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여자분이 바이크 타세요?’
바이크를 타는 것은 너무나도 즐겁다. 바이크를 타기 전엔 대체 뭘 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즐겁다. 하지만 바이크를 타고 도로에 나가면 느껴지는 맹렬한 시선은 라이딩의 즐거움을 깎아 먹는다. 시선의 근원지를 찾으면 애쓸 필요도 없이 옆 사륜차 운전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 같이 신호 대기 중인 라이더와 눈이 마주친다. 백이면 백, ‘한남’이 운전대를 잡고서 신호등도 도로도 아닌 나를 쳐다보고 있다. 대체 뭐가 그리도 궁금하고 신기한지, 남(자)들 다 타는 오토바이 나도 타는 게 전부인데.
처음에는 이런 시선들이 견디기 싫어 긴 머리는 옷 안으로 숨기고,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옷만 입고 다녔다. 여자임이 드러나면 당연히 운전을 못 한다고 간주되고 쉽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운전하기 배로 어려워진다. 결국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버렸다. 최소한 헬멧을 쓰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게. 옷은 바지 말고는 절대 입지 않았다. 반바지만 입어도 여자인지 남자인지 추측하려는 지긋지긋한 사람들 때문에 꼭꼭 몸을 숨기고 감췄다.
하지만 점점 짜증이 났다.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입고 싶은 옷을 포기해야 하지? 자기 눈도 간수 못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인데, 저 사람들이 잘못한 일인데 왜 내가 불편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동시에 나 스스로도 여성으로 인식되는 일을 기피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적인 모습을 드러내길 거부하고 두려워하면서 여성을 2등시민으로 보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이러한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바이크 문화는 당연히 남성중심적이고 마초적이기에 여성은 쉽게 제외되고 배제된다. 여성이 본인의 바이크를 타고 참석해도 ‘누구 뒤에 타고 왔냐’는 질문을 수십 번 수백 번 듣게 된다. 연애 중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누구랑 사귀어라’, ‘왜 이렇게 예쁜데 남자친구가 없느냐’ 등등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들을 귀에 딱지얹을 때까지 들어야 한다. 나를 누군가의 애인, 연애대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말들을 듣는 건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매일 마주하는 불쾌함인데, 굳이 즐겁자고 애써 찾아간 바이크 행사에서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점점 더 기존 바이크 문화에서 흔한 연령주의, 배기량 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혐오 등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만들어버렸다. 2018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처음으로 바이크를 타고 행진한 ‘레인보우 라이더스’ 기획단원들끼리 모여 기획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레인보우 라이더스 기획단장이었던 바바님에게서 같이 여성주의 바이크 행사를 만들어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러겠다고 했고, 레인보우 라이더스 행진 연습을 하던 망원 한강공원에서 첫 회의를 진행했다. 직접 행사를 열어본 적은 없지만 퀴어퍼레이드에서 바이크 타고 행진도 했는데 다른 행사라고 왜 못하겠어, 싶은 마음으로 모여서 십시일반 힘을 보태 행사를 기획했다. 이날 우리의 이름을 정했다. 치맛바람라이더스!
치맛바람라이더스라는 말이 처음 쓰인 건 우리 활동의 기반이 되는 트위터에서다. 자주 치마를 입고 바이크를 타는 트바움(트위터 하고 바이크 타는 페미니스트.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뒤바뀐 가상의 세계를 그린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작가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사람의 기본형으로 쓰이는 ‘움’을 가져옴. 남성형은 ‘맨움’) 분이 처음 사용했다. 바바님이 이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어 허락을 맡고 지금은 단체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치맛바람’은 여성의 극성스러운 사회활동을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듣자마자 이건 너무 우리를 뜻하는 말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치맛바람 휘날리며 바이크 타는, 극성스레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
극성스러운 페미니스트들, 치맛바람 휘날리며
처음으로 기획한 행사는 가을 다과회였다. 막연히, 한껏 차려입은 라이더들이 한데 모여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체로 라이딩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기획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원하는 행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천천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하지만 행사 준비는 쉽지 않았다. 장소 섭외부터 문제가 됐다. 서울 내에서 바이크가 드나들 수 있으며 부족한 예산에 걸맞는 장소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섭외 완료한 장소에서 갑자기 사용할 수 없다는 답을 주기도 하는 등 장소 섭외에만 기획하는 시간의 절반은 쓴 것 같다. 어렵게 구한 행사장 근처의 공영주차장에 바이크를 주차하기 위해 미리 주차비 등에 대해 물어봤지만, 대체로 이륜차는 주차장 내부의 잉여공간에 주차하거나 아예 주차장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마땅한 기준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관리인에게 다른 주차장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가격을 정해야 했다.
주차비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까지 협상하고 조정해야 했다. 망원 한강공원 내의 배구장을 대여했는데, 배구장 안에 사륜차는 통행이 되지만 이륜차는 통행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당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바이크 행사가 아니라 사륜차 행사였다면 이 정도로 신경 쓸 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사를 마무리하는 단체주행 또한 문제가 됐다. 바이크가 두어대만 같이 있어도 시끄럽고 위협이 된다며 신고되는 일이 빈번하다. 시동을 걸지 않고 있어도 신고가 들어오는데, 서울 시내를 수십여 대의 바이크가 지나간다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단체주행을 하기 위해 집회 신고를 해야 하는지, 어떤 신고를 해야 하는지, 경찰에 미리 알려야 하는지 등등 열심히 찾아봤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알음알음 지인을 통해 알아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나서야, 단체주행을 규제할 어떠한 법적인 내용은 없으나 시민들이 위협을 느낀다면 신고가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냥 원하는 옷을 입고 빻은 말을 듣지 않으며 함께 바이크를 타고 싶은 것뿐인데 알아봐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행사를 여는 것이 처음이라 준비 과정은 서툴고 힘들었지만, 행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즐거웠다. 포토존에서 치마를 입고 바이크와 함께 찍은 프로필 사진, 눈치 보고 불편할 필요 없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 원하는 옷을 입고도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 함께 바이크를 타는 일, 이 모든 걸 페미니스트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까지 너무 즐겁고 행복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런 행사가 더 자주, 더 많이, 더 다양한 곳에서 열렸으면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초바’(초보 바이크 인간)의 캠핑 도전
2018년 5월, 지리산에 다녀왔다. 지리산으로 출발하기 전엔 바이크를 타고 수도권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초바(초보 바이크 인간)였다. 나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벙벙한 프로텍터 자켓과 휙휙 돌아가는 헬멧을 쓰고 거의 600키로를 달렸다. 벙벙해도 처음 산 프로텍터 자켓이었고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으며, 고개를 돌리면 헬멧이 먼저 돌아갈 정도로 큰 덕분에 에어팟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달릴 수 있었다. 60만 원짜리 2001년식 시티백으로 이 정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다들 바이크를 타지 않지? 모든 사람들이 바이크를 타야 해!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이크 뒤에는 캠핑용 짐을 잔뜩 실었다. 바이크는 짐을 가득 실어 무거웠지만, 충분히 필요한 만큼의 속도를 낼 수 있었고 나는 가벼운 몸으로 안장 위에 앉아 스로틀을 당기기만 하면 됐다. 짐은 바이크가 들어줄 거니까. 나는 여행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선 바이크에 더욱더 파묻혔다.
이제까지 여행이라곤 무거운 짐을 한아름 들고 숙소와 관광지를 왕복하며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항상 짐이 많은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들을 추스르려고 애쓰며 최대한 남들과 닿지 않게 짐들을 붙잡고 다녔었다. ‘손이 두 개만 더 있었으면…’하고 생각하며 잔뜩 긴장한 채로 사람들 사이에서 탈것에 실려 가는 이동 시간은 나를 쉽게 피로하게 하고 때로 일정을 포기하게 했다.
하지만 바이크로 하는 여행은 달랐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즐길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불쾌한 접촉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고,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걸러짐 없는 누군가의 폭력적인 말과 행동들을 견딜 필요도 없었다. 무거운 짐들은 모두 바이크 위에 싣고 안장 위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즐거움이 채워졌다.
국도를 달리는 것은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잊을 때쯤 나오는 신호등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륜차들을 익숙하게 바라보며 나와 내 바이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앞과 옆으로 지나치는 풍경들. 귓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며 스로틀을 감는 안장 위의 나. 국도에서는 오로지 주행에만 집중하며 다른 걱정과 생각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간다면 4시간이면 되는 지리산을 13시간 걸려 도착했다. 점심쯤 출발했으니 저녁쯤 도착할 거라 예상했는데,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짐을 풀게 되었다. 서로 다른 바이크 다섯 대와 다섯 사람이 함께하다 보니 서로의 상황에 맞추고, 또 위험하지 않게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니 늦어졌다. 그러나 다섯 바이크, 다섯 사람이 함께 또 따로 도로를 달리는 경험은 새로웠고 그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고 달렸다. 바이크를 타는 것의 매력은 여기에도 있다. 분명 안장 위에서 혼자 가고 있지만, 동시에 함께 달리고 있기도 하다. 언제든 같이할 수 있지만 집단은 아닌,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
이때를 기점으로 나는 바이크와 캠핑에 푹 빠졌다. 바이크를 타지 않았다면 나는 집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을 부러워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크를 타고나서 나에게도 언제 어디서든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갈 수 있는 기동성이 생겼다. 이 작은 바이크 한 대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치맛바람라이더스 캠프아웃!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며칠씩 캠핑하던 기억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고, 계속해서 비슷한 행사를 찾았다. 하지만 역시나 페미니스트 라이더를 위한 행사는 없었다. 서서히 잊어가고 있을 즈음, 1회 가을 행사가 마무리되고 어떤 행사를 할까 회의하다가 캠핑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의 ‘Babes ride out’, 영국의 ‘Camp VC’와 같은 캠핑 행사들을 보고 왜 우리는 저런 행사가 없을까? 우리가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페미니스트들이 하루종일 함께 밥 먹고, 라이딩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 또 일어나 하루를 맞이할 생각을 하니 흥분되기 시작했다.
캠핑을 함께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도 즐거울까 생각해봤었다. 일단 여럿이서, 또는 혼자서 바이크를 타고 목적지까지 며칠이든 묵을 수 있는 짐을 꾸려서 간다. 버스, 기차 등의 이동수단과 달리 목적지까지 갈아타는 번거로움 없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갈 수 있다. 신나게 달려서 캠핑장에 도착하면 내가 잘 집을 내 손으로 짓는다. 직접 요리한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안전한 공간 안에서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빻은’ 말, 혐오표현, 성적 대상화 등을 참을 필요 없는 것. 이러한 공간을 일시적으로나마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캠핑을 이리도 좋아하는 이유였다.
기획단끼리 사적으로 만나도 캠프아웃 얘기부터 꺼내기 바빴다. 어떻게 하면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전에 진행했던 행사는 반나절 동안 진행되었지만 캠프아웃은 무려 2박3일 동안 진행되는 행사였다. 그저 장소 섭외뿐만 아니라 성중립 화장실, 비건(vegan, 육류와 닭알, 유제품, 생선 등을 먹지 않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화장품 등을 사용하지 않음)식과 논-비건존 구성 등 놓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필 하고 많은 컨텐츠 중 바이크와 캠핑을 골랐나 싶기도 했다. 대체 누가 고생해 가면서 바이크를 타고 와서 캠핑을 하는 귀찮은 일을 할까 싶은 마음이 아직도 든다. 하지만 처음 바이크를 타고, 캠핑을 하며 느꼈던 즐거움과 자유로움은 어떠한 여행의 방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더 많은 페미니스트가 더 많은 기동성을 누리고, 그로 인한 자유로움을 얻었으면 좋겠다.
작년 12월부터 준비하던 캠프아웃이 드디어 오는 9월 27일에 시작한다. 지난 8월 10일에 텀블벅에서 티켓을 오픈했다. 캠핑 한번 하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노력, 시간이 들어간 걸 떠올리면 이 캠핑은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캠프아웃을 준비하며 세미나와 소모임 등을 진행하면서도 캠프아웃에 대한 기대가 더욱더 커졌다. 라이더가 아닌 페미니스트들도 캠핑에서 만날 거란 기대가 크다. 바이크를 처음 접하기에도, 타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정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캠프아웃에 참석하고 싶다면 교통수단에 상관없이, 바이크를 타고 있지 않아도, 텐트가 없더라도 참석할 수 있다.
캠프아웃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페미니스트 라이더를 위한 소모임과 세미나, 행사들을 기획할 예정이다. 이번 캠핑을 아쉽게도 못오는 분들이라면, 치맛바람라이더스 트위터(@chima_riders)와 인스타그램 계정(@chimariders)을 통해 소모임과 세미나 등에 참여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여자에겐 자기만의 방, 돈, 그리고 바이크가 필요하다고 한다. 웃자고 하는 말인 동시에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더이상 지하철 노선도나 버스 배차 간격, 부족한 교통인프라에 발이 묶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과 바이크가 주는 기동성을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치맛바람 휘날리며 바이크 탑시다!
※ 치맛바람라이더스 유튜브: https://bit.ly/2MqB6dN ※ 치맛바람라이더스 텀블벅: https://tumblbug.com/chimari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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