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한국 사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놓고 다시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논점은 ‘태아의 생명권’이냐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냐에 머물러 있다. 이제는 ‘태아 vs 여성’이라는 허구적 구도를 깨고, 여성도 한 시민으로서 ‘재생산권’을 말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사회 각계에서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주체로서 여성의 위치 회복, 재생산권이란?
“먼저 국가에게 여성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시민권’적 주체인가? 질문을 던지고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22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재생산권 확보를 위한 법제도 개선 방향 모색 토론회–낙태죄 자, 이제 재생산권이다!>에서 한국여성민우회 김민문정 상임대표는 “권리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서도 ‘재생산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이 말이 생경한 사람들이 많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류민희 변호사는 “영어로는 줄여서 SRHR,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개념을 설명했다.
“1994년 카이로 ‘인구 및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재생산권은 모든 부부와 개인이 자녀의 수와 이에 관한 시간적, 공간적인 환경을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 수준의 성적, 재생산적 건강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차별, 강압,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재생산에 관한 결정을 내릴 권리를 포함’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리고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회의에선 ‘여성의 재생산적 건강은 만족스럽고 안전한 성생활, 재생산 능력 그리고 그 시기와 방법을 결정할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고 덧붙였다.
‘낙태죄’로 인해 재생산권은 얼마나 침해당하고 있나
고경심 산부인과 전문의는 “전체 임신중단 중 4.5%만이 합법적인 것에 해당한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음성적으로 시행되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은 통계적으로 정확히 산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도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음성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고, “전체 의료비 및 환자의 부담을 상승시키고 정확한 통계 및 역학조사를 어렵게 한다”는 설명과 함께. 특히 몇 백만원까지 드는 고비용으로 인해 여성들의 “접근성을 심각하게 제한”한다고 덧붙였다.
비용이나 통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법’이라고 못 박혀 있는 탓에, 의사들 또한 관련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그만큼 좋은 상담과 의료를 제공할 수 없게 된다. 개인이나 커플이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할 때 “올바른 정보나 지식을 제공받을 창구가 필요”함에도, 병원에서 이를 제공받기 어렵다.
고경심 전문의는 “임신 주수가 길어질수록 인공임신중단으로 인한 후유증과 위험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안전한 수술을 해야 함에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거나,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높은 의료비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빨리 안전하게 수술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게 되기도 한다.
또한 “인공임신중단 이후에도 사후 건강관리 및 피임에 대한 상담이 필요”하며 “특히 임신중단 이후 2주 이내 배란이 재개되기 때문에 바로 피임이 필요하다는 정보 등이 제공”되어야 함에도, 그런 서비스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낙태’가 ‘죄’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안전하게 재생산을 계획하고 실행할 권리, 관련된 교육과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가 차단되어 있는 현실이다.
국가가 인구를 선별해선 안 된다
현행법의 ‘낙태죄’를 바탕으로 국가가 그동안 인구를 통제하고 선별해왔다는 건 이제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관련 기사: 인권이 아닌 인구’에 따라 임신중단 담론이 바뀌다 http://ildaro.com/8123) 그러니까 한국에서 현재 재생산권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
그걸 뒷받침 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현행법 상 ‘낙태’는 죄임에도, 국가가 모자보건법을 통해 예외적으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하는 사유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우생학적 사유와 윤리적 사유, 의학적 사유. 그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우생학적 사유다. 임부 본인과 배우자에게 유전한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를 뜻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정혜 연구위원은 “우생학적 사유를 예외로 두는 방식은, ‘인간 종의 개선’이라는 우생학전 관점에서 태아의 장애 여부 및 장애 가능성 등에 따라 생명의 가치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설명했다. 태아의 생명권이 중요하다는 판단 하에 인공임신중단을 금지하면서, “태아를 구분하여 인공임신중단을 허용한다는 게 모순”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더구나 “현행 규정은 태아의 건강이 아니라 부모의 건강 상의 사유를 통해 태아의 건강을 간접적으로 추정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라고 언급했다.
‘태아의 생명권’을 이유로 인공임신중단을 불법화했으면서도 ‘장애나 질병이 있는 이들’의 임신중단은 국가가 적극 허용하고 있다. 이는 국가가 장애/질병을 가진 이들의 재생산권을 제한/박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는 걸 내버려두면, ‘그 개인과 집단에 누가 포함될 것인지’ 범주를 둘러싼 논쟁 또한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김정혜 연구위원은 그렇기에 “임신중단의 허용 사유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녀수, 임부의 연령, 경제적 여건, 생활 조건, 기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부모의 질병 및 불안 등 양육 능력 등’의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하는 방식은 여성을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 권한을 보유한 주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여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신중단을 하는 일종의 ‘피해자’로 만든다”고 분석했다. 결국 재생산권리가 오롯이 개인에게 주어지기 위해선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낙태죄 폐지가 끝 아니라, 재생산권 논의의 시작”
‘낙태죄’는 여성이 임신중단을 결정할 권리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재생산권을 획득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폐지돼야 한다는 게 이번 토론회의 주요 요점이었다.
류민희 변호사는 프랑스에서 재생산권 운동을 하는 단체인 ‘플래닝 패밀리얼’(Le planning Familial)에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곳 활동가로부터 ‘프랑스에선 1975년 인공임신중단이 합법화되었지만 2004년까지도 임신중단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정부 기관의 공식 사이트조차 없었다. 법적으로 임신중단만 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게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에선 재생산권 논의가 구체적인 단계까지 오진 않았다”고 진단한 한국여성민우회 김민문정 상임대표는 “더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기본적인 산부인과 관리를 받을 권리/ 재생산 건강 관련 자원의 이용가능성, 접근가능성, 수용 및 적용 가능성, 질(質)을 보장할 권리/ 원하지 않는 임신을 종결할 권리,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단으로부터 보호될 권리/ 강제 불임시술을 거부할 권리/ 피임 지식과 수단을 전달하고 교육 받을 권리/ 자신의 성별, 결혼여부, 지위, 연령, 성적 지향, 인종 정체성, 건강 상태 및 장애를 이유로 차별 받지 않고 이와 관련한 부당한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등의 이야기를 앞으로 가열차게 해야 한다”고.
더 이상 ‘태아 vs 여성’이라는 허구적 구도에 갇힐 필요가 없다. 앞으로 재생산권 논의를 통해 더욱 힘 있고 당당하게 ‘낙태죄’ 폐지와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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