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1. 넌 무슨 여자애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니?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바람의 나라, 쥬니어 네이버 동물농장과 같은 게임들은 사람들에게 어느새 ‘추억’의 게임이 된 지 오래다. <페이머즈>의 다른 활동가들도 역시 이 게임을 ‘어린 시절’ 즐긴 게임으로 많이 추억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런 게임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보호자들은 ‘여자애’가 감히 ‘컴퓨터 게임’을 즐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나는 위에서 나열한 게임의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그 게임을 직접 즐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게임을 즐기고 좋아하는 내 마음은 이런 억압에 꺾일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보호자 몰래 게임방송을 본다던가, 좋아하던 비디오 게임을 주제로 학교 과제물을 만드는 등 그 애정을 은밀하게 갈고닦으며(?) 자랐다. 그러다 학업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무렵, 일종의 반항으로 게임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왔다.
2016년 중순, ‘오버워치’라는 게임이 사람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을 타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서점이나 영화관 등으로 도피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러다가 PC방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그렇게 PC방에 다니기 시작했고, 거기서 ‘파이널판타지14’와 같은 온라인 게임들을 플레이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하면서도 사소한 일탈이었다 싶지만, 게이머로서는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수험생활을 마치고 성인이 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게이머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성 게이머로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2. 한국에서 여성 게이머로 살아가기: 난이도 ⋆⋆⋆⋆⋆⋆
트위터 ‘옵치하는 여자들’(현 ‘게임계 내 여성혐오 고발계정’, @famerz_GGYG)에 게시된 자료에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혐오 발언들이 담겨있다.
‘메르시는 이쁜 여자가 해야함’, ‘과학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는 긴장감을 낮춰. 긴장감이 없어서’, ‘오늘 OO 먹어야겠다’ 등등….
계정에 업로드된 인게임 채팅 이미지에는 오직 혐오발언 피해자가 ‘여성’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들은 말로 가득하다.
나는 갓 온라인 게임을 시작해 보이스채팅을 이용하지 않았던 오버워치 라이트 유저였던데다가, 닉네임도 성별을 추측하기 어려웠기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트위터 계정에 게시된 고발들을 확인하고 나니 두려움이 생겼다. 앞으로 게임을 할 때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희롱과 언어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2016년은 강남역 살인사건과 게임계 내 페미니즘 사상검증으로 인한 김자연 성우 해고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해였다. 이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나는 ‘여성’인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곤 했다. 그런데 심지어 즐거움을 위한 취미생활인 게임에서조차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해에 시달려야 한다니. 이 부당한 처사에 화가 치솟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느꼈던 두려움은 곧 분노로 변했고, 2016년 12월경 당시 막 단체로서 출범을 준비하던 ‘전국디바협회’(현 페이머즈)의 스탭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페미니스트 게이머’로서 게임계 내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3. 게임은 남자의 놀이문화다?
게임이 남자들의 놀이문화라니, 정말 재미있는 헛소리 아닌가? 하지만 이 오류 가득한 명제는 실제로 게임계 내에서 ‘팩트’로 통용된다. 남성 게이머들의 생각 속에선 여성 게이머들은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과 같으며, 여성이란 존재는 오직 성적 물화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게임에서든, 게임 커뮤니티에서든 그들이 게이머로서 존재할 공간이 어느 하나 허락되지 않는다. 게임 내에서 내가 여성임이 드러나면 곧바로 성희롱 등의 여성혐오 발언에 노출되며, 커뮤니티는 여성 게이머들을 적극적으로 타자화하고 심지어는 외모 품평에 성희롱까지 일삼는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게이머들은 소통 자체를 포기하거나 남자 행세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이 오롯이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이머즈가 페미니스트 여성 게이머 단체로서 추구했던 가장 큰 목표는 ‘게임계 내 여성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것과 ‘여성 게이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꾸리는 것’이었다.
게임문화 내 여성을 가시화하던 활동 초반에는 트위터에서 안티 페미니스트들과 다투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활동가들은 자신이 ‘진정성 있는 게이머’임을 증명하기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의 레벨이나, 스팀(게임 판매 플랫폼) 등의 게임 목록을 캡쳐해 인증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증명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리와 페미니즘 논제로 다투는 이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데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우리가 제시한 자료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곡해되어 다시 우리를 공격하는 데 사용됐다. 애초에 ‘진정한 게이머’란 무엇일까?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어느 정도의 금액을 게임에 소비해야만 ‘진정한 게이머’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이런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우리를 비롯한 많은 여성 게이머들은 누구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그 흐릿한 기준 안에서 끝없이 ‘진정한 게이머’임을 증명하기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게임계에서 여성 게이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증명’과 ‘진정성’을 요구받는다. 반면, 게임 업계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메갈’이라며 사상검증이나 즐기는 블랙컨슈머 무리들은 그 어떤 증명이나 인정 없이도 ‘진정한 게이머’로 여겨진다. 게임업계는 이런 ‘진정한 게이머’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기꺼이 경청하고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업계 내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권 침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4. 여성 게이머도 ‘사람’이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페이머즈>가 출범했다. <페이머즈>는 미래의 여성 게이머(Female-gamerz)를 위해 지금의 페미니스트 게이머(Feminist-gamerz)가 싸우겠다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런 일념하에 우리는 여성 게이머가 마음 편히 존재할 공간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자연히 우리가 일궈낸 그 공간은 페미니스트 게이머의 비공개 커뮤니티라는 형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같이 게임을 할 페미니스트 게이머를 찾는 공간이었으나, 모임이 발전하며 독서 모임을 통해 함께 공부도 하고, 만나서 보드게임을 즐기기도 했으며, 2017년 초부터 최근까지 ‘페미답게 쭉쭉간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110주년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시민난장’ 등 다양한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는 <방해말고 꺼져!: 게임과 여성>(섀넌 선-히긴슨 감독, 2015, 원제 GTFO: Get the F&#% Out)이라는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게임산업 내 여성혐오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내용 중 ‘여성 게임 개발자’들과 ‘여성 게이머’들이 만나는 교류의 장인 ‘긱걸콘’(Geek-girl Conference)이라는 행사가 등장한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게임 개발자’와 ‘게이머’가 만나는 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국내 최대 게임쇼인 ‘지스타’가 2005년부터 개최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PlayX4’라는 게임 행사 역시 2009년부터 경기도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 게이머’들은 게이머들의 축제인 이런 행사에서도 따가운 시선과 외모 품평, 성희롱을 피할 수 없었다.
동료 활동가 중 게임 행사를 무척 좋아해 큰맘 먹고 ‘지스타’에 방문했던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가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여성 게이머에 대한 배타적 시선과 넘쳐나는 성희롱이었다. 그가 게임 부스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을 때면 주변에 아직 플레이하지 못한 남성 게이머들로부터 ‘여자가 여길 왜 와?’, ‘쟤네만 빠지면 난 진작 들어가고도 남았는데’ 등의 비난과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행사 후 ‘지스타’ 후기를 찾아보면 거기엔 꼭 행사에 참여한 여성들의 외모를 품평하며 성희롱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는 그 분위기에 질려 다시는 ‘지스타’에 방문하지 않았다.
게임 행사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요소는 이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지스타’의 경우 많은(대부분의?) 기업이 ‘부스걸’을 고용해 게임을 홍보한다. 노출 심한 복장을 하고 게임 앞에 선 ‘부스걸’은 여성의 성 상품화와 성적 물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존재다. 인터넷에 ‘지스타 부스걸’을 검색하는 순간 나오는 수많은 여성들의 성적 물화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끔 기분이 참담해진다. ‘부스보이’ 같은 말은 존재하지도 않고, 만들 생각도 없지 않은가? 결국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게임 행사에서조차 여성은 그냥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나를 비롯한 페이머즈 활동가들은 이런 점에서 ‘긱걸콘’이라는 행사가 한국에도 꼭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개발자들과 여성 게이머들이 주축이 되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속에 가득 피어올랐고, 이를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2017년 11월 25일, 단체가 생기고 근 1년이 지난 시점. 페이머즈는 ‘FeGTA:: 펙타-페미게이머와 게임 개발자들과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만의 ‘긱걸콘’을 한국에서 개최했다.
5.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 게이머라고요!
‘FeGTA’라는 이름의 여성 게이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우리는 또 어떤 활동을 할지 고민하는 기로에 섰다.
2016년에 운동을 시작한 우리들은 여성혐오적이고 배제적인 분위기가 게임계에 녹아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실태를 두 눈으로 확인해 온 우리는 게임계 내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 행태를 계속해서 고발하고 싶었다. 여성혐오가 판치는 게임문화 내의 문제점을 온라인상에 전시함으로써 그 해악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공공연한 비판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지워져 온 ‘여성 게이머’의 목소리를 되살리고자 하는 취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념 하에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옵치하는 여자들’ 트위터 계정의 리뉴얼을 계획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게임계 내 여성혐오 고발계정’이라는 이름으로 고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후 꾸준히 계정을 운영해왔고, 최근에는 ‘1020세대의 성평등한 게임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꼼짝 마! 게임 속 여성혐오 체포하기’라는 이름의 1020세대 대상 포럼을 개최했으며, 관련한 책자도 제작 중이다. 더불어 지금까지 운영해온 ‘게임계 내 여성혐오 고발계정’을 웹사이트로 구현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한국 게임계의 여성혐오를 알리고 고발하려는 활동가들의 열정과 마음을 모아 열심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여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 이 자리에 있기로 선택한 내가 게임계에 내 존재를 알리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변화를 이끄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고. 그리고 지난 2년간 게임계의 여성혐오에 대해 해온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앞으로도 내 동료들과 함께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미래의 여성 게이머가 여성혐오 없는 공간에서 즐겁게 게임하는 그날까지!!! 나와 <페이머즈> 활동가 동료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계속해서 게임계 내 페미니즘 운동을 지속해나갈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페이머즈>는 그동안 쉴 새 없이 바쁘게 굴렸던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이름의 바퀴를 아주 조금만 느리게 굴려 볼 생각이다. 현생과 페미니즘 운동 양쪽에 매진하느라 맘 편히 게임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명색이 여성 게이머 단체인데 말이다. 속도를 늦추기로 결정하고 나자 동료 활동가 모두들 게임할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앞으로 나올 신작을 고려해 약 1년 동안의 게임 계획까지 짜 두었다. 정말 진심으로 게임을 사랑하는 여자들이다.
“페미니스트 여성 게이머 여러분, 언젠가 게임계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보드게임부터 PC게임, 콘솔게임까지 온갖 게임마니아인 우리 활동가들과 함께 즐거운 게임을 즐겨요! 게임을 하면? (이기면 더 좋겠지만 일단)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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