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부하 여군을 강간한 두 명의 해군 간부를 처벌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 올라온 건, 지난 9일(금)이다. 성소수자인 여성 해군대위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해군 간부 두 명에 관한 사건을 고발하는 글에는, 피고인B에 대해 원심 판결(징역 8년형)을 뒤집고 2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는 것과, 피고인A에 대한 2심 판결 또한 낙관적이지 않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정말 며칠 뒤인 19일(월), 고등군사법원은 피고인A에게도 원심 판결(징역 10년형)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시민단체들도 이번 판결을 규탄하는 논평을 잇달아 내놓았다. 오늘 오전 10시, 국방부 정문 앞에서는 군관련성소수자인권침해.차별신고및지원을위한네트워크,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의 단체들이 <해군 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항의했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말을 더 신뢰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는 “1심에선 가해자A에 대한 상습적 강제추행(10건의 강제추행과 2건의 강간) 및 이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대한 공소 사실을 전부를 인정하고 10년형을 판결했는데, 왜 고등군사법원에선 그 전체 공소 사실이 무죄로 판단되었는지 굉장히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고등법원은 원심의 판단과 대조하면서 또 한편으론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고등법원은 피고인이 계속 연인 관계를 주장하고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주장했는데, 고등법원은 ‘연인 관계라는 주장은 믿지 못하겠다’며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의 진술에 대해서도 본인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진술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본인에게 있었던 일을 대체로 정확하게 경험한 사실대로 진술했다는 것은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등군사법원이 피해자의 진술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해서, 그 진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최란 여성주의상담팀장은 고등법원이 “서로 사귀는 사이였다는 가해자A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도, 피해자가 가해자A를 ‘아저씨’라 부르며 ‘아저씨 뭐하세요?’ 같은 문자를 보낸 걸 본 적이 있다는 피고인 부인의 증언과, 또 다른 가해자인 B가 피해자와 피고인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걸 보고 ‘둘이 사귀는 것 티 내냐, 자중하라’고 질책한 사실이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채택했다”고 설명하면서, “성소수자인 피해자가 (이성인) 가해자A에게 성적 호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면서 오히려 “가해자A의 최측근인 부인과 또 다른 가해자인 B의 진술을 근거로 채택”한 것이다.
또한 최란 팀장은 “가해자B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피해자를 자신의 관사에 부른 사실도 없다고 진술했다가 ‘강압적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취지이고 와도 된다고 말한 적은 있다’고 말을 바꿨음에도, 재판부는 ‘묵시적 합의’에 의해 가슴을 만지고 키스를 한 적은 있지만 성폭력은 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을 신뢰했다”고 말했다.
결국, 재판부는 피해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가해자의 말을 더 신뢰했고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차혜령 변호사는 “재판부가 ‘이것은 폭행, 협박으로 인한 강간 피해가 아니다, 무기력하게 반응하지 못한 것은 강간죄에서 요구되는 폭행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점도 문제”라고 짚으면서 “강제추행 10건이 모두 무죄가 나온 것 또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보통 강제추행은 강간죄와 달리 폭행 협박의 범위, 수준에 대해서 기존의 대법원 판례도 굉장히 유연하게 판단하고 있는데, 이번 판결은 그런 대법원 판례와도 배치된다”는 것이다.
군에서 상관의 말은 ‘협박’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분노와 참담함을 느낀다”고 발언을 시작한 ‘젊은여군포럼’ 김은경 대표는 “폭행, 협박이 없다고 한 이 판결은 군 내 여군의 위치와 소수자성, 그리고 군의 계급, 공동체, 명예로 인해 피해자들이 성폭력 앞에서 취약해 지는 지점을 무시한 결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군은 여전히 전 군의 5~6% 수준의 작은 소수자”라고 말한 김은경 대표는 특히 해군의 경우 “함정 내 150명 정원 중 5~10명 미만의 여군이 배치되며 이번 사건의 경우엔 100여명이 넘는 군인 중 여성은 피해자 1명밖에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여군은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함정은 격자로 나뉘어져 있고 견고한 철문을 닫으면 소리도 안 들려서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모른다”고 설명하며 성폭력에 취약한 환경을 설명했다.
또한 폭행, 협박의 여부를 따지는 게 어이가 없다는 듯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는 대체로 낮은 계급이고, 가해자는 계급이 높거나 상관인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군대에서 상관의 말과 행동은 무조건 옳은 것이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기 때문에 협박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재판부가 협박을 인정하지 않는 건 군대를 모르기 때문인데,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군사법원이 군대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다.
김은경 대표는 이 판결은 “군대 내의 공동체 의식과 여군들의 명예심도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남자들도 가기 싫어한다는 군을 자기 스스로 선택한 여군들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하는 자존감은 담담한 행동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재판부는 이를 ‘피해자답지 않음’으로 평가 절하한다”고 토로했다.
군사법원은 성범죄자의 방패막?
군사법원의 반복되는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군인권센터 방혜린 간사는 “성범죄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외면해 온 군사법원의 오랜 적폐”라며, “군사법원이 성범죄자의 방패가 되어 피해자의 존엄을 짓밟고 가해자를 무죄로 풀어주는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방혜린 간사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군사법원이 성범죄자에게 실형을 선고한 비율은 고작 11%, 148건에 불과하다. 동일 기간 일반 1심법원에서 성범죄자에 대한 실형 선고율이 20퍼센트대를 유지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턱없이 모자란 수치”라고 밝혔다.
2017년 5월 해군 여군 대위가 상급 부서장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후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직권조사에 들어간 국가인권위원회가 <군대 내 성폭력사건 근절을 위한 정책 제도 개선>안을 국방부 장관에게 권고한 자료에서도, 군대 내 성폭력 사건 처리 관련 문제점으로 ‘온정적 처벌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군사법원에서 선고한 전체 성폭력 사건 중 피해자가 여군인 사건의 ‘선고유예’(비교적 경미한 범죄에 대해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유예기간 동안 별다른 사고가 없으면 형의 선고를 면하게 해줌) 선고 비율이 지난 3년 6개월간 약 10.34%로, 일반법원(2016년 1심 선고유예 비율은 1.36%)에 비하여 현저히 높은 편이라는 거다.
방혜린 간사는 이런 결과가 나오는 배경으로 “군사법원이 군 수뇌부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아서 법관이 지휘부의 눈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 “판사, 검사, 변호인이 전문성을 가지고 임명,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휘부의 입맛에 따라 내부의 순환보직으로 관리되는 점”을 꼽았다.
또한 “군사법원의 전관예우 행태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가해자 측은 고등군사법원의 군판사와 해군본부 법무과장을 지냈던 고위 법무관 출신 변호인을 선임했고, 예비역 변호인에 대한 전관예우로 의뢰인인 성범죄자에게 감형을 해 주는 관행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군사법원의 악습”이라는 거다. 그렇기에 “이런 태생부터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편향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는 군사법원이 존치되는 한, ‘군대 내 성범죄 척결을 위한 노력’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가해자들은 ‘성소수자’ 군인이라는 사실을 약점 삼았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여성군인인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이다. 군대에서 여성이 놓이는 취약한 지위만큼이나 성소수자가 갖는 취약성도 크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고인A는 피해자가 성소수자라는 점을 알고서 ‘네가 남자랑 관계를 제대로 안 해봐서 그런 것 아니냐’, ‘남자 경험을 알려준다’며 추행 및 강간을 저질렀다고 피해자는 진술했다.
군관련성소수자인권침해.차별신고및지원을위한네트워크 이종걸 활동가는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약점 삼아 성폭력을 저질렀다”며. 이건 “성폭력 범죄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성소수자 여성) 인권 침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성소수자 군인들은 성폭력 피해를 알리기도, 그 이후 제대로 사건을 해결하기도 어렵다. 많은 성소수자 피해자가 아웃팅시키겠다는 가해자의 협박, 그리고 동성애자인 피해자가 성폭력을 유발했으리라는 왜곡된 사회적 통념에서 기인한 2차 피해를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재판을 진행하기까지 이번 사건의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자회견 참가자들과 연대 단체들은 이번 판결이 성소수자와, 여군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재판부의 무지와 통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비판했다. 많은 이들이 다시 제대로 된 재판이 진행되기를 원하고 있는 가운데, 군 검찰은 A, B에 대한 상고장을 각각 대법원에 제출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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