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를 깨고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자, 페미의학수다!2019 페미니스트 ACTion! ⑭언니들의 병원놀이※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굴욕 의자’에 담긴 시선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아휴, 나 산부인과 진짜 싫은데.”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성들마다, 매번 한숨 쉬듯 툭 내뱉는 말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한결같지만, 대체로 연령이 높을수록 되려 더 당연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할머니들은 “늙으면 죽어야지, 추접스럽게 이렇게 와서 어쯔까 몰라”라고, 진료실에 들어와서 나가는 순간까지 반복하신다.) 아마도 남성 의사 앞에서는 정작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말. 어쩌면 ‘너도 여자니까, 알지?’라는 동의를 구하는 말. 그래도 되는 것처럼, 아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내가 내 건강을 위해 병원을 찾는 것에, 왜 이런 말이 ‘당연하게’ 생각될까. 누구도 병원에 오는 것이 즐겁고 유쾌할 리는 없다. 하지만 여느 병원을 찾을 때의 일반적인 긴장감이나 어린아이들이 흰 가운만 보면 일단 큰 소리로 울기부터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는 다르게, 유독 ‘산부인과’가 싫다고 소리 내어 말한다는 것. 그 상황이 당연스레 받아들여질 거라 믿는다는 것.
산부인과 의사인 내가 ‘왜?’라며 무언가 삐걱대는 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여기서부터다. 산부인과 진료가 왜 싫은지 모르는 게 아니다. 그 불쾌한 느낌을 너무나 잘 안다. (나라고 진료받는 것이 좋을 리도 없다.) 하지만 왜? 산부인과란 당연하게 싫어하는, 싫어해도 되는, 단지 병원이 아닌 그 어떤 것이 된 걸까. 바로 그 ‘당연한’ 지점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소위 ‘굴욕 의자’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단적인 예다. 산부인과 진료에 필수적인 자세를 돕는 진료대에 붙은 이름. 하지만 그 굴욕은 대체 누가 만든 거지? 여자가 다리 좀 벌리는 것이 뭐, 진료를 위해 생식기 좀 내보이는 것이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내가 내 건강을 위해 진료받는 것에 ‘굴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과연 누구의 시선인 걸까?
사회적 금기와 편견이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생리 피는 더럽고 나쁜 피라서 많이 쏟아내야 좋다던데요?” “생리 양이 줄어들면 폐경 되는 거 아니에요?” “냉이 가끔씩 많이 나오는데, 질염 같아서요.” “제 소음순 모양이 정상인가요?”
진료 시마다 매번 날것으로 마주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터부와 편견. 만약 월경하듯 코피를 쏟는다면 누구라도 식겁해서 응급실로 달려갈 테지만, 월경과다는 그 자체로 과다‘출혈’이며 치료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설득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질 분비물이 하고 있는 기능과 이로 인한 특유의 냄새, 호르몬 주기에 따라 분비물의 변화가 생기는 것은 건강한 작용임을 설명해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몸은 으레 생리 피쯤은 쏟아내고 사는 것이며, 여성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피든 분비물이든 더럽고 불쾌한 것일뿐더러, 여성의 성기는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고 완벽히 청결한 (심지어 꽃냄새가 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외성기의 색깔과 모양마저 유아기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성적 존재로서 당연한 역할인 듯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모든 편견과 잘못된 정보들이 결국 해악을 끼치는 건 여성 자신의 몸이다. 월경과다와 만성적인 월경통에 고통받으면서도 치료를 선택하기가 두렵고, 이는 기존 원인질환을 악화시키거나 빈혈로 인해 건강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무엇보다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건강한 질 분비물을 일부러 없애기 위해 세정제를 비롯한 온갖 제품을 사용하고, 매일 면 속옷 위에 ‘느낌만 순면’인 팬티라이너를 사용하며 면역력을 해친다.
산부인과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아질수록, 질병을 빨리 진단받고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함으로 인한 위험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편 이렇듯 여성의 몸에 작용하는 고통의 반복은 결국, 여성들 스스로 갖는 몸에 대한 혐오를 쉽고 당연한 일로 만든다.
여성의 몸에 ‘공포’를 주입하는 사회
치료를 위한 선택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내 몸이 누군가에게 정상으로 비춰질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스스로의 몸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모든 원인. 이것은 ‘내 몸을 모르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내 몸이지만 내게 정확한 정보가 없다는 것. 정보가 없으니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없고, 스스로 나의 건강을 결정하고 보장받을 권리도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악순환이 시작된 ‘모른다’는 것은, 결국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여성의 몸은 말해서도 보여서도 물어서도 안 된다고 각인되어 온 금기가, 이 모든 혐오와 편견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의 힘으로 단단히 유지되고 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에는 유독 공포가 짙다. “‘그런 거’ 안 할래요. 그냥 안 좋을 것 같아요.” 경구피임약, 자궁내 피임장치, 호르몬 보충요법 등 꼭 필요한 치료적 선택을 설명해도 아예 듣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엔 유난히 온갖 금기가 많은데, 그저 ‘여자 몸에 안 좋다’는 말은 어떤 부연도 필요 없이 모든 팩트를 이기는 힘을 가진다. 그 힘의 정체는 두려움이며, 공포는 힘이 세다.
그리고 이 공포가 공고히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금기로 단단히 여성의 삶을 통제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산업화하여 여성을 갈취하는 세력. 안팎으로 여성의 몸을 옭아맨 이들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알고 선택하고 긍정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며 끊임없이 공포의 씨앗을 심는다.
내 몸의 주체로서의 나, 여성의 ‘몸’을 말하자
여성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 결국 여성에 대한 모든 편견과 혐오와 금기의 원천 역시 여성이 가진 ‘몸’에서 비롯된다. 몸에 대한 선택은 역시 삶에 대한 선택이 된다. 하지만 진짜 ‘선택’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만 이것을 기반해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하다. 또 하나, 그 선택에 장애물이 없이 열려 있어야만 선택의 의미가 있다. 정보가 없이 편견과 금기만이 작용하거나,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없도록 가로막혀 있다면 여성의 몸은 결국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궁근종이나 선근증으로 인한 월경과다가 있는 경우를 보자. 경구피임약이나 미레나(자궁내 피임장치)로 월경 양을 조절할 수도 있고, 자궁근종만을 제거하거나 필요시 자궁 전체를 절제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 없이 막연한 두려움으로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피임약을 거부하거나, 미레나 얘기에 ‘그런 건 안 해요’라며 펄쩍 뛰는 것을 진료실에서 흔히 접한다. 반드시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도 ‘자궁이 없으면 큰일’이라는 두려움에 치료를 미루거나, 주로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으로 병을 키우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두의 삶에는 서로 다른 선택지가 있고, 의료인은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일 뿐 결코 여성 대신 정답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의 선택이 옳지 않은 정보가 주는 두려움에 의한 결정이라면, 과연 그것을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월경용품도 마찬가지다. 일회용 월경용품이든, 면월경대이든, 월경컵이든, 미레나에 의한 월경중지 시도이든, 자신의 삶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권리다. 그러나 ‘여자가 질 속에 어떻게 그런걸’이라며 월경컵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이에 대한 편견을 먼저 배우고, ‘결혼 안 한 여자가 자궁에 피임장치라니’라며 미레나 시술을 미리 거부당한다면, 이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회용 월경용품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데도 독성물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다른 월경용품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 또한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비용부담 때문에 다른 선택에 엄두 낼 수 없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 몸을 아는 것으로부터 내 몸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이 생긴다는 것. 내 몸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은 내 삶에 대한 선택이라는 것.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떠밀리지 않는 진짜 선택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건강과 삶에 대한 권리라는 것. 내가 활동 중인 ‘언니들의 병원놀이’는 이와 같은 고민에서 시작됐다.
여성들의 삶이 시작되는 몸. 그래, 우리의 ‘몸’을 말하자. 건강권을 요구하자. 여성들이 놀이하듯 즐겁게 금기 없이 내 몸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나 혼자가 아닌 공통의 경험으로 힘을 모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모인 목소리가 더 커질수록 여성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굳세고 넓어질 것이라고. 그것이 ‘언니들의 병원놀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전주에서 시작된 페미의학수다 ‘언니들의 병원놀이’
본격적인 계기는 소위 ‘독성생리대’ 파동이었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건강권을 말하는데 웬걸, 생리에 대한, 생리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생리대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혐오와 편견이었다. 여성은 시민이 아니었고, 여성의 건강은 사회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여성들은 으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남성 중심의 의사 사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몸이 증거’라고 외치는 여성들의 경험을 권위로 묵살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는 반응들. 알고 있었지만, 충격이었다. ‘무지’란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 월경을 다루면서도 정작 여성에게 월경이란 경험이 어떤 것인지 1도 공감하지 못하는 남성 의사들에게 여성의 몸에 대한 선택이 맡겨진다니.
무지와 금기와 혐오가 서로를 낳고 키워내는 악순환. 이 고리에서 힘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이 고리를 깨기 위해 누구의 힘이 필요한가. 북받치는 분노가 용기를 주었다. 말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시작이 ‘페미니즘 의학 수다’를 모토로 한 <생리콘서트>였다. (‘생리’라는 명칭은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며 원래 명칭인 ‘월경’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생리’라는 이름에 깃든 혐오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해, 본 기획에서 생리라는 명칭을 선택하여 사용했다.)
생리대가 아닌 ‘생리’를 말하자. 생리하는 ‘여성의 몸’을 말하자. 2017년 9월 ‘언니들의 병원놀이’라는 의도에 공감하는 지역의 여성들과 만든 첫 기획 <생리콘서트>(전주남부시장 청년몰 마을회관에서 개최)는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팩트체크’는 가능한 한 최소 분량으로 배분하고, 참가한 여성들 스스로 ‘생리’라는 경험을 꺼내어 말하고 그것이 여성의 삶에서 (혐오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공유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들였다. 참가자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또한 당시 이슈였던 ‘그렇다면 어떤 월경용품이 좋은가/안전한가’가 아니라, ‘어떤 월경용품을 선택하더라도 반드시 안전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시민으로서 우리의 권리이며 국가의 의무’라는 것에 목소리를 모으고자 했다. <생리콘서트> 후, 기획팀 가운데 뜻이 맞는 여성들이 ‘병원놀이’로서 계속해 함께 활동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생리’ ‘낙태’ 이슈부터 ‘미투’ ‘정상가족’ ‘난민’ 이슈까지
‘생리’란 단지 피 흘리는 신체 현상을 넘어서서, 여성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였다. 생리에 함의된 왜곡된 여성성과 출산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강요, 이에 대한 혐오적 인식과 이를 당연케 하는 교육까지. 이는 ‘생리 중’이라는 한 시기를 잘라내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성의 삶 전반에 공기처럼 깔려있는 무엇이었다.
이에 대한 공감은 곧이어 <완경콘서트>, <낙태콘서트>(생리콘서트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혐오적 인식을 드러내고 이에 맞서기 위해 임신중지 대신 ‘낙태’라는 명칭을 선택하여 사용했다) 등으로 이어졌다. 이름난 관광지인 전주 한옥마을 한가운데 핫핑크 선명한 글씨로 ‘생리’, ‘낙태’가 적힌 포스터를 마주했을 때의 낯섦도 노렸다. 이로 인해 <낙태콘서트> 때에는 중년 남성이 찾아와 난동을 피우고 경찰들이 출동할 정도의 뜨거운 관심(!)도 받았다.
시민들은 ‘병원놀이’라는 이름 때문에 우리의 활동을 의사들의 모임이거나 의학 정보를 위한 강연쯤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삶이란, 분리시켜 구분 지을 수 있는 별개의 사안들이 아니다. 여성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 역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모든 범주가 고려되어야 하며, 똑 떨어진 의학의 영역일 수 없다. 그렇기에 의사들에게 여성들의 몸을 결정할 권력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여성의 몸과 건강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기에, 우리 스스로 주체로서 우리 삶을 소리높여 말해야 한다. 나아가 이 과정은 각자 삶을 가진 주체들의 목소리와 함께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에 대한 혐오는, 결국 ‘다른 존재’로 이름 붙여져 힘없이 밀려난 모든 이들에 대한 혐오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들은 여행객 가득한 한옥마을 한가운데에 마이크를 세우고 “#MeToo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전주 퀴어문화축제에 동참하며 “HIV/AIDS 콘서트”를 만들고, 우리 지역의 난민 가족과 이웃이 되고자 “난민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지역사회에 제안하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비정상가족” 수다회를 기획하는 등의 활동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언니들의 병원놀이’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우리의 목소리가 퍼질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 중이다. 전주의 색깔을 살려 미투를 지지하는 <춘향미투뎐> 영상이나, 크리에이터 ‘너나나나’와 협업하여 낙태죄 폐지를 위한 <낙태를 마주하는 의사 이야기>, <피임해 제발 좀> 등의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난 네 편이야’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언니들의 병원놀이’는 여전히 모임의 방향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정해질 수 없는 틀 속에 계속 다음을 고민 중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스스로에게 간절한 이야기를 한다는 원칙.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되씹어 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을 (일단!) 한다’는 결심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목소리가 어떤 의미가 될까. 무릎이 꺾일 때마다 또 한걸음 내디딜 용기를 주는 것은, 이 길에서 만나온 여성들의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다. <생리콘서트>에 참가한 중년여성의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몰랐을까 너무 억울하다”던 한탄. 무척이나 힘들게 갱년기를 겪고 있는 여성이 <완경콘서트>에 와서 많은 힘을 얻었다며 울먹이던 고백. 월경 때마다 극심한 통증으로 죽고 싶은 생각까지 했다는 여성이 ‘참지 않아도 된다’는 말 한마디에 터트리던 울음. 자궁 따위 떼버리고 싶다며 자기 몸을 혐오하던 여성이 ‘월경은 내 건강의 지표’라는 말에 위로받았다며 진심으로 전하던 인사. <미투필리버스터>의 마이크 앞에 선 목소리가 떨리며 간간이 끊길 때마다, 지나던 걸음을 멈추고 곁을 지켜 힘주어 보내오던 박수. 그때 그 여성들의 얼굴들. 선명하게 각인된 그 얼굴들이 뜨겁고 단단한 용기이고, 우리의 손을 잡아끌고 등을 밀어주는 힘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는 너의 편이야’라고 있는 힘껏 외치는 것뿐인 것 같아 무력해질 때, 어쩌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각자 자신의 모습 그대로 축제가 되어 아름답고 자유롭던 퀴어퍼레이드의 열기. 난민 가족과 함께 한 파티에서 각자 서로의 언어로 노래하며 쉼 없이 터져 나오던 웃음. 낙태죄 폐지를 위해 만든 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속 진심 어린 공감의 반응들.
그리고 한편, 우리가 ‘난 네 편이야’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벅찬 용기를 경험하기도 한다. 지역의 여자고등학교 동아리 학생들과 ‘생리간담회’로 시작된 만남은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새로운 ‘생리콘서트’로 재탄생했다. 또다른 고등학교에서는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에 대한 강연 다음 날, 여학생들이 같은 학교 남학생들의 백래쉬(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에 저항하여 1인 시위와 퍼포먼스를 벌인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으로서, 여성 한 명 한 명의 경험과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퉁 쳐지지 않는, 각자의 몸과 삶을 가진 존재로서의 나이자 우리. 그 속에서 ‘나’의 목소리가 ‘우리’의 목소리임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서로에게 굳세고 단단한 힘이 됨을 느낀다. 나 역시 ‘우리’에게 힘이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두려움과 망설임을 이기고 또 한발 걸어갈 수 있는, 일어나 소리 내고 싸울 수 있는 용기가 된다.
모든 여성이 각자 선 자리에서 자신의 무기로 치열하게 싸울 때, 산부인과 의사라는 나의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언니들의 병원놀이’ 활동은 현재진행형인 이 고민에 대한 나 스스로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서 진짜 ‘선택’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의 조력자이자, 다른 여성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든든한 무기이자 방패가 되고 싶다는. 설레는 꿈이자 단단한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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