순응적인 자부심을 붙들고 있는 겁니다. 결혼 경험이 있는 탈북여성들의 반복되는 증언은 “못 먹고 못사는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마을 사람들에게 더한 무시와 수난을 당했다”, “어느 집에 첩으로 들어가거나, 남자가 병신이더라도 같이 사는 모양을 보여야했다”는 것이었어요.

 

하리타: 탈북여성들과 교류하며 이런 이질성을 접하고 나진님은 혼란스러운 한편, 이를 ‘탈정체화’(disidentification) 그리고 민중신학이 말하는 ‘상호구원 사건’으로 의미 부여했지요. 어떤 면에서 그랬나요?

 

나진: 우선 해방감을 주는 면이 있었어요. 저는 보수적인 개신교인으로 자랐고, 이후 정치사상에 있어서는 진보적으로 갔지만 섹슈얼리티에서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관념적으로는 기독교가 터부시하는 성적 실천에 동의하기도 했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기존 가치관대로 윤리적으로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혼을 계기로 저 자신도 의도와 달리 기존의 성, 관계 윤리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거죠. 그 과정에서 ‘나는 결격 사유가 있는 목사야. 내가 목회를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자격지심에 시달렸어요. 탈북여성들과 어울리면서 비로소 ‘아니, 그게 어때?’ 라고 할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얼마나 근대적 인간인지도 여실히 느꼈죠. 시, 분 단위로 생활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것은 근대에 와서야 출현한 시간 개념이에요. 그게 제 안에 깊이 체화되어있는데 탈북여성들은 거기서 자유롭더라고요. 시간 약속을 몇 시, 이렇게 정확하게 할 수가 없고 하더라도 그 분들을 늘 느긋하고 늦어요. 대부분의 정착도우미와 탈북여성들이 서로 부딪치는 지점이에요. 제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되고 자기계발과 성취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도 탈북여성이라는 거울을 통해 봤지요.

 

6개월 동안 그분들이 남한에 적응하느라 흔들린 것만큼 저도 거기 반응하고 응답하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던 제 규범과 진리를 되물은 거예요. 그게 학문적 용어로 탈정체화(disidentification)죠. 그런 해체의 과정을 통해 기존에 절 얽매던 것에서 제가 어느 정도 해방된 것이고요. 나와 다른 타자의 규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과정은 한편 저를 확장하는 형태의 해방이에요. 그게 저한테는 민중을 만나는 사건, 민중메시아를 만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리타: 그리고 우리 자신도 실은 민중의 한 사람이겠죠? 아까 정의하신 대로 이 시대의 ‘비존재’ 소외된 오클로스는 이주민 난민이라고 했어요. 탈북 여성 ‘난민’ 연구자로서 독일 여성 난민에 대한 제 글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연재가 어떤 점에서 울림을 주었나요?

 

나진: 2003년에 6개월, 그리고 2009년 3년 반 동안 독일에 와 있을 때와 달리, 2016년 마인츠에 방문 연구자로 잠시 와 있을 때는 외국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각박한 태도를 체감했어요. 식당에서 제가 독일어를 조금 버벅대니까 종업원들이 짜증을 내는 식이었죠. 당시는 독일 사상 최고로 많은 난민이 들어온 때였어요. 하지만 이후에 난민 관련 이슈를 제대로 습득할 기회는 갖지 못하던 차에 <우리 자신의 언어로>를 만난 거죠. 거기서 들린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는 제가 연구하는 탈북여성들의 것과 공통점이 정말 많더라고요. 제 연구가 남북한 체제 속의 탈북자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맥락의 난민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얻었어요. 

 

▶ 탈북여성이 주인공인 소설 두 편. 평양 출신 작가 김유경의 <청춘연가>(2012)는 탈북여성들을 동질적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기존 소설의 한계를 넘고 이들 사이의 다양성과 균열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한편, 강영숙의 <리나>(2006)는 ‘P국’으로 상징화된 남한에 오기 위해 국경을 넘은 젊은 여성 리나가 겪는 파란만장한 탈출기를 그렸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피해자가 아닌, 변화무쌍한 정체성을 가진 강인하고 복잡한 주체로 나타난다.

 

생명을 도구화하지 않는 ‘탈분단’ 되기를

 

하리타: 탈북여성을 연구하는 이로서 남북 정상회담과 종전 선언을 지켜본 감회는 어땠나요?

 

나진: 두 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안 흘릴 수 없더라고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탈북자 친구들도 있고, 100일된 딸을 북에 두고 왔던 장기수 할아버지 생각도 안할 수가 없었지요.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종전 선언이 이루어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걱정스런 마음이 컸어요. 북한이 개방되면서 경제적 교류가 제일 먼저 시작될 텐데, 북의 인민들이 어떻게 될지. 이들이 자본주의에 더 많이 더 빨리 노출이 될 텐데, 결국엔 식민주의적인 시장 확장의 방식일 것 같아서요. 북한의 싼 노동력과 자연자원이 많이 동원되겠죠. 빠르게 산업화되는 저개발국 도시들에서 나타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흔한 풍경이 북한에서도 보이게 될지 몰라요. 인본주의가 바탕이 되지 못하고 생명의 도구화가 먼저 일어나고요. 문재인 정권이 이 부분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대비를 하고 개방 및 교류 정책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하리타: 그럼, 통일과 관련한 여러 논의들 중에 구체적으로 지지하는 대안이 있나요?

 

나진: 저는 반드시 통일을 지지하진 않아요. 저는 트랜스내셔널리즘에 동조하고 있고, 따라서 국경은 사실상 국민국가(nation-state)들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허구라고 봅니다. 지금과 같은 적대적 국경 체제가 끝나는 것이 궁극적인 해답이라고 봐요. 좀 이상적인 얘기지만요. 남북 간의 평화를 추구하는데 있어 통일이 꼭 맨 마지막 단계나 최종 목표일 필요는 없어요. 분단체제는 구성원들에게 폭력적이므로, 탈분단은 꼭 되어야겠고요. ‘탈분단’은 분단과 통일 사이의 그 무엇일 수 있겠는데요. ‘분단’ vs. ‘통일’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통일이라는 오지 않은 미래와 분단이라는 현실 사이를 좁힐 상상력과 실천 행위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에, ‘통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문화적) 실천을 하자는 얘깁니다.

 

한국 정부에서 학자들에게 흔히 부여하는 연구 주제가 흔히 ‘통일시대의 해법’ ‘통일 이후 사회통합’과 같은 것인데요. 사실 ‘통합’(integration)이라는 개념도 우리는 의심해봐야 해요. 아무리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어도 소수자, 타자가 주류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발상에서 멀지 않거든요. 이질적인 주체들이 어떻게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 작년 가을, (사)평화교육프로젝트 모모에서 ‘탈분단’을 주제로 진행한 평화교육 프로그램 포스터.

 

하리타: 종전 선언과 일련의 변화들은 탈북자 연구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것 같아요. 탈북여성에 대한 인식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까요?

 

나진: 단일하고 전형적인 ‘탈북자’ 관점에서 탈피하고 남북관계에만 매몰된 시야를 넓혀서, 이들을 경계를 넘는 경험을 한 사람, 월경의 감각이 체화된 사람으로 보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게 된 다중적, 혼종적 정체성에 집중해야 됩니다. 젊은 세대 탈북자들은 남한이나 중국이 아닌 제 3국으로의 망명을 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들었어요. 시대가 변화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상당히 복잡하고 다중적 존재이고 어떤 식으로는 경계를 넘는 체험을 하며 살고 있어요. 이 점을 기억한다면 탈북 여성에 대한 시혜와 동정의 마음을 넘어설 수도 있을 거예요. 이 지구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국경을 넘나드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고민을 할 때 탈북 여성이라는 존재와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통찰을 줄 거라고도 믿어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다. 와사사~하고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북쪽말이 귀속에 쏟아져 웅웅거린다. 데리고 다니는 곳마다… 얼른 빨리 적응하란 소리가… 듣기 싫고 심보가 나서 "적응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랬다. 차라리 같은 말을 쓰지 않았다면 그런 오지랖 넓은 잔소리 들을 일도 없을텐데. 이유도 없이 자꾸 아픈 게 맘에 걸린다. 겉으론 나보다도 더 세련되고 얼굴도 이쁘장하고 걸음도 씩씩한데, 자꾸 아프다 그런다. 아픈 게 당연하다. 두고 온 딸들과 엄마가 보고파 아프고, 정신없는 서울의 속도가 아프고, 빨리 적응하라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다른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아프다.” (나진님의 논문 중에서)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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