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전공생 아닌’ ‘여성’이 영화 현장에서 겪은 일들
‘영화라는 것을 만들고 싶다. 그런데 학교에 영화과가 없다.’
단순한 두 가지 이유로 무작정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던 2011년. 그로부터 약 2년여 시간 동안, 영화를 향한 나의 맹목적이고 열렬한 사랑은 좀처럼 꺼질 줄 몰랐다. 그리고 3년째 되는 날. 커져가는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몰입하게 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할 때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기간에 겪은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영화에 대해 결코 예전과 같은 애정을 가질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그 두 가지 사건 정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 영화 학교 현장에서 목도한 성차별과 폭력 미수 사건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이 성차별과 폭력 미수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나는 그날 택시 안에서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연출 감독을 오히려 다독여줘야 했다. 괜찮다고 씩씩하게 얘기했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남성이 100%였던 촬영팀은 어린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연출부들을 마치 소개팅에 나온 상대인 것처럼 취급했다. 촬영 감독은 쉬는 시간마다 누가 너 좋대, 너랑 만나고 싶대, 라며 다리를 놓기에 바빴다. 연출부 동료가 불쾌한 얼굴로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대답하지 못할 때도, 누구 하나 이를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찍힘’에 들지 못한 연출부들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어야 했고, 이 불편한 감정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었다.
나는 ‘찍힘’에 들지 못하는 여성이었고, 그들의 연애 대상에서 제외된 탓에 조그만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며 폭력 미수를 (나에게 달려드는 것을 근처에 있던 동료 남성들이 막아섰다) 선사한 촬영 감독 앞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때 처음으로, 영화가 나에게 슬픈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내가 연출로 있을 때 찾아왔다. 당시 나에겐 정말 ‘개처럼’ 일해서 번 돈 8백만 원이 수중에 있었고, 당연히 그 돈을 몽땅 투자해 영화 현장을 꾸렸다. 장르 영화에 미쳐있었기에 무모하게도 판타지 스릴러를 택했고, 나름의 애정과 번민을 쏟아부어 만든 시나리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나는 주인공 캐릭터가 나의 ‘페르소나’라고 떠들고 다녔다. 주인공의 곁에는 내 지인의 모습을 본 딴 캐릭터가 조력자로 등장했다. 이때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후에 캐스팅된 배우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던 한 물음이, 내 영화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런데, 감독님은 여성인데 페르소나가 왜 전부 남성 캐릭터죠?”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결국 그에 대해 속 시원한 답변을 내리지 못한 채 얼버무리고 말았다. 나와 내 지인은 모두 여성인데, 이상하게도 왜 나는 우리를 대변하는 ‘페르소나’를 남성의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그리고 왜 한 번도, 그에 대한 의구심을 품어본 일이 없을까. 풀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던 탓에, 만들어진 영화는 필연적으로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제야 슬며시 벗겨진 콩깍지에, 내가 봤지만 보지 못한 것처럼 외면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맹목적으로 믿었고 사랑했던 것에서 시작된 의구심과 혼란은 영화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그전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여성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비전공생인데다, 여성이었던 내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겪어야 했던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폭력의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왔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결단하고 실행해야 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를 그만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해야만 했다. 어쩌면 나는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영화를 찍기엔 나는 너무 나약했고, 또 빈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론은 이 의구심을 안고서라도 영화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석연치 않은 질문과 쓰라린 상처를 품은 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우리, 영화 잡지를 만들어볼까?
영화를 계속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할 수는 없었다. 동료들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학교는, 엇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성 동료들이 모일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서 영화인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였고, 우리는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빠르게 가까워졌다. 영화과가 없었기에 각자 흩어져 자신만의 방법으로 영화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모인 인원의 대부분이 3~4학년이었지만, 남들은 취업 준비로 한창 바쁠 때 우리는 모여 앉아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쓴 시나리오를 발표하고, 피드백을 하고, 발제를 하며 서로의 꿈을 거들었다.
이 안에 모인 동료들에겐 공통적인 질문이 있었다. 바로 “좋은 영화, 입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좋았지만, 우리가 쓰는 시나리오의 지문과 내용, 그리고 캐릭터의 양상을 파악하는 것 또한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여성이지만, 왜 나의 페르소나를 남성으로밖에 그리지 못했던 걸까? 내가 생각하는 인류의 디폴트 값은 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그리는 여성의 모습은 왜 실제 우리의 모습과 큰 차이점을 보이는 걸까? 사랑해 마지않을 캐릭터 중에 남성 캐릭터는 이렇게나 많은데, 왜 여성 캐릭터는 선뜻 그 이름을 대기조차 어려운 것일까? 우리는 때론 웃고 때론 서글퍼하며 이에 대한 논지를 정리해갔다.
우리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던 영화 속에서 유독 여성 캐릭터만이 여전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참담한 심정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덧 스터디에 모일 때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여성 캐릭터의 양상과, (비전공생) 여성 영화인으로서 현장에 있을 때의 어려운 점들. 주제는 점차 확장되어 갔고,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썼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 캐릭터가 아닌 ‘인물’이라는 단어를 붙이며, 이 인물이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려질 수 있도록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우리가 나눈 논의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나는 <FACE>라는 인터뷰 전문 잡지에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고, 학교 내 영화관 서가에 비치된 출판물들 덕분에 ‘독립 잡지’라는 존재를 알고 있던 차였다. 2014년은 한국에서 조금씩 크라우드 펀딩과 독립 출판의 형태가 구체화되는 시기였다. 그렇기에 비교적 가벼이, 동료들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우리, 잡지를 만들어볼까?”
그렇게 여성 캐릭터를 탐구하는,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세컨드(SECOND)는 시작되었다.
우당탕탕 세컨드, 그 시작은 미숙하였으나…
2016년 창간호 <납작한 여자>가 나온 후, 햇수로 이제 4년이 되었다. 정말 그동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온갖 일들을 겪어야 했다. 막연히 그냥 글 쓰고 얹혀서 인쇄소에 맡기면 책이 나오겠지, 라는 생각으로 권했던 ‘잡지 만드는 일’은 결코 만만히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시나리오만 써봤지, 잡지에 실릴 원고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처음엔 그 내용을 학술지처럼 만들려고 했다. 한 편의 논문처럼 서론, 본론, 결론을 지어놓고 그에 대한 통계와 학술 연구들을 정리해서 엮어내기 시작했다. 무지가 두려웠던 우리는, 이에 대해 ‘완벽히’ 알지 않는 이상 함부로 글을 쓸 순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90년대부터 현대까지 영화를 죽 모아놓고, 한 편씩 직접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에 의해 고안된 영화 성평등 테스트로 ①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②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③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이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를 진행하고 내용을 분석했다. 이러한 통계와 연구 중심의 글을 쓰려다 보니, 글을 준비하는 스스로가 따분하고 졸려서 가히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1년이 지난 후에는 잡지를 포기하고 그냥 예전처럼 시나리오 스터디를 계속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고개가 끄덕여지려는 찰나,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작업이 너무 아까워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그날 책상에 앉아 지금까지 동료들과 함께 정리했던 글과 목차와 서문을 읽었다. 따분해서 하품이 났다. ‘나라도 안 읽겠다’라는 생각이 미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전면적으로 방향성을 수정하며, 예전에 써두었던 소설을 각색하여 잡지 프롤로그를 썼다. 인물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진행시킨 후, 각자 상상한 인물에 대한 허를 찌르는 글이었다. 이런 분위기로 재밌는 글을 쓰자는 의견을, 다행히도 모든 동료들이 수락해 주었다.
방향이 바뀌자, 서로가 신이 나서 써보고 싶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학술지 컨셉에서 벗어나니 아이디어도 끊임없이 솟아났다. 더군다나 이 당시에, 한 편집진이 디자인 대학 조교를 하다 만난 일러스트레이터와 친해져서, 그 친구(일러스트레이터 ‘누나’)가 무려 ‘디자이너’로 합류하게 되었다. 디자인을 하는 친구가 들어오니 순풍을 만난 것처럼 속도가 빨라졌다.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잡지’라는 꼴을 갖춘 모습을 보고 우리는 탄성을 내질렀다.
생각해보면 처음 우리는 많이 미숙했지만, 글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만큼은 그 어느 프로에게 뒤지지 않았다. 상명하달식의 영화계 문화에 대한 반발로 우리는 편집장 없는 평등한 조직을 원했고, 반드시 만장일치가 되어야 일을 진행했다. 만장일치제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한 번 회의를 시작하면 5시간은 훌쩍 넘곤 했다. 회의하는 날에는 다들 밤을 샐 것을 예상하고 따로 잠옷을 들고 모이기도 했다.
우리는 적당히 보기 좋은 글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른 기사에서 다룬 글들을 마치 짜깁기하듯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글을 쓰는 것은 우리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글을 쓰고 싶었다.
막연하게 ‘여성 캐릭터가 다양해져야지’에 그치지 않고, 어떤 여성 캐릭터가 어떤 방식으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고가 이루어졌다. 너무 유명한 영화가 아닌, 발굴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페이지가 늘어났다. 우리는 비판이 아닌 ‘대안’에 목표를 두기로 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국, ‘여성’ 영화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여성 감독들이 만든, 여성 서사가 도드라지는 영화들이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영화로 인정받는 것이 세컨드의 비전이었으니까. 이 안에 비판을 넘은 대안적 사고가 들어가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번째라는 뜻을 가진 ‘세컨드’라는 네이밍의 의미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유명 영화 얘기보다는 새로운 걸 ‘발굴’하는 재미
처음의 미숙함을 지나오면서 우리도, 세컨드도 많은 발전을 했다. 창간호 <납작한 여자>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때만 해도 페미니즘 이슈가, 특히 문화 예술계 내에서 다뤄지는 것이 아직은 생소한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 내부에서도 반응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처음 목표액을 3백만 원으로 할지 4백만 원으로 할지에 대한 열띤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달성 못 하면 어떡해!”) 하지만 창간호는 목표액의 150%를 달성한 채 마감할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고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잘 모르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계속된 걱정 안에서도 잡지 세컨드가 독자들을 만난 순간, 이 걱정에 대한 부분은 눈 녹듯 사라졌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만드는 잡지를, 그저 주제와 내용에 대한 믿음으로 후원을 해주신 분들. 창간 파티에 직접 찾아와서 우리를 격려해주신 독자들. 모두가 이런 이야기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세컨드를 계속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독자들을 만난 뒤 더욱 선명해졌다.
세컨드 1호가 세상에 나올 당시에는 ‘여성 캐릭터’ 자체를 다루는 매체가 거의 없었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받았다. 특히 <천만 영화 속 가난한 여성 캐릭터에 대하여>라는 기사는 한국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고루하고 전형적인지를 통계를 통해 분석한 기사로, 잡지가 발행되고 난 후 많은 독자분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밖에도 영화 <아저씨>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어 서사를 분석하는 실험적 기사와, 입체적인 캐릭터의 가능성을 논하는 기사 등이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컨드는 비판이 아닌 ‘가능성’들을 논하는 잡지로, 1호와는 달리 2호와 3호는 비판보다는 하나의 넓은 주제를 잡고 의미 있는 영화들을 큐레이션하여 소개하는 지면이 전면에 실렸다. 새로운 여성 서사와 영화들을 발굴하는 것이 본 매거진의 비전이기에, 이미 많이 회자되고 유명한 영화가 아닌,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의미 있고 확장성이 있는 영화를 발굴하여 선보이는 작업에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 큰 영화보다는 작은 영화들을,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능성들을, 강하고 멋진 여성 캐릭터를 넘어, 여성 캐릭터가 지닐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를 논하는 기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세컨드와 2호와 3호에는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영화 속 ‘사운드’를 분석한 기사나, 독립영화계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올리고 있는 여배우의 인터뷰, 해외 여성 영화제 취재, 그리고 영화제를 가지 않으면 보기가 어려운 다양하고 독창적인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대중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아직 이목을 끌지 못하는 곳에 작은 등을 놔주는 작업을 진행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선보이거나 마켓에서 대중을 만날 때, “아는 영화가 하나도 없어!”라는 실망 섞인 말을 곧잘 듣곤 한다. 대중이 아는 영화가 많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잡지의 수요층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는 이 잡지를 통해 여성 영화의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하는 비전을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지는 않아도, 이 비전에 공감하고 또 연대하기를 원하는 소중한 독자들이 한분 한분 세컨드에게 말을 걸어오시기 시작했다. 이 잡지에서 큐레이션하는 영화에 대한 어떤 확신이 생겼다고.
그것이 아직, 세컨드를 만들고 있는 가장 확실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독자와 관객과 함께 ‘씨네 페미니즘’을 논하는 시간
세컨드는 창간호가 발행된 때부터 항상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해 왔다. 우리의 비전은 ‘더욱 많은 독자들을 오래 만난다’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잡지를 쌓아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작은 소소시장부터 시작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언리미티드 에디션, 페밋, 서울국제도서전 등에 매년 꾸준히 참여하여 새로운 독자들을 만났다. 독립출판서점에도 계속해서 노크하여 잡지의 존재를 알렸다.
2017년에 2호 <여성의 힘>이 발행되고, 천만 원이 넘는 후원금이 모금되었을 때, 이쯤이면 잠재적 독자가 더이상 없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마켓이나 페어에 나갈 때마다 깨어지곤 했다. 그곳엔 항상 새로운 독자들이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 잡지는 뭐예요?”라고 묻고, 설명을 들으면 감명받은 얼굴로 잡지를 사서 가는 사람들을, 매년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장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디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오프라인 행사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다. 창간호가 발간되었을 때, 우리는 <여자 사람>이라는 기획상영전을 열었다. 그런데 역시 기존에 있었던 방법 그대로, 무언가를 답습하여 만든다는 것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더 특별하고, 더 신선한 방법으로 우리 메시지를 알릴 수 있을까. 고민은 그쪽으로 이어졌다.
<여자 사람>은 여성을 사람으로 보게끔 하자는 비전을 가지고, ‘사람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인 ‘감정’, ‘타인’, ‘몸’을 주제로 3일 동안 각기 다른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리는 독특한 큐레이션 상영전으로 진행되었다. 영화만 보는 것이 아닌, 그 상상력을 확장하기 위한 또 다른 아트폼이 병행되었고 ‘감정’에는 음악, ‘타인’에는 낭독극, ‘몸’에는 무용이 차용되었다.
2017년에는 아라리오 뮤지엄의 제안을 받아 한 미디어를 페미니즘으로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아라리오 뮤지엄 측은, 프로그램은 통상적으로 강연과 워크숍 등으로 이루어진다며, 그렇게 진행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의견을 전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일방적으로 지식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연보다는,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사고를 ‘확장’해가는 방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 기획을 진행하는 데만 두 달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논의 끝에,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방탈출 게임에 미디어 비평 시나리오를 얹은 <조이랜드>라는, 페미니즘 추리 연극을 기획하게 되었다. 세계행복지수 1위에 달하는 도시국가 ‘조이랜드’가 처음으로 관광객에게 문을 열고, 관광객의 신분으로 입장한 관객들은 이 도시국가가 가진 비밀을 파헤쳐 그곳에서 탈출해야만 한다. 이들은 ‘조이랜드’에서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다 죽음을 맞은 세 여성의 방에서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이 세 명의 여성은 각각 영화 <베테랑>의 미스봉, <탐정>의 미옥, <건축학개론>의 서연이다. 영화에서 너무 익숙하기에 보이지 않는 폭력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잡지 발행이든 오프라인 행사든, 우리는 독자와 관객들에게 ‘유레카!’ 같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항상 바래왔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지 않는다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이야기들을 끌어올려 대중에게 선보이는 작업은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어갔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세컨드의 정체성은 더욱 견고해졌다. 우리는 여전히,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와 관심받지 못하는 주변의 것들을 그러모으는 작업을 하고 싶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꿈꾼다
세컨드는 1년에 한 권, 정기간행물이라고 얘기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느리게, 천천히 나오는 잡지다. 처음에는 이 매거진에 욕심이 났기에 ‘적어도 1년에 두 권은 만들어야 하지 않나’라고 논의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세컨드는 느려도 신중하게, 오랫동안 독자들의 곁에 남는 잡지가 되기로 했다.
발행된 지 4년, 모인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편집진들도 많이 성장했다. 이 ‘성장’은 기사를 더 잘 쓰게 되었다거나, 잡지를 더 잘 만들게 되었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한 발자국 멀어져, 지속 가능한 단체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성장을 이루었다.
페미니즘 추리연극 <조이랜드>가 끝나고 난 후, 2018년에는 오프라인 행사를 열지 못했다. ‘먹고사니즘’을 고민하여 각자의 생업을 갖게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생업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잡지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영화를 직업으로 하게 된 사람도 있었고, 출판 기획 등 다양한 문화산업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모두가 아슬아슬하게 생업과 세컨드 활동에 균형을 맞춰가야 했다.
처음에는 이 균형을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법으로 맞추려 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더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빠르게 지쳐가며 더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확 솟아올랐다가 급격히 꺼져가는 것이 아닌, 은은하게 오랫동안 타오르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던가. 그러려면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작업보다는, 지난하고 느리지만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을 내부에서부터 찾아야 했다.
길의 방향과 모양은 고민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처럼, 이 고민에 맞춰 서로가 점차 보폭을 맞추기 시작했다. 우선 따로 떨어질수록 거점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에 ‘빈곤한’ 재정을 가진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세컨드만의 ‘작업실’을 갖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 의심 없이, 망설임 없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 잡지를 비치하고, 우리가 기획한 행사 포스터를 붙일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4년 동안 4번의 이사를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럴 가치가 있었다. 모이고, 연대할 수 있는 든든한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단체는 지속될 수 있다.
또한 비용 측면에서도 현실을 고려하기로 했다. 세컨드를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은 알게 모르게 쌓여간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인 모금액은 대부분 잡지와 굿즈를 만들고 배송하는 비용으로 모두 지출되기 때문에, 작업실을 유지하거나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비용은 사비로 충당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사비를 쓰는 날들이 이어진다면, 우리의 활동이 저지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때문에 오프라인 마켓, 페어에서 얻는 수익금은 일정 운영금만 떼고 반드시 내부 인원에게 배분했다. 돈을 받지 않음으로서 순수한 애정을 확인하는 것은 특히 비영리 단체의 근간을 흔든다. 오랫동안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인풋(Input)이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오프라인 행사의 횟수를 줄이는 대신 정말로 하고 싶은 몇 가지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행사에 참여하고 기획하는 시간에, 잡지와 메시지를 기획하고 다듬는 데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버겁다고 느껴질 때는 과감히 일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만큼, 현실적이고 기획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신경 쓰기 시작했다.
보폭을 맞추자 호흡이 돌아왔다. 욕심을 버리자 더 좋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여유가 생기자, 함께 버텨왔던 페미니즘 단체들과의 연대도 더욱 수월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직접 상영전을 크게 개최하는 대신, ‘퍼플레이’와 함께 매달 여성영화를 선보이는 기획을 함께하게 되었고, 우리가 직접 웹진 플랫폼을 만드는 대신, ‘핀치’에 과월호를 소개하고 기획 기사를 내는 것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9년, 우리는 여전히 지면 잡지를 발행하는 씨네 페미니즘 잡지를 만든다.
영화계에 페미니즘이 흐르도록, 작은 도랑을 파는 잡지
우리는 ‘버틴다’는 것의 이미지를 굉장히 단단한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버틴다’는 것은 단단해서 차라리 부러지는 것이 아닌,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땅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발발하고, 영화계 내에서도 그 움직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폭력으로, 누군가는 조롱으로, 누군가는 무관심으로 이 흐름을 끊어내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이 물결이 흐를 수 있도록 도랑을 파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도랑을 파내는 작업은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랫동안 할수록 더 수월해진다. 세컨드 또한, 작은 호미질일지언정 그 작업을 결코 멈추고 싶지 않다.
말라가는 주변부의 것에 물을 대주는 작업. 싹에서 숲을 만드는 작업은 생각보다 매우 느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 작업을 지속하는 세컨드의 여정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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