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곳, 교회
2015년 온라인에서 여성혐오에 반발하며 탄생한 메갈리아, 2016년 강남역 여성 표적 살해 사건 이후, 나는 기존의 세계가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교회는 너무나 잠잠했다. 내 안에는 페미니즘이 파도치고 있는데, 교회에 가면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설교를 들었다.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목사님께 물었을 때는 ‘페미니즘은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죄악’이라는 혐오에 혐오를 더한 답변을 듣기도 했다.
분명 교회 안에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진 자매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차별에 불편함을 느끼는 자매들이 있었지만, 교회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 바로 몰아치는 반격으로 인해 우리는 좀처럼 연결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점처럼 흩어진 채 외로워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교회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설교를 들을 때, 성경을 읽을 때, 다른 교회 사람들과 만나 말할 때, 교회 봉사를 할 때도 순간순간 차별을 느끼며 화가 났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내 생각과 감정이, 내가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혹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움직임은 아닌지 홀로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믿는페미”가 생겼다. 교회 내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교회 내 당연시 여겨졌던 가부장적 문화에 균열을 내기 위해, 지워졌던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크리스천 페미니스트들이 한 땀 한 땀 ‘짓는예배’
2017년 3월 달밤(활동명), 더께더께, 오스칼네고양이 이렇게 세 사람이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단체 믿는페미를 만들어 온오프라인 활동을 시작했다. 기독교 안에서도 여성운동을 해온 단체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목소리를 표출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막 터져 나오는 날것의 목소리를 낼 장이 필요했다.
믿는페미는 책 모임을 통해 오프라인 모임을 시작했고, 팟캐스트와 웹진을 만들어 교회에서 느낀 여성혐오와 차별적 문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나만 이러한 교회문화가, 소수자를 혐오하는 설교가 불편했던 것이 아니구나’ 하고 공감했다.
믿는페미 활동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팟캐스트 방송이다. “믿는페미, 교회를 부탁해”라는 이름으로 2017년에 파일럿 방송을 시작했고, 2018년부터 정규방송을 하고 있다. 여름수련회 특집, 몸, 교회 내 성폭력, 혼전순결과 섹스, 성소수자 특집, 낙태죄 폐지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작년에는 사연 중심의 방송을 했는데, 청취자들이 교회에서 직접 겪었던 차별과 고민하는 점을 사연으로 많이 보내주었다. “여름 수련회 때 옷이 짧은 자매들을 향해 목사님이 ‘여자애들이 요즘 너무 짧게 입고 다니는데, 그러면 안 되지만 목사님은 고맙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는 이야기, 데이트폭력을 주제로 다루었을 때 들어온 사연 절반이 ‘신학생에 의한 성폭력’이었던 점 등이 기억에 남는다.
또 필진 여섯 명이 매주 돌아가며 웹진 <날것>(midneunfemi.tistory.com)에 글을 연재했다. “OO,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시리즈(OO에는 각각 ‘가부장제의 성별 분업을 가르치는 자여’, ‘맨스플레인하는 남자 전도사들아!’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고한다’ 등이 언급되었다)를 비롯하여 “나를 즐겁게 하는 것”, “몸”, “먹고사니즘”,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교회에서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글을 꾸준히 쓰고 공개적으로 글을 올리는 경험이 처음이어서, 때로는 거친 글이 나오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는 페미니즘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거나, 교회에 대한 내용이 아닐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크리스천 페미니스트인 우리 삶이 그와 무관했던 적이 없으므로 모든 글은 페미니즘적이고 기독교적이었다. 말할 곳 없던 우리가 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가, 교회여성으로서 금기시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활동이 ‘믿는페미’스러움이기도 했다.
믿는페미는 여성주의 예배인 ‘짓는예배’를 구상하여 실천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예배는 다분히 남성중심적이다. 대부분 교회 신도들은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채 도구화된다. ‘남성’목사가 예배를 진행하고 설교하며, ‘남성’장로가 기도를 한다. 성찬(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를 기억하는 예식)과 같은 집례도 ‘남성’이 맡게 된다. 남성목사의 설교 또한 젠더 감수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남성중심적 예배와 설교로 인해 실망하고 배제된 사람들이 여성주의 예배를 통해 회복하고 위로받기를 바라며 2017년에 처음으로 ‘짓는예배’를 기획했다.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한 땀 한 땀 지어가는 예배라는 의미로 ‘짓는예배’라고 이름 붙였다. 설교자, 성찬 집례자 등 예배 순서를 맡은 사람을 여성으로 배치하고, 성차별과 억압과 혐오로부터 안전한 예배를 지향한다. 설교 또한 성경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식, 성경 속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혐오와 차별에 분노하는 기도, 교회 성폭력을 근절하고 피해자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매년 강남역 여성혐오 범죄를 기억하기 위한 예배를 ‘짓는예배’ 형식으로 드리고 있다. 올해는 다른 기독교 단위와 연대하여 강남역 여성혐오 범죄 추모예배와 더불어 교회 성폭력 공동체적 해결을 위한 예배로 드린다.
믿는페미가 가능하냐고?
믿는페미는 기독교인이자 페미니스트인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며 질문한다. 가령 교회에서는 ‘어떻게 페미니즘 같은 다원주의적 문화, 비(非)성경적이고 위험한, 문란한 사상을 들여오느냐’며 우릴 비방한다. 한편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남성 하나님을 믿는 가부장적 종교,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대표 집단의 일원인 기독교인이 어떻게 페미니스트일 수 있냐’고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 때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면 왜 교회를 떠나지 않느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한 질문들 사이에서 믿는페미는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긍정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믿는페미가 가능한 증거라고 말한다.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믿는페미를 처음 만났는데, 믿는페미라고 스스로를 불렀을 때 느낀 위안을 기억한다. “그래 맞아, 나는 ‘믿는페미’였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야. 나는 두 가지 정체성을 교차하고 있어”라고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성서는 가부장적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 수천 년 전 쓰인 텍스트이기에 당시의 차별적인 시대와 문화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성서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들여다보며 믿는페미는 희망을 찾는다. 기존의 불의한 체제에 항거했던 예수, 당시 권력을 잡은 사람들 편에 서지 않고 약자와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를 볼 때, 여성이 물건으로 취급되던 시기임에도 성서 속에서 모두 다 지워지지 않고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들의 이름을 발견할 때, 우리는 믿는페미의 가능성을 찾는다.
기존 ‘남성’으로 상징되었던 하나님의 모습을 벗어나 다양한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상상한다. 내 신앙의 지향과 페미니즘의 지향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으며, 믿는페미는 “태초에 하나님이 페미니스트셨느니라” 하고 고백한다. ‘메갈년’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편에 예수가 함께 서서, 함께 핍박받고 있다고 믿는다.
무급의 활동들, 보람차지만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는…
2019년 현재 달밤, 도라희년, 새말, 오스칼네고양이, 폴짝 총 다섯 명이 믿는페미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팟캐스트 “믿는페미, 교회를 부탁해” 멤버들, 책모임 “노브라” 멤버들, 웹진 “날것” 필진이 각각 구성되어 있다. 아직 회원이나 후원구조가 없으며 굉장히 느슨한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월 2회 이상 실무회의를 하고, 급하게 정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메신저 채팅방을 통해 논의하고 결정한다.
느슨한 모임의 좋은 점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바로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논의하는 인원이 다섯 명이니, 회의 때 이야기해서 모두가 동의하면 바로 추진할 수 있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회의 뒤풀이 중 희년님이 “어떤 사람이 믿는페미에서 수련회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줬는데, 언젠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을 꺼냈다. 나는 그 말을 덥석 물어 바로 날짜를 잡았고, 한글날에 맞춰 제1회 믿는페미 <짖는 수련회>를 열게 되었다. 나중에 ‘이렇게 바쁘고 힘들 줄 모르고 대책 없이 추진했다’는 약간의 후회도 남았지만, 하고 싶은 활동을 실현시킬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올해 진행한 ‘낙태죄 폐지’ 관련된 활동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달밤님이 책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저자들, ‘무지개예수’(성소수자 그리스도인 및 성소수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와 함께 무언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실무 멤버 모두가 그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2월에 <교회 X 낙태죄: 배틀그라운드> 공동체상영 및 북토크 행사가 추진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믿는페미가 앞으로 기독교 내에서 낙태죄 폐지 이슈를 어떻게 끌고 갈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처럼 논의구조가 복잡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빠르게 실현시킬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인 활동의 동기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고민도 안고 있다. 현재 실무를 맡은 멤버들은 모두 본업이 따로 있고, 믿는페미 활동으로는 금전적인 보상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시간과 노동력, 자비를 들여 활동한다. 먹고살기 바쁜 일상에 치여서 때때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버거운 순간들이 있다. 멤버 중 누군가 ‘너무 힘들어서 이제 더는 활동을 못하겠다’고 말하면, 그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비금전적 보상들, 이를 테면 활동을 하며 느끼는 충족감, 활동 경험의 축적, 공동체에서 느끼는 연대감 등이 우리에게 보상이 되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소진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믿는페미 3년 차를 맞이한 지금, 지속 가능한 운동을 위해서 어떻게 기틀을 마련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교회의 백래시
많은 한국교회가 보수성을 띠고 있는 현실에서, 때로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교회 바깥보다 몇십 년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교회 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낮다. 심지어 ‘성평등’이라는 단어에도 굳이 ‘양성평등’이라고 써야 한다며 반발하는 수준이다. ‘젠더’라는 용어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용어라고 여긴다.
한국교회는 여성과 남성이 다르게 구분되어 지어졌다고, 서로 역할이 다르다고 말한다. 성차별을 하나님께서 주신 섭리이자 질서라고 은혜롭게 포장한다. ‘남편은 가정의 머리이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목사의 주례를 결혼식장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안 불평등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거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마주치는 백래시(backlash, 사회의 진보적인 변화에 따라 기득권층이 영향력이 약해졌을 때 그에 대한 반발심리 및 행동)는 거세다. 성경의 문장이나 해석에 의심을 가지는 행동, 설교에 문제 제기하는 행동 등을 모두 ‘불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올바른 신앙을 가졌는지, 이단은 아닌지,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아닌지 온갖 사상검증을 해댄다.
교회에 가진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곳을 바꿔보려고 애쓰다가, 교회 공동체에서 배제당하는 경험을 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례로 믿는페미 멤버 중 희년님은 교회학교 교사들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던 중에 공격받았다. 어떻게 교회에서 ‘젠더’라는 단어를 쓰느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교회 세력을 와해하려는 진보 좌파’로 몰렸다. 믿는페미 활동에 대해 공격을 받았고, 면전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며 욕을 먹었다.
나의 경우에는 SNS에 퀴어문화축제 사진을 올리고 나서,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내게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고,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믿는페미를 알고,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좀처럼 바뀌지 않는 교회의 가부장적 문화와 페미니스트에게 몰아치는 백래시, 거기에 시간과 에너지 부족이라는 개인적 상황들까지…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함께하는 멋진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믿는페미가 아니었으면 접점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 다른 경로로 살아온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 것이 신기하다. 각자 가진 다양한 장점이 있는데, 어떤 멤버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퐁퐁 샘솟고 추진하는 힘이 있다. 어떤 멤버는 그것을 꾸준하게 지속해가는 힘이 있다. 또 다른 멤버는 꼼꼼하게 진행 상황을 챙기고, 현실화를 시키기도 한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 멤버도 있고, 글로 감동을 주는 멤버도 있다. 누군가는 멋진 디자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
서로 맞추어가고 보완해가면서 새로운 일을 벌이고, 보고 싶은 그림이 실현되는 과정이 즐겁다. ‘교회의 변화’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만들어간다는 점이 유쾌하다. 지금은 멀어 보이지만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서, 함께 가는 길이라서 힘이 생긴다.
우리의 또 다른 활동 동기는 믿는페미 활동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계속 그러한 관심에 우리가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믿는페미 활동이 공감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순간에 믿는페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활동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온오프라인에서 듣는 응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큰 힘이 된다.
“교회에는 페미니스트가 저 혼자인 것 같았는데, 믿는페미를 알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의 활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서 닿았구나 하고 뿌듯해진다. 그러한 반응들을 접하며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고 느낀다.
언젠가 이루어질 평등한, 평안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지금 믿는페미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몇 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우선 교회 내 페미니즘 운동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짜야 할지에 관해서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낯설고 불편하게 여기는 교회 안으로 침투하려면 어떠한 전략이 필요할까?
한 가지 전략은 ‘세 겹 줄 만들기’이다. 성경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는 말씀이 있다. 교회에서 혼자 싸우기에는 너무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동지를 만들어 싸움을 시작하자는 전략이다. 적어도 세 명이 있으면 상처 받았을 때 회복할 수 있는 지지기반, 쿠션 역할을 할 수 있다. 더불어 기독교의 언어로 페미니즘을 어떻게 재구성할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믿는페미 문화’를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짓는예배’처럼 여성주의 관점에서 드리는 예배, 여성주의 관점에서 성서를 묵상하는 큐티책 만들기, 지역 투어, 정기 모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페미니즘 신앙교재 만들기 등을 상상해보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믿는페미 문화를 개별 교회에 확산시키고 싶다.
‘믿는’의 범위와 영역에 대해서도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믿는페미는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 안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단체다. 그렇지만 우리의 활동이 개신교 안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은 개신교와 다른 문화가 존재하지만, 성서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으며, 여성혐오적 교회문화가 가톨릭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또한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성직자의 권력, 신의 권위를 내세워 성직자가 피해자를 길들이는 ‘그루밍 성폭력’ 양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교차되는 상황들 속에서 믿는페미가 다른 종교와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는페미’라는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사실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불안정한 삶을 떠돌아다닌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청년들이 그렇듯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우리의 삶도 바꾸기 어려운데, 과연 우리가 바라는 대로 교회 문화가 바뀔까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절망이 우리를 채우려 할 때는 언젠가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꿈꾸어본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노는 곳. 차별도 배제도 없이 내가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나다울 수 있는 평안한 공간을 꿈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거기에 가까운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꾼다. 꿈꾸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즐겁게 함께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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