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소개] 채일리 달튼은 1997년 의정부에서 태어나 같은 해 미국에 입양되었다. 2016년 친어머니와 다시 만난 후, 2017년 연구와 친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채일리는 한국의 입양인 활동가 조직인 한국입양인참여연대(Solidarity and Political Engagement of Adoptees in Korea. SPEAK)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최근 채일리는 뉴욕에서 열린 한국인 퀴어·트랜스 회의(Korean Queer and Trans Conference, KQTcon)에서 “가족에 관한 급진적 관념: 퀴어 정의와 입양인 정의의 교차점”(Radical Notions of Family: At the Intersections of Queer Justice and Adoptee Justice)을 발표했고, 다양한 맥락에서 성인 입양인 정체성들에 초점을 맞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퀴어이자 다른 인종 사회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으로서, 채일리의 관심과 신념은 돌봄과 친밀성의 정치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채일리는 이 에세이를 통해 연약함과 관계와 연대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퀴어 입양인’인 내가 들어가고 나가는 세상
한 친구는 언젠가 나에게 벽장(closet)은, 그리고 벽장의 “안”에 있거나 “밖”에 있는 정도는 네가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벽장에서 나오는 것(벽장에서 나오다come out of closet라는 표현은 커밍아웃을 뜻함. 벽장은 퀴어 정체성이 감춰져 있는 공간으로 비유된다-편집자 주)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벽장은 네가 살고 있는 집과, 네가 벽장 안에 무엇을 걸어 놓았는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한국에서 내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러 갈 예정이다. 지금 내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벽장 역할을 하는 직사각형 상자를 열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할머니가 주신 체크무늬 하이넥 블라우스와 장미장식 금팔찌를 꺼냈다. 이것이 여기서 내 벽장이다. 두 번째 한국 방문을 위해 짐을 싸면서 나는 이 벽장이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 내가 고른 옷들은 더 세련되고 여성적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을 덜 —더 나은 말이 없기 때문에— 퀴어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벽장을 선택하면서 벽장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우리의 벽장을 변화시키지 않는가? 우리 가운데 완전히 “커밍아웃”한 —현대 사회에 그게 가능하다면— 이들조차도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 입을 것들을 선택한다.
솔직히 말해서 친구의 말처럼 퀴어 정체성과 나의 관계와, 내 퀴어 정체성이 그 일부가 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벽장의 안과 밖으로 비유하는 게 그렇게 좋은 비유로 생각되진 않는다. 사실 이주민으로서 나와 퀴어성의 관계는 여행 가방의 형태, 즉 감정의 봇짐으로 더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내 커밍아웃에 관한 다섯 개의 여행 가방들과 내가 벗어나고 있는, 그리고 들어가고 있는 세상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여행 가방: 비행기에 실려 온 아이
나는 찢어지게 울면서 미국에 도착했다. 내 부모님은 늘 그 이야기를 하신다. 당시 양부모들은 입양할 아이들을 데리러 한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대신 아이들이 입양기관에 고용된 조무사들과 함께 비행기에 실려 왔다. 그들은 모두 줄을 서서 비행기에서 내렸고, 조무사들은 입양된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소중하고 착한 선물처럼 부모들에게 건네주었다. 다문화의 완벽한 가족들이 차례차례 하나씩 만들어졌다. 내 부모님은 다른 귀여운 잠자는 아기들과 달리, 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고 늘 말씀하신다. 조무사는 부모님에게 나를 떠밀듯 넘겨주면서 “이 아이와 잘 해 보셔요”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나중에, 나는 작은 여행 가방에 나와 함께 실려 온 예전 삶의 유물들을 파내보곤 할 것이다. 진분홍색 아기 한복, 달처럼 동그란 얼굴을 한 인형 두 개, 돈 몇 천 원, 그리고 내가 열리지 않는 검은 상자라고 생각했던 것. 밤마다 나는 소음이 아닌 뭔가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것에 귀를 대보곤 할 것이다.
나중에, 나는 여자들에게 끌리는 이유가 엄마에 관련된 문제들 때문이 아니냐는 물음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단단한 돌멩이 같은 그 말 속에 일말의 진실이 들어있지는 않을지 궁금해 하곤 할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떨어지게 된 최초의 상실, 돈을 받고 나를 대양 건너 데리고 온 여성에게조차 거부당한 나의 트라우마가 여성들과 깊고 초월적인 사랑을 찾는 욕망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궁금해 하곤 할 것이다.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언젠가 그 답을 알게 될 때가 올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냥 울고 또 울었다. 그때조차 나는 내 울음을 통해 다른 예쁜 아기들과 달라지고 싶었던 것이다. 행복하고 “명랑한”(gay) 것이 아니라, “엿 같고”(fuck you) 퀴어하게 말이다. 부모님은 그날을 내가 “집으로 온” 날(coming home day)이라고 부르신다. 나는 지금 그날을 커밍아웃 데이(coming out day)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여행 가방: 사랑, 환희
대학 첫해를 보내고 난 여름, 나는 다시 부모를 떠나 남 캘리포니아의 뜨겁고 건조한 사막으로 날아갔다. 떠나기 전에 부모님들에게 나에 관한 모든 법적 서류들의 사본을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친가족을 찾는 절차를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양기관에서 요구한 30달러의 비용과 나 자신에 관해 설명하는 편지 한통에 덧붙여, 친가족한테서 맨 처음 나를 빼앗았던 사람들에게 내 신원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편지를 쓰는 것이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 빈 문서, 컴퓨터 화면에 깜빡거리는 커서가 나를 비웃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때, 가끔 영어 수업에서 만난 친구가 침실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내가 고향 도서관에서 가져온 <푸드 네트워크>(Food Network) 잡지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자기에게 화분들을 배달해 보내고, 밤 산책을 함께 하면서 바이올린 연주를 해준 남자아이들에 관한 대단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때때로 그녀와 나는 ‘ㄱ’자로 붙여놓은 소파에서 잠들었다 깨어나 서로 코를 비비면서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서로의 팔을 쓸어내리곤 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내가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고 또 다시 힘겹게 애쓰고 있을 때, 언제나 웃고 있는 지아다 드 로렌티스(미국의 유명한 셰프, 그녀가 읽고 있던 잡지의 표지를 의미함—역주)의 사진에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던 바로 그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내가 진실하고 용감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꼭 친구나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너는 누군가가 너 자신에 대해 뭘 알기를 원하니? 그녀는 내게 물었다. 너는 굉장해, 좋아하지 않을 데가 하나도 없어.
나중에, 나는 적당한 단어들을 찾아낼 것이다. 나중에, 나는 국경을 넘고 의식을 초월하는, 내 몸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편지를 써서 친부모에게 보낼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런 단어들을 찾아낼 것이다. 나중에, 나는 세상 사람의 시선 때문에 나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데 지쳤다고 그 여자에게 말할 것이다.
어쨌든 나에게 그것은, 사랑은 일어났다. 그때, 비록, 단어들은 나를 피해갔지만, 나는 나중에 퀴어 공동체로서 느끼는 것을 배우게 될 사랑의 환희와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내게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 여전히 행복했다. 그 시간들은 밖으로 나가기(coming out)보다 안으로 들어오는(coming in) 과정이었다. 내가 나가야 할 단단하고 편안한 고치를 지으면서 말이다.
이번 커밍아웃 여행 가방은 얇은 먼지로 덮여 있는, 등산화와 땀에 찌든 옷으로 가득 차 있는 배낭과 같은 것이었다. 이 커밍아웃 여행 가방의 지퍼는 불가마 같은 데스 벨리(Death Valley)에 익숙하지 않은 마르고 갈라진 입술이었다. 나는 그 전 해 봄 방학에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했다. 이미 양부모와 나 사이의 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미국의 가족이란, 한국의 가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나는 투쟁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낯선 가족 구조의 정당성을 인정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가족은 한 사람에게 두 명의 어머니, 두 명의 아버지, 두 명의 형제 등등등이 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내가 퀴어가 된 것은 내가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예상대로 두려움으로 무거워진 사랑으로 반응했다. 어머니는 지저분한 야외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저 상황이 너에게 힘들지 않기를 바란단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들지 마세요.” 내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여행이 끝나고 며칠 뒤 나를 불렀다. “나는 더 이상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구나.” 아버지가 내뱉듯이 말했다. 나중에 나는 아버지의 분노 아래에 숨어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고, 아버지가 내가 싸우고 있었던 것과 같은 문제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이 서로 친숙함을 잃거나 그것을 유지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때, 하지만, 나는 울었고, 내 벽장에 내가 가진 것만큼 많은 부끄러운 것(skeleton in closet: 집안의 수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뜻—역주)들이 있지 않기를 바랐다.
네 번째 여행 가방: 두 어머니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공항에서 친어머니와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울지 않았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가 빼앗겼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그때, 우리에게는 그 사이에 한 평생이 있었다. 우리는 포옹했고, 그 평생은 갑자기 한없이 크면서도 한없이 작아 보였다. 어머니는 내 여행 가방을 들었고, 우리는 긴 침묵 사이로 가끔 의미 없는 말을 한 마디씩 하면서 어머니의 차로 걸어갔다. 나는 나를 낳아준 여자를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가 생판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녀의 빛나는 하얀 아파트에 들어가고, 멕시코 식당에서 할 말이 없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함께 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면서, 서로 손을 꼭 쥔 채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날카롭고 밝은 화면을 들여다보던 여러 날이 지나가고 우리는 마침내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는 어느 날 저녁 외출했다가 커다란 캔 맥주 여섯 개를 들고 와서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나는 텔레비전의 평평한 화면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2차원 음식들을 보고 있다 고개를 돌렸다. “하나 마실래?” 여전히 자기의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쑥스러워하며 엄마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몇 안 되는 단어들은 미처 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부서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캔 하나를 들고 그것을 그녀의 캔에 부드럽게 부딪쳤다. 우리는 “건배”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 옆 소파 위에 몸을 쭉 펴고 누웠다. 우리는 그날 밤 맥주 여섯 캔을 전부 다 마셨다. (엄마는 네 개를, 나는 두 개를 마셨다.)
우리는 좋아하는 책들, 가족들,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서로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가지고 놀렸다. (엄마에게는 위켄드, 나는 프랭크 오션이었다.) 우리는 춤도 약간 추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내 눈꺼풀은 무거워졌고, 우리는 술이 취해 서로의 몸에 놀라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푹 쓰러졌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이번에 함께 … 우리가 막 데이트를 시작한 기분이야.”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딱 내 기분이에요.”
그 밤의 끝에, 나는 미국에 있는 어머니가 주신 선물을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는 포장을 풀고 파란 색과 노란 색 비즈로 만든 작은 팔찌를 꺼냈다. 내 미국 어머니께서 ‘채일리가 아주 어릴 때 제게 준 거랍니다, 저는 당신이 이걸 가지시길 바래요.’ 라고 써놓으셨다. 엄마는 그 서투른 미술 과제를 팔목에 걸고 손을 들어 빛에 비추어 보았다. 나는 내 과거와 현재를 느끼면서, 두 어머니의 존재를 너무나 깊이 느끼면서,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내 어머니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볼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에요, 없어요.’ 라고 대답하는 진실이 없는 거짓말을 듣게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 내가 깊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음악을 되풀이해서 듣고, 그녀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찢어놓기도 뛰게도 만드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나는 어머니에게 커밍아웃 한다면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예언하는 마음의 노트들을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지만, 나는 그저 두 어머니들이 우리 사랑의 기묘함(queerness)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었다. 내게 깊이, 그리고 다르게 사랑하는 두 어머니가 있다는 것. 그 특별한 순간에 우리 모두 사랑은 서로 경쟁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를 가졌다는 것. 그때 거기서, 나는 보았다고 느꼈다. 나는 들었다고 느꼈다.
며칠 전, 나는 틴더(tinder, 소셜 데이팅 앱—역주)에서 알게 된 젊은 여성과 미술 전시회에 갔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는 자루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누구와 같이 사느냐에 따라 방의 젠더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이러 유형의 공간에 존재하는 유동성에 대해 고찰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여성은 얼마 전에 할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고시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고시원 방이야말로 벽장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의 집의 넓은 공간보다 그녀를 더 자유롭게, 더 퀴어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벽장 같은 방.
우리는 한국인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는 문제에 관해 서로에게 물어보았다. 나중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마도 나중에 이곳의 엄마에게 커밍아웃 할 것이라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나중에는 그렇게 할 거라고.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던 하지 않던 나는 지금 여기 한국에서 행복하다. 퀴어한 관계들, 어떤 인습의 상자에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 관계들, 우리 사랑을 가두기에 상자는 너무 작다고 말하는 관계들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0. 들어가고 나가는 이야기
내 최초의 커밍아웃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당연히 경험한 적 있는 이야기이다. 자궁이라는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 말이다. 이 경험, 크고 무시무시한 세상으로 최초의 숨결을 내뱉은 일이 모든 유아들에게 너무나 큰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아기들은 그 기억을 차단한다고 들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도 같은 트라우마—불공정한 세상으로 홀로 태어나는—를 가지고 있다. 내 이야기는 독립적이지 않다.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내 탄생은 다른 사람들의 트라우마의 일부분이다.
퀴어들이 자기 아이들을 빼앗긴 역사를 알고 있는 퀴어로서, 나는 나를 낳아준 여성이 인큐베이터에 나를 넣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와 자기 손으로 나를 키우는 기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퀴어로서 나는, 나를 낳아준 여성이 국가가 그녀들의 비(非)핵가족적이고 비(非)규범적인 가족 구조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자녀들을 바다 건너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수천 명의 비혼모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퀴어로서 나는,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문제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딸로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커밍아웃 이야기들은 노출(emergence)과 위기(emergency)에 관한, 그리고 나에게 그 두 가지가 얼마나 하나로 엮여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커밍아웃은 두려움과 위험함이 깊이 뒤얽힌 감정들을 동반하는 사이렌의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부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 -커밍아웃에 관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관해, 출발이 되기도 하는 도착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그에 관해 쓰기에는 내가 충분히 벽장에서 나오지 못한 것 같아서,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나는 내가 이미 나온 것보다 나를 더 많이 벽장 밖으로 나가게 할까봐,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이 많은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매일 커밍아웃하거나 하지 않는 것에 관해, 그리고 그것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내 입양 문제와 얽혀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내 이야기들이 내 이야기들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과 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벽장과 내 여행 가방들 모두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져온 헌옷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이 벽장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 전부 부끄러운 존재들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 힘들었다.
오늘, 늘 그랬듯이, 나는 벽장 안에 있는 동시에 벽장 밖에 있다. 오늘, 나는 나와 함께 벽장에 있거나 내 가까이 있는 존재들을 위해, 자신들의 가족과 역사 주변의 어둠 속에 있는 존재들, 사회나 국가가 그들의 육체도 가족도 인정하지 않는 존재들, 단지 존중과 보살핌을 원하는 존재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오늘, 나는 존재하고 사랑하기 위해, 내 커밍아웃이 도착과 출발을 모두 포함하는 여행이 되기 위해, 이것이 지금으로서는 충분한 커밍아웃이 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번역: 권호영)
이 기사 좋아요 1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국경너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