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1. 울산에서 대학 생활을 한 희수의 이야기
부산에서 청소년기, 울산에서 대학 생활을 보내고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온 지 한 달 정도가 되었다. 밀려드는 과제로 바쁘지만, 그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해야 된다는 생각에 계속 여기저기를 찾아다닌다. 망원동에서 비혼 지향 생활자를 위한 강연을 듣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영화 <벌새>를 보고, 대학로의 연극 티켓을 구매하기. 그러나 드디어 이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기쁨 뒤에는 알 수 없는 속상함이 밀려들어온다. 이것은 내가 울산에 거주할 때는 절대 누릴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망원동에서 강연을 들은 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울산에 살고 있었다면 이 강연을 들을 수 있었을까? 좋아하는 장소, 좋은 강연이라 해도 두 시간의 강연을 듣기 위해 기본 네 시간이 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녁 늦게 열리는 강연을 듣는다면 밤 10시가 넘어서야 울산에 내려가는 버스에 탈 수 있고, 새벽이 되어서야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면 집에 가기 위해 또 택시를 타야 한다.
물론 숙박할 곳을 찾을 수도 있고,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하룻밤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장 잔고는 빈곤하기 짝이 없고, 각자 서울과 울산에 사느라 얼굴 보기도 힘든 친구들에게 재워달라는 말을 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다 보면 아무리 좋은 강연,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도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내가 포기했던 기회와 강연이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지방의,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 소속의, 페미니스트
<페미회로>의 구성원들은 모두 지방에 위치한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DGIST, GIST, KAIST, POSTECH, UNIST) 소속으로, '지방'이라는 특성을 공유한다. 학부생, 대학원생, 교직원 등 페미회로의 구성원은 다양하다. 하지만 모두가 위와 비슷한 경험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아무리 온라인으로 모든 소식을 알 수 있고 부산에서 서울을 두 시간 반 만에 갈 수 있는 시대라지만 여전히 지방에 산다는 건 우리에게 큰 제약 조건이다.
2015~2016년의 한국에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고 엄청난 양의 페미니즘 컨텐츠, 강연, 모임 등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또한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었다.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가 각 지역의 시내에서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의 대학이나 청년 공동체와 연결되기 쉽지 않다는 점 또한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의 페미니스트들을 고립되기 쉽게 만든다.
이런 우리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과학기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배울 곳도, 페미니즘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다. 사실 이런 환경에서는 페미니즘은 고사하고 여학생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2019년 학부 재학생 기준 여학생 비율 32%를 기록한 DGIST를 제외하고, 다른 대학은 여학생 성비가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마저도 몇몇 과에 여학생들이 몰린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여학생 간의 네트워킹마저도 쉽지 않다.
학부 재적 학생 수도 다른 종합대에 비해 적은 편이다 보니 가장 많은 KAIST가 4천5백여 명, UNIST가 3천여 명을 기록했고 나머지 대학은 1천 명에도 미치지 못해 학생들끼리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에 기숙사 학교(기숙사 수용율이 KAIST 70% 상회, UNIST 80% 안팎, 그 외 100% 초과)라는 환경까지 더해져, 소문이 빠르게 돌고 학생들의 활동 범위가 좁아 익명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기에도 쉽지 않다. 대학원생은 ‘실험실’이라는 많아야 20명인 작은 사회에서 생활하기에, 더 부담이 크다.
실제로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에서 과학이나 공학을 공부하는 여학생들은 많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페미회로가 Feminist in STEM(과학 Science, 기술 Technology, 공학 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에서 따온 두문자어. 이공계 분야와 거의 동의어다) 인터뷰 프로젝트를 통해 인터뷰했던 물리학 전공 학부생의 얘길 들어보자. 그는 “수업에서는 정말 저만 여자인 경우도 흔하다”며 “그냥 다른 학생과 저를 동등하게 대해주면 좋겠는데, 다른 학우들과 다른 시선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다. (2019년 3월 14일,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008: 더 나은 물리학으로의 한 발짝, 당근과의 인터뷰 bit.ly/2MMyYe2)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나의 자리가 아니라는 감각은 나 자신의 능력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고, 이공계에서 진로를 이어나가기 힘들게 만든다. 대부분의 과학기술특성화대학 학생들이 연구실 생활을 경험하며 학계에서의 진로를 고려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더욱 심화된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고년차로 갈수록 학계 내 여성 비율은 줄어들어 연구실은 물론 학회에서도 여성 동료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느슨하게 연결된, 그 어떤 사이보다 ‘안전한’ 사람들
학교에서 페미니스트임을 오픈하고 개인 SNS에 페미니즘 이슈를 공유한 이후로, 학교에서 맺은 인연들이 대부분 잘려나갔다. 한 다리 건너면 서로를 다 아는 학교에서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학교 안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학내 공공장소에 음란성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익명으로 신고했으나 학교의 대응은 미미했고, 현수막을 게시한 당사자는 되려 ‘명예훼손’ 운운하며 신고자를 색출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어디에 불법촬영 카메라가 설치되었다는 말, 친구가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말. 소문은 학교에 유령처럼 떠돌아다녔지만 학교 측의 제대로 된 조사나 처벌도, 대응도 없었다. 공식적인 정보가 없으니 학생들은 불안에 떨었지만, 그들의 말은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흩어졌다.
규모가 좀 큰 학교였다면, 또는 서울의 학생들이 그러하듯 학교 밖의 누군가와 좀 더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았을까? 지금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누구도 평온하지는 않겠지만, 계속해서 그런 질문이 내 안에 남았다. 누군가에겐 별 게 아닌 일이 나에겐 너무나 별일처럼 느껴지는 나날, 그리고 나의 고립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내가 그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은 페미회로가 선물한 느슨한 연결이었다. 페미회로에서 만난 우리는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가끔 주고받는 연락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커다란 행사를 열거나 품을 많이 들여 프로젝트를 하는 것에 적합한 단체인 것도 아니다.(페미회로는 구성원이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대학원생이며, 각자의 본업이 있다는 점을 최대한 고려해 일을 진행하기 때문에 전체 회원 수에 비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 편은 아니다. 또 전체 회원이 50명 정도이지만 반 정도는 ‘연대회원’ 상태이며, 남은 회원들도 다 각자의 사정에 맞추어 일을 나누기 때문에 회원별로 활동 정도가 다르다.)
회원들끼리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아,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총회나 세미나를 열어 회원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젠더 감수성이 모자란 연구실 동료와 함께 지내느라 온몸에 날이 서 있을 때, 여성이 부족한 학계의 현실을 보고 화가 났을 때, 내가 공부하고 살아가는 곳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안을 얻었다.
특히 내 경우에는 페미회로에서 만난 사람들과 좋은 동료가 되었는데, 여기서 만난 모두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내가 멈춰야 할 때와 스스로를 먼저 보호해야 할 때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 덕분에 마음을 다치지 않고 나 자신을 지켜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에 능숙하지도 않고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는 어쩐지 페미회로 사람들을 만나는 날엔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귀를 열고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로가 고립되지 않고, 지치지 않도록 든든한 연결망이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페미회로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지금까지 내가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일 거라고, 대책 없이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몇몇 회원들과 만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고, 그동안 같이 활동해왔던 사람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빠짐없이 반가웠다. 우리는 앞으로도 재빠르게 이슈를 소화하거나 거창한 프로젝트를 하는 단체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조금씩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앞으로도 우린 느슨한 연결을 이어가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페미‘회로’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2. 각 지역 페미니스트들을 인터뷰하는 한솔의 이야기
나는 <Feminism in STEM>이라는 이름의 기획으로 여러 대학의 페미니스트 모임을 인터뷰하러 다닌다. 말은 STEM 분야 페미니스트 인터뷰지만, 실제로 내가 만난 사람들은 비(非)이공계 분야 대학생이 훨씬 많다. 인터뷰하러 다니기 시작한 동기는, 앞에서 희수 님이 말한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의 특별한 조건들 때문이다.
내가 처음 학교에서 페미니즘 모임을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임에서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활동은 ‘책 스터디’겠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었고, 구성원들이 어떻게 모임에 재미를 느끼게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내게 선배가 있었더라면’ 고민이 덜하지 않을까 아쉬워했다. 사람들을 꾸준히 모임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 대자보 쓰는 방법, 정기 행사를 하는 방법 등을 능숙한 선배에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모델이 간절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인터뷰를 하는 것은 ‘선배를 찾아다니고 소개하는 일’이다.
선배들을 만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희수 님이 말한 현실 조건의 다른 면에서도 살펴보려 한다.
일반 대학보다 페미니즘 활동이 제약받는 조건들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에서는 대학원생 수가 학부생 수보다 월등히 많다. 보통의 대학에서는, 페미니즘 모임의 구성원이 대부분 학부생이고, 대학원생 페미니즘 모임은 드물다. 있어도 학부생 모임과 유리되어있다. 페미니즘 모임 구성원 대부분이 이공계 대학원생이라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임에 낼 수 있는 시간이 현실적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의 학교별 페미니즘 모임은 주로 스터디 위주로 운영하고, 가끔 사업을 벌인다. 일상적인 스터디는 물론, 간단히 카드뉴스라도 만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이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
대학 안에서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페미니즘 활동이 익명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도 치명적인 약점이다. 페미니즘 활동이 모임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학내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모임 밖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생리 공결제’(월경통으로 인해 결석하게 된 경우, 출석을 인정해주는 제도)를 마련하려면 총학생회를 만나야겠고, 페미니즘 부스를 운영하거나 관련 행사를 진행할 때 어떤 구성원은 진행을 맡고 스태프를 맡아 불특정 다수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구성원이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기를 꺼린다면,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소수 회원에게 업무가 과중되고 결국은 얼마 못 가 탈진하게 된다. 그 회원에게도, 모임에도 비극이다.
페미니즘 모임이 익명성을 띠어야 해, 모임 밖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나 책임감 있는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면, 자조 모임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별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 모임에서 활동하는 목적이 피해 서사 안에서 피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아픔을 자원 삼아 무언가 해야 할 텐데, 어쩔 수 없는 익명성은 아픔을 자원으로 삼지 못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조건이다.
종합대가 아니라는 점도 다른 대학과는 구분된다. 사회대나 인문대에서는 학과 공부와 페미니즘을 병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종합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많은 경우 종합대에서는 고민을 나눌 교수와 선배 찾기를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특성화대학교들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과학이 사회학 혹은 인문학과 연결점이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과학철학은 현대에만도 걸출한 학자들을 여럿 배출했고, 과학사회학도 결코 작은 분야가 아니다. 실제로 KAIST는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이 사회대와 비슷한 연구를 한다. 문제는, 정책대학원이 부전공 프로그램으로만 학부 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젠더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교수를 일상적으로 만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교수를 만날 기회가 적다는 문제는 단지 공부에 도움 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넘어, 모임의 확장성과도 연결된다. 전북대학교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인터뷰가 잘 보여주듯이, 여성학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사회학, 철학, 인류학 교수는 대학생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전업 활동가다. 그런 교수들이 없으면 학생들은 지역 여성단체 등 사회 연결망도 찾기 어렵다.
지역 여성주의 단체, 선배 페미니스트와의 ‘연계’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내 관심사는, 어떤 단체나 개인의 활동이라기보다도 그들이 놓인 ‘조건’이다. 조건들을 거칠게 나누어, 지역과 대학으로 구분해서 소개해보겠다.
‘지역성’을 잘 보여주는 인터뷰로는 전페넷(전북대학교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인터뷰를 꼽겠다. 전페넷 인터뷰는, 전페넷 회원들이 속해있던 지역 조직에 많은 분량을 할애해 종합대의 장점과 지역 조건을 알아보았다. 전페넷은, 전북대 미투(#MeToo) 운동을 계기로 전북대의 여성연구소 교수님을 중심으로 흩어져있던 전주 지역의 여성주의 조직들이 모였다.
‘대학’이라는 조건을 잘 보여준 인터뷰는 곧 온라인에 발행될 유니브페미(범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인터뷰다. 인터뷰한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성균관대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해오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총여학생회 재건 투쟁에 참여했는데, 재건의 필요성과 방법, 재건 실패 이후 유니브페미를 결성하기까지 과거 경험이 많이 반영되었다. 과거 세월호 진상 규명 운동을 하며 겪었던 어려움, 학생회 등 공식 자치기구에서 활동해본 경험이 총여 재건 투쟁 이후 활동에 영향을 끼쳐왔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여성주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세월호 활동과 단과대 학생회장 경험이 이들로 하여금 성균관대라는 공간을 가늠하게 하고, 총여 재건 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학내 여성주의 활동이 학교의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면, 결국 총학생회와 학교 본부를 상대해야 한다. 학교 본부의 어떤 직책의 누가 우리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지 미리 안다면, 총학생회에서 의결 과정에 익숙하다면,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사회에 익숙해지는 것은 페미니즘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유니브페미 인터뷰이들은, 여성주의 활동을 하기 위해서 여성주의 활동‘만’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 소모임들이 지역의 다른 조직들과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다른 조직이라 함은, 2030 영영페미 그룹뿐만이 아니라 지역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소위 ‘기성 여성단체’를 포함한다. 포항 한동대 ‘성소수자 차별’ 사태에서 포항여성회에서 큰 활약을 해주었듯이, 대학의 페미니스트들에게 기성 여성단체는 좋은 동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성단체는,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다. 대학의 여성주의 모임이 독자적인 사업을 벌이기 어렵다면, 여성단체에 기대어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모임의 수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임 밖의 사람들과도 소통해야 한다
또한 나는 대학의 여성주의 모임들이 익명성을 벗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비(非)회원들과 만나길 바란다. 주변 환경이 적대적일 때 익명성을 벗기란 쉬운 선택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비회원이란,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까지도 포함한다. 사람을 가려 만날 방법은 없다. 불특정 다수를 만난다 해도,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이 일부러 페미니즘 모임을 만나려는 일도 드물 것이다.
아주 가끔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이 페미니즘 모임에 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여성주의 모임의 목적이 모임의 안전이라면, 이런 사건은 안전이 위협당한 사건이 된다. 그러나 안전을 넘어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이런 일은 그저 언제인가는 맞닥뜨려야 할 일일 뿐이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사람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일부러 적대적인 사람을 찾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단체 활동에 지장을 빚는 정도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비유를 들자면, 배의 목적이 안전하게 항구에 정박해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성주의의 힘이 다양성에서 온다면, 같은 집단 안에서만 의견을 나누는 일은 장기적으로 본다면 독이다. 집단 안에서 다양한 의견을 장려하고 차이를 드러내는 일만큼이나, 집단 밖 사람이 아무런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집단 밖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집단이 누울 자리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를 어떻게든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어떻게 던져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다른 사람들은 나의 이런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저런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 못하는구나’, ‘이 이슈에는 관심이 많지만 저 이슈에는 무심하네’라는 것을 체감할 필요가 있다.
비회원을 만나는 일은 단체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여성주의 단체라는 이유만으로, SNS를 통하거나 지인을 따라 단체에 가입한다. 단체는 그럭저럭 잘 크지만, 단체를 운영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새로운 회원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르고, 단체에 바라는 점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원들의 관심, 지향, 기대 등을 파악하는 일은 단체 운영에서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관심, 지향, 기대 등을 단편적이지 않은 대답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질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 나는 비회원을 꾸준히 만나고 싶다. 사실 비회원이 하는 말은 회원이 하는 말보다 듣기에 ‘부담 없다’는 장점이 있다. 비회원은 어떤 의견을 내도 단체와는 무관하기에, 단체와 자신의 차이를 더 쉽게 드러낼 수 있다. 차이를 발견한 뒤에는, 서로 맞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고 함께 새로운 활동을 모색해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비회원과 단체가 꾸준히 만난다면 서로를 좀 더 가늠할 수 있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고, 덜 실망한다. 회원에게는, 단체와 걸음걸이를 맞춰보고 가입해볼 기회가 필요하다.
만나본 비회원이 우리 단체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좋다. 우리는 이질적인 존재를 통해서야 자신을 비로소 인식하기 마련이다. 마치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 파리에서 삼겹살을 찾을 때였던 것처럼. 단체가 자신을 더 잘 아는 데에는 이질적인 비회원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비회원도 이질적인 단체를 만난 뒤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페미회로의 주요 활동]
-Feminist in STEM 인터뷰 프로젝트 페미회로는 2017년 첫 시작 이래로 여성과학기술인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인터뷰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고인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컴퓨터 공학 등 다양한 분야와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직장인, 프리랜서 등 다양한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최근에는 '연결'이라는 키워드로 범위를 넓혀 각 지역의 페미니스트 단체를 만나기도 했다. 인터뷰는 페미회로 아카이브(femicircuit.wordpress.com)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페미회로 여성과학기술인 위키문서 작성 프로젝트 2019년 3월부터 페미위키(femiwiki.com)에 여성과학기술인 위키문서를 작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여성 과학자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는 제스 웨이드 박사의 프로젝트에서 착안했다. 국내외 20명의 여성과학기술인에 관한 문서를 작성했으며 지금은 잠시 쉬고 있는 상태.
-페미회로 성인지 연구 책 스터디 2018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페미회로 성인지 연구 책 스터디는 성인지적 관점에서 과학에 접근할 수 있는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젝트이다. 1~2주에 한 번씩 정해진 분량을 읽고 서로의 감상을 나눈다. 지금까지는 과학사학자 론다 쉬빈저의 <젠더분석: 과학과 기술을 바꾼다>(연세대학교출판부, 2010), 문화사 연구자 한민주의 <해부대 위의 여자들: 근대 여성과 과학문화사>(서강대학교출판부, 2017)를 읽었고, 앞으로는 과학잡지 <에피> 9호를 읽을 예정이다. 작년 12월에는 스터디 내용을 바탕으로 KAIST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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