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BDSM 공동체의 일상을 다룬 다큐, Violently Happy
오후의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어느 스튜디오. 흰색 매트리스를 넓게 깐 마룻바닥에 나체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래된 흉터, 부드럽게 빛나는 금발, 홍조와 반점이 자리 잡은 피부 위로 하얀 촛농이 떨어진다. 뚝, 뚝, 뚝 간헐적으로 살결에 미세한 파문을 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양초를 휘두른다. 누워있는 이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낮게 탄식한다. 곁에 앉은 이들은 면도칼로 조심스레 굳은 촛농을 벗겨낸다.
스튜디오의 통유리를 뚫고 햇살은 여전히 부드럽게 내리쬔다. 나른한 재즈 음악이 들려온다. 2012~2016년 베를린의 BDSM 공동체 슈벨라 지벤(Schwelle 7)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Violently Happy>의 첫 장면이다. BDSM이란 Bondage(구속, 속박) Discipline(지배, 징계) Sadism(가학) Masochism(피학)의 약자로, 당사자들이 합의하에 신체적인 통제나 가학-피학적 성적 행위를 하며 만족을 느낀다.
슈벨라(Schwelle)는 독일어로 문지방 혹은 경계라는 뜻으로, 주류와 다른 성애(Sexuality)를 추구하는 모임의 성격을 암시한다. 운영자 격인 펠릭스 루커트(Felixt Lukert)의 살림집이기도 한 공동체 공간에는 안전한 환경에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거나 파트너들과 BDSM을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 고통과 쾌감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즐긴다.
함께 구상한 각본에 따라 도미넌트(지배)와 서브미시브(피지배) 역할을 수행하며 일상의 자아를 벗어던진다. 바늘로 피어싱하기, 흡혈 벌레 물리기, 채찍으로 맞고 때리기, 살집을 꼬집고 물기, 줄에 묶여 간지럼 타거나 천정에 매달리기 등 이들이 역동적인 움직임은 흡사 무용 연습이나 무술 훈련, 마사지와 침술, 혹은 레슬링 경기와도 같다.
방문자들은 한 달에 15유로 가량 내고 멤버가 되거나, 기존 멤버의 초대를 받아 퍼포먼스나 파티에 온다. 많게는 3백 명까지 참여하는 이런 행사에서는 BDSM 코드 뿐 아니라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 성적 흥분을 위해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이나 동성애, 집단 성교(Orgi) 등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활발하게 나타난다.
대개 여성 참가자가 훨씬 많다.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위험한 놀이’는 남자들이 주로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선 그것도 편견일 뿐이다. 젊은 사람들이 ‘한 때의 치기’로 시도해볼 거란 예상도 금물이다. 꽤 폭넓은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 길거리에서 무수히 스쳐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 공간을 드나든다.
※ 다큐멘터리 제목에 쓰였고 인터뷰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 ‘violence’는 우리말로 흔히 ‘폭력’으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 난폭한 조치나 격렬함, 왜곡 등의 의미로도 자주 쓰인다. 문맥에 따라 유의어로 잔인함(brutality), 가학(sadism), 싸움(fighting), 강제(forcefulness), 힘(power), 격렬함(severity) 등이 있다. 본문에는 선입견과 거리를 두기 위해 ‘폭력’보다는 문맥에 맞는 다른 단어들로 주로 번역했다. 여전히 의미가 모호한 부분은 독자들이 해석할 몫으로 남겨둔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은 금세 사라졌어요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과 연출을 맡은 감독 파올라 칼보(Paolo Calvo)는 슈벨라 지벤 공동체를 처음 찾아가던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베를린의 한 영화학교에서 촬영을 전공했고, 처음에는 극영화를 만들고 싶었으나 이내 다큐멘터리라는 ‘모험’의 영역에 뛰어든 이 스페인 여성은 우연한 기회에 BDSM의 세계에 입문했다.
파올라: 한 친구를 통해서 이 공동체를 처음 알게 됐어요. 저에게 거길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어보라고, 정말 놀라운 곳이라고 적극 추천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천정에 막 매달리고 서로 양초를 붓는다는 묘사에서 곧바로 거부감이 앞서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남이 아파하는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이랑 상종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저는 SM플레이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 친구가 하도 끈질기게 설득을 해서 한번은 가보기로 했죠.
지하철을 타고 그 공간을 찾아갈 때 굉장히 떨었어요. 겁이 났어요. ‘그런 사람들’은 외모부터가 남다르고 태도도 이상할 거라는 편견이 제 안에 가득하더라고요. 그 동안 스스로를 편견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왔는데, 아주 나이브했던 거예요. 막상 마주한 사람들은 괴물 같지도 않고, 험상궂지도 않았어요.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두려움도 편견도 다 깨졌어요.
그러고 나니 이 사람들이 누군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졌어요. 잠시 지켜본 바로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한다는 게 느껴졌어요. 도미넌트-서브미시브 섹스에서도 흔한 편견과 달리, 한쪽이 지배욕을 무자비하게 행사하는 어떤 권력 관계가 아니더라고요. 서브미시브에게 사실상 행위의 결정권이 있었어요.
결국 제가 거기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 친밀해지는 과정 같은 것들에 매료가 되어 작품을 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나의 오해가 그랬듯이, 사회적으로 BDSM 성애가 너무나 부정적으로만 그려진다는 점이 와닿았어요.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는 영화를 찍고 싶기도 했고요.
BDSM 플레이는 온화한 일상을 지탱하는 방법
하리타: BDSM을 ‘변태 성욕’ ‘비정상’으로 낙인찍어온 역사가 아주 길죠. 이 주제를 파고들면서 어떤 사회적 편견들을 만났나요?
파올라: 우선 이 사회는 스스로 고통을 추구하는 것은 ‘비정상’이라고 보죠. ‘비정상’이면 특정 시설에 격리되어야 한다고 하고요. 물리적인 공격성에 있어서도 힘을 쓰려는 충동이나 동기가 아니라, 행위에 초점을 맞춰서 전혀 표출하지 못하게 해요. 물리적 공격이 눈에 안보이면 그게 평화라고 간주되고요.
아이 때부터 우리가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나요. ‘행동 똑바로 해라’, ‘착하게 굴어야지’, ‘말 잘 들어야 한다.’ 문제는 힘에 관한 그런 규율이 우리 안에 너무 깊숙이 내재화되어서 항상 억압된 상태라는 거예요. 사적인 영역에서는 규율을 깨고 벗어나도 된다는 생각조차 못하죠. 그런데 공격성은 무조건 한 쪽 구석에 구겨놓는 방식으로 관리할 수 없어요. 안전한 방식으로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해소가 돼요.
하리타: 영화에서 어떤 플레이어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BDSM 플레이 덕분에 일상에서 온화함을 유지한다고 했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세상은 온갖 폭력과 학대로 가득 차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안전하게 가학-피학, 지배-복종 충동을 해소하면 오히려 사회는 더 나은 곳이 될 거라는 얘기가 와 닿았어요. 인간에게 폭력성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거든요. 사회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겉으로 드러난 극히 일부분의 신체적 폭력에 그쳐요. ‘힘을 쓰면 안 된다’,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교묘하게 행해지는 언어적, 심리적, 성적 폭력도 매순간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고요.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정상적인 커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관계에도 다 나름의 힘의 역학이 있거든요. 물리적으로 한쪽이 다른 쪽을 때리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비폭력 관계’는 아닐 거예요. 누가 항상 져줘야만 하고, 누구는 교묘하게 조종을 하고, 말로 계속 상처를 준다거나. 어떻게 보면 친밀한 관계에는 대개 폭력적인 측면이 있어요. 당사자들이 미처 인지를 못하고 있을 수도 있고, 사소하게 생기고 쌓이는 서로에 대한 불만족, 짜증, 배신감, 서운함, 소외감 같은 것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기도 하죠. 수시로 성찰하고 대화하고 조정하는 노력 없이는 폭력적인 패턴이 굳어져 버려요. 섹스는 분명 이 모든 것이 응집되는 골치 아픈 ‘활동’이고요.
파올라: 영화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 중의 하나가 ‘섹스는 서로 다른 에너지가 충돌하는, 어떤 면에서 싸움과 같다’는 거예요. 몸과 몸이 서로 격렬하게 부딪히며 상호작용하는 거라고, BDSM를 접하기 전해서 저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상호 합의가 있다면 섹스에서 안 되고 못할 건 없다는 거죠. 미디어에 강간 장면,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형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쳐나요. 그런데 BDSM 플레이는 왜 악마화하고 터부시해요? 사람들이 그런 미디어 콘텐츠만 반복적으로 접하면, 당연히 ‘나는 그런 거 안 해’라고 하게 되죠.
이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BDSM이 오히려 건강하게 느껴질 정도다. BDSM 플레이어들은 늘 대화한다. 사전에 상의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욕구를 무시한 일방통행이 되고,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섹스 도중에는 ‘세이프 워드’(safe word)를 비롯한 의사소통이 오가고, 끝난 뒤에 눈물이 맺힌 눈들이 묻는다. “너 괜찮아?” “너무 아팠어.” 벌겋게 쓰린 곳에 약을 발라준다. 기타를 치며 감미로운 노래를 부른다. 허기를 달래려 함께 채소를 썰고 끓인다. 이렇듯 플레이어들이 늘 고통만 주고받는 건 아니다. 파도가 들이치고 나가는 일상처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모습을 다큐는 내내 평온하게 비춘다.
자기 본성을 진지하게 탐구하려 하고, 내면의 욕구에 귀 기울이는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모습들도 눈에 들어온다. 몸이 익숙해져 있는 감각의 한계치에 그냥 항복(surrender)하고 싶다고, 거기서 오는 희열이 좋다고 한다. 만사 주변을 통제하려고 하는 욕구를 내려놓고(out of control) 홀가분함을 느끼고 싶다고 한다. ‘지배 플레이’(domininant)가 평소에 느낄 수 없는 스스로의 힘을(powerful) 알게 해준다고 한다.
과감하게 섹슈얼 판타지를 표현하는 여성들
하리타: 다큐멘터리 전반의 분위기가 친밀하고 사려 깊은 느낌이었어요. 첫 씬에서 화면이 굉장히 밝고 음악도 부드럽고 경쾌했는데, 그게 관객들에게는 편견을 깨는 첫인상이 된 것 같아요. 파올라 칼보씨의 슈벨라 지벤 첫 방문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리고 카메라 앵글이나 워크가 시종일관 피사체와 가까워요.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과 몸을 가득 잡는다거나, 파트너들끼리 속닥이는 모습을 옆에서 바짝 보여준다거나. 칼이나 밧줄 같은 자칫 무서워 보일 수 있는 도구가 나온 장면도 과감하게 클로즈업을 했죠. 어떻게 이런 ‘친밀한 카메라’ 기법은 가능했나요?
파올라: 구성원들과 서서히 친해지고 공동체에 어느 정도 녹아드는, 친밀감을 먼저 만들었어요. 이 작품은 베를린에서 10년간 다닌 영화학교 재학 중에 구상했고 재정 지원도 받았는데, 당시 혼자서 촬영과 연출을 맡기에 규모가 크니까 인원을 늘리라는 피드백이 있었어요. 그래서 초반부에 저는 연출감독을 맡고, 촬영기사 2명이 따로 있었는데 아무래도 잘 안되더라고요.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까이서 찍을 수가 없었고, 분위기도 서먹하고. 결국은 그 때 찍은 부분을 폐기하고 1인 체제로 다시 촬영했어요.
하리타: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얘기해볼까요? 저는 이 작품을 퀼른 여성영화제에서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같이 봤어요. 다들 BDSM을 처음 접하는 입장이었는데요. 다큐의 연출 스타일이 체계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시적으로 흘러가고, 또 감각적이다 보니 관객으로서는 감성이 활성화되는 것 같더라고요.
예를 들어, 슈벨라 지벤 공간의 운영자이고 여러 여성들과 동시에 관계를 맺는 걸로 나오는 펠릭스에 대해서 대부분 거부감을 느꼈어요. 그가 ‘백인 중년 남성’이고 말투나 표정이 오만한 인상을 줘서 언뜻 호감을 갖기 어려웠던 거죠. ‘마치 내가 왕이 된 것처럼 파워풀한 느낌이다’라는 발언도 했고요. ‘남성 가부장’으로 인식된 이 캐릭터가 영화에서 비중 있게 나오니까, 연출자가 묘사한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는 공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뭔가 찜찜하다, 좋게 포장한 것 같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 같다는 식의 반응도 나왔어요. 사실 저는 펠릭스가 수도자, 그러니까 조용하게 자기 내면에 머무르는 개인적인 성향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성욕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수행 때문에 섹스를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실제로 펠릭스는 어떤 사람인가요?
파올라: 흥미로운 지점이에요. 비슷한 얘기(펠릭스의 이미지에 거부감이 든다는)를 한 여성 관객들이 또 있었어요. 가까이서 펠릭스를 알아간 사람으로서, 제가 보기에 그런 캐릭터 분석은 피상적이에요. 그 사람에게 독특한 카리스마가 풍기는 면은 있지만, 누굴 지배하려는 의도나 행동은 전혀 안 해요. 워크숍 강사로 나설 때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보여주거나, 새로운 도구로 자기 몸에 실험을 하는 것이고, 그 외 평소에 누군가 가르쳐달라고 오면 부담스러워 하죠.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정도이지, 멘토나 구루 역할은 거부했어요.
무용수, 안무가로 다져진 몸으로 새로운 BDSM 영역을 개척하는 사람이니 펠릭스에겐 나름의 자기 고집이나 철학은 뚜렷하죠. 하지만 그걸 남에게 강요하거나, 거기서 갇혀있지는 않아요. 저와 작업하는 2-3년 동안에도 한 번도 제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흔한 가부장 캐릭터가 아니라서 여성 멤버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아요.
하리타: 여성 캐릭터들도 궁금한데요. 마라(Mara), 크리스티나(Christine), 디에나(Diena)라는 세 여성이 주로 나왔죠.
파올라: 제 생각에는 여성들이 훨씬 파워풀하고 단단해요. 우선 더 많은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더 많이 하거든요. 댄서이자 섹스워커이고 포르노그래피 모델로도 활동하는 마라는 유쾌한 에너지를 많이 줬어요. 온갖 실험을 다 해보죠. 사실 자기도 겁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공포,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게 BDSM 플레이의 가장 큰 동기라고 했어요.
반면에 펠릭스는 보기보다 안전에 신경을 더 많이 써요. 기본 동기는 분노이고요.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마라는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거듭 진화해요. 처음에는 배우는 입장이고 서툴고 망설이고 하는데, 나중에는 스스로는 섹슈얼 힐러(healer)로 정체화하면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해요. 페미니즘 관점에서 BDSM이 왜 중요한 전복적 도구인지 말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기도 했죠.
디에나와 크리스티나는 펠릭스와 연인 관계인데, 그 사람한테 미치는 영향력이 커요. 셋이서 따로 또 같이 조곤조곤 대화를 많이 나누고 나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는 건 펠릭스에요. 슈벨라 지벤에 항상 여자들이 훨씬 많았는데, 저는 그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봐요. 신체적 고통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이나 회피는 다 똑같은데도, 여성들이 그 극복을 더 많이 시도한다는 거죠. 사실 더 강한 겁니다.
하리타: 파올라 칼보씨는 프로젝트를 이끈 사람으로서 영화 뒤편의 캐릭터예요. 몇 년 동안 슈벨라 지벤과 동고동락하는 경험이 어땠나요?
파올라: 사실은 굉장한 기쁨을 많이 맛봤어요. 열심히 찾아 헤매지 않았는데도, 그동안 내가 품어온 생각들, 세계관에 동감하고 심지어 그걸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난 거예요. 가령, 저는 서로를 아주 사랑하면서도 자유롭게 해주는 그런 연인 관계를 항상 원했거든요. 모노가미(monogamy, 일 대 일 연애) 말고 오픈 릴레이션십(open relationship)이 맞다고 느꼈어요.
한 명 이상의 연인을 두면서도 온전히, 충분히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는 취지의 얘기를 18살 때 첫 남자친구에게 했는데, 못 받아들여서 헤어졌어요. 웃기는 건 2년 전에 얘를 다시 만났는데, 글쎄 제 말에 이제 공감한다는 거예요. “미안한데, 너무 늦었다. 15년이나.” 저는 그랬죠. 그 남자애는 결혼하고 애까지 낳더니, 이제 모노가미는 더 이상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거예요. 뭐, 요즘 젊은 세대는 폴리아모리나 팬섹슈얼(범성애) 같은 아이디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긴 해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가? 아무튼,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됐다니까요. ‘아, 나 혼자가 아니구나. 바뀔 수 있겠구나, 아니 바뀌고 있구나.’
의심하라, 나는 BDSMer인가?
베를린에서 파올라 칼보 감독과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때의 흥분과 깨달음을 잊지 않으려고 그녀가 준 영화 DVD와 포스터를 책상에 세워두었다. 어떻게 하면 더 파워풀하고 즐겁고 다른 섹스를 할 수 있을까, 나의 욕구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틈틈이 궁리하고 있다.
나는 사실 모든 섹스는 대화를 동반할 수 있고, 그럴 때 서로에게 더 큰 쾌감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섹스는 몸으로 이심전심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서로 물어가며 하는 건 민망해하는 모양이다.
나와 파트너는 섹스 전에 항상 대화를 한다. 도중에는 서로의 상태를 묻고 살피고, 요청을 주고받고, 끝나면 각자의 감각과 감상을 구체적으로 나누려고 한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온갖 속 얘기를 하게 되게 된다. 지금 기분이 어떤지, 왜 그런 기분인지에서 출발해 차분히 서로 묻고 답하다 보면 바쁜 일상에선 미처 알지 못했던 상대방의 속내를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된다. 실제로 ‘행위’를 하는 시간보다 같이 누워서 얘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곤 한다.
나: 오늘은 내가 오르가슴 탈 때 젖꼭지 세게 꼬집어줘. 평소보다 세게.
우리의 대화를 복기하다 보니, 문득 우리도 얼마쯤은 BDSMer다.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있으니 이를 포용하자’는 입장이 더 이상 아니다. ‘남 얘기’일 뿐 아니라 ‘내 얘기’이기도 한, 비주류 섹슈얼리티의 설 곳을 찾는 정치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 지역(독일 프라이부르크)에 슈벨라 지벤이 찾아와 행사를 연다기에 찾아갔다. 알고 보니 집주인과의 갈등으로 스튜디오 공간을 비워야 했고, 그 이후로 적당한 집을 찾지 못해 여러 도시를 찾아다니며 워크숍과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행사는 2회에 걸친 일종의 이론 강의와 실전 워크숍으로 구성되었다. 장소는 흥미롭게도 이 도시에서 가장 ‘규범적인’ 주거 밀집 지역 내 주민센터 강당. 백인, 중산층, 가족, 녹색당원들이 주로 사는 구역에, 그것도 평소에는 가족영화 상영회나 주민 건강 강좌가 열리는 방이었다. 벌써 입가에 미소에 근질근질 올라왔다. 이거 참 발칙하네.
펠릭스는 예의 차분한 얼굴로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진행자의 소개 멘트가 시작된다. 좌중을 둘러보니 평소 나가는 폴리아모리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눈에 띈다. 이 여자도 호기심이 대단하구나! 우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더 아는 사람은 없지만 다들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한 얼굴의 동네 주민들이다. 아이들이 다 독립하고 부부만 남은 반백의 중년남녀, 귓속말을 속닥이는 젊은 여성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가복장을 두른 흑인 청년… 우리는 모두 펠릭스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BDSM은 몸의 예술입니다. (…)”
파올라의 말마따나 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이성애, 기독교, 가족주의 규범에 더 이상은 순응하지 않겠다는 행동파들이 이렇게 많다.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길고 다채로운 젠더-섹슈얼리티 프리즘 어딘가에 나의 삶, 나의 욕망도 있다. 소속감과 연대감이 주는 이 편안함은 어떻게 ‘격렬한 행복’(violently happy)으로 이어질까. 여태껏 살면서 배운 것, 해온 것, 믿어온 것들을 송두리째 의심하는 이 순간들이 좋다. 낡은 것들에 ‘무효’를 선언하고 새로운 상식과 기준을 쌓아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사도마조히즘, 춤, 명상의 공통점은? <Violently Happy>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베를린 사람들의 모임에 대한 내밀한 육체 다큐멘터리이다. 500평방미터의 햇빛이 환한 거실에서 발칙한 섹슈얼 판타지들을 실현하는 슈벨라 지벤. 안전하고 친근한 공간에서 격한 힘을(practice of violence) 쓴다는 것은 인간 문명의 진화 현상일까? 관객들에게 베를린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육감적이고 로맨틱하고, 또한 거칠고 도발적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여행!” -다큐멘터리 Violently Happy 시놉시스 중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를 출간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와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글쓰고 행동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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