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시설 운동, 모든 ‘시설화된 삶’의 자립을 꿈꾸다

장애여성, 거리 청소년, 비혼모, 난민…IL운동의 동료들

박주연 | 기사입력 2019/11/25 [11:53]

탈(脫)시설 운동, 모든 ‘시설화된 삶’의 자립을 꿈꾸다

장애여성, 거리 청소년, 비혼모, 난민…IL운동의 동료들

박주연 | 입력 : 2019/11/25 [11:53]

주거와 삶, 내몰리고 분리된 사람들

 

최근 ‘5평짜리 청년 임대주택’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고(참고: “평생 머물 것 같은 5평”…‘청년임대주택’ 둘러싼 청년들의 슬픈 논쟁, 이주빈 기자, 한겨레, 2019년 9월 18일자) 이후, 청년들의 주거 관련 이야기가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참고: [오! 평범한 나의 셋방]친구 초대는 2평, 요리는 3평부터…1평은 잠만 자는 방이죠, 심윤지·김희진 기자, 경향, 2019년 11월 5일자) 그리고 그런 주거 현실의 주변에는 5평 남짓한 공간이라도 감지덕지하게 여겨야 한다는 식의 말과 청년 임대주택을 ‘빈민 아파트’라고 부르는 말이 존재한다.

 

사회가 누군가를 공간 지리적으로 어떤 특정한 곳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도 어딘가로 쫓기듯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주거에 대한 주도권을 잃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런 질문이 ‘청년’에게만 던져진 건 아니다.

 

그저 공간만 만들어 제공하면 된다는, 국가 시스템의 근대적 관념에 일찌감치 반기를 들었던 장애인 IL(자립생활, Independent Living) 운동은 “장애를 ‘결함’과 ‘무능’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삶에 통제권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비장애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며 시작”했다. 국가가 ‘시설’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수용하고 사회와 분리/배제하는 것을 비판해 왔다.

 

그래서 장애인 IL운동은 장애인들을 시설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살게 하는 ‘탈시설’ 운동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더 깊이 다가가 보면 이 운동이 장애인만이 아니라 ‘주거와 삶’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논쟁하면서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 <2019년 IL과 젠더포럼-공동행동과 도전행동> 1부 라운드테이블. 왼쪽부터 사회 장애여성공감 나영정,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조미경 소장, 에이스환자요양병원대책위 권미란,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함께걷는아이들 변미혜, 한국한부모연합 오진방 사무국장, 토론토대학교 김현철.   © 일다(박주연 기자)

 

이제 국내 장애인 IL운동은 범위를 더욱 넓혀 다양한 관점에서 ‘시설화된 삶’들을 조명하고 있으며, 그 삶들과 연대하여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지난 5일,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2019년 IL과 젠더포럼-공동행동과 도전행동>(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주최, 서울시 지원)도 그 일환이다.

 

시설을 벗어났지만, 가족(남편)에 의해 통제당하는 삶

 

장애여성의 독립생활을 지원하는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조미경 소장에 따르면, 시설은 배제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서열화를 강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수용시설의 설립 목적은 국가가 규정한 ‘사회적으로 문제 있는 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이들을 통제하여 사회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함에 있다. ‘문제 있는 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의도된 수용시설의 특수성은 거주인을 비정상 범주로 낙인화함으로써 정상 범주를 강화하고 사회 구성원 간의 서열화를 공고하게 만든다.”

 

시설에서 거주하는 장애여성들은 “관계 맺기가 제한”되며 “‘요보호자’, ‘관리대상’이라는 사회적 위치와 위계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관리자(보호자)에 의해 독립의 가능성 여부가 판단되고 서열화되어 기회가 차단된다.” 또한 “재생산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성과 재생산 권리가 박탈”되어왔다.

 

시설을 벗어나는 건 장애여성의 자립생활에 필수적인 일이다. 하지만 조미경 소장은 “시설을 벗어난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건 아니라는 점들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단식투쟁을 강행하며 어렵게 탈시설하였지만 지금은 ‘남편’이라는 ‘시설장’에 의해 일상을 통제당하며 ‘가족이라는 시설’에 갇혀 살고 있다”는 어느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자원과 삶에 대한 선택지가 없는 장애여성이 시설 안/밖과 상관없이 시설화된 삶을 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조미경 소장은 그런 점에서 “시설화는 지배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보호/관리’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사회와 분리해 권리와 자원을 차단함으로써 ‘무능화/무력화’된 존재로 만들며,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제한하여 주체성을 상실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탈시설 운동에 있어 ‘시설’ 아니면 ‘지역사회’라는 이분법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설폐쇄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이지만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도 장애, 젠더, 나이, 인종, 성적지향 등의 정체성을 이유로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탈시설 운동이 단지 시설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할 때, 여성과 소수자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겪는 시설화의 문제는 의제화되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조미경 소장은 “교차적 관점에서 ‘시설화’를 비판하고 이를 의제화하는 논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탈가정 청소년은 왜 ‘쉼터’가 아닌 거리로 나올까

 

‘보호’라는 이름으로 시설로 안내되는 이들 중 대표적인 집단은 장애인 말고도 있다. 바로 탈가정 청소년이다. 함께걷는아이들의 변미혜 활동가는 “(2017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한해 청소년 중 가족 내 여러 이유로 일어나는 폭력으로 인해 27만여명이 가정으로부터 ‘탈출’하고 있고, 탈가정 청소년 중 10%가 청소년 보호시설(청소년쉼터 등)으로 입소”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중 반이 넘는 비율인 “55.9%가 무단이탈, 자의 퇴소, 무단퇴소 등의 이유로 거리로 다시 나온다.”

 

가정으로부터 탈출한 청소년을 ‘보호’하는 시설인데 입소율이 왜 이렇게 낮을까? 그리고 왜 청소년들은 ‘보호시설’이 아닌 거리로 다시 나오는 걸까? 변미혜 활동가는 “청소년쉼터의 설치 목적이 ‘가출청소년에 대하여 가정·학교·사회로 복귀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보호하면서 상담·주거·학업·자립 등을 지원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결국 쉼터는 ‘가정 복귀’를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시설에선 거소지정권(친권자가 지정한 장소에 거주해야 함) 탓에, 청소년이 가족과의 관계(폭력 등)가 어떤지와 상관없이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서 쉼터에서 지내는 것을 동의받아야 하거나, 보호자가 원치 않을 땐 폭력이 여전한 가정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청소년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 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에서 제작한 “장애여성, 여기 잇슈(Issue) 카드뉴스 4호!” 중에서 

 

거기다 ‘청소년’이라서, ‘시설’(쉼터)에 있으니까 “개인의 상황이나 특성이 고려되기보다 시설 운영지침에 의해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경우”도 있고 “시설의 실무자가 자신의 가치관을 너무 당연하게 강요하기도 하는데 이에 어긋나면 거리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시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한 변미혜 활동가는 “지금 사회는 청소년이 집에서 살 수 없는 이유나 집이 없는 상태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문제가 있는 집단’ 아니면 ‘불쌍한 사람’으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시설은 “사회에 다양한 존재들과 다양한 관계들이 존재함에도, 이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고민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삭제해 버린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가 있다. 변미혜 활동가는 “대다수 청소년 시설과 기관에선 성소수자 청소년을 만나기 어렵다고 얘기하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입소를 거부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퇴소를 당하기 때문에, (입소 청소년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한부모 가족은 시설에 들어가길 원치 않는데, 왜 예산은?

 

또 다른 형태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 집단에는 한부모 가족도 있다. 최근 국가의 저출생 위기 진단으로 인해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는 중이다. 한국이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루고도 아이를 수출하는 해외입양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큰 이유가 비혼모에 대한 낙인이었다는 걸 생각할 때, 국가가 한부모와 그 자녀를 ‘보호’하겠다며 나서는 게 의아하게 보일 정도다.

 

한국한부모연합 오진방 사무국장은 “한부모가족복지시설 지원이 전년 15억2척5백만 원이었던 것에 반해, 2019년엔 64억9천3백만 원으로, 네 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시설을 이용하는 한부모 가족이 늘어난 것일까?

 

하지만 “통계청 측에서 발표한 지표해석으로는 2017년 12월 말 42개 모자보호시설에 1천853명이 생활 중”인데 “이는 한부모 가족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 ‘시설 아이돌봄 서비스 지원’ 사업은 이용자가 실제로 늘어났나? “설문지를 통해 시설에 거주한 경험이 있거나 현재 거주 중인 한부모들에게 2019년 아이돌봄비를 물어봤으나 모두 ‘모른다’고 답했다.”

 

▲ 모자보호시설수 및 현황     ©출처: e나라지표

 

오진방 사무국장은 “설문조사를 통해 알게 된 건, 한부모 가족들은 사생활의 경계도 없고, 인권존중도 없고, 권력적인 시설 운영 및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시설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주거시설도 좁고 주변 환경도 낙후되었다는 점, 주위의 시선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감시를 받는다는 점도 시설을 꺼리는 이유”로 꼽았다.

 

국가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서 예산을 늘리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오진방 사무국장은 “한부모들이 시설에 가지 않을 땐 무슨 이유가 있는 거다. 시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왜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지를 더 살펴봐야 하지 않나? 한부모들이 가진 욕구는 한부모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냐?”라고 항의했다. “시혜적인 복지서비스를 늘리려는 시설과 기관을 늘릴 게 아니라, 한부모 가족이 놓인 위치와 경험을 이해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생존하려면 자유를 반납하라’ 입소 강요당하는 사람들

 

‘보호’가 아니라 아예 ‘배제’를 위해 만들어지는 시설도 있다. “(국가가) 추방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교도소와 유사하게 설계된 외국인수용시설을 ‘보호시설’의 이름으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활동가는 “전국적으로 전문 보호시설 3곳과 각 출입국 및 출입국 출장소 부속 보호시설 총 25곳을 설치했으며, 매년 약 2만여 명의 외국인을 수용시설에 구금시키고 있다”고 실태를 밝혔다.

 

이런 시설에서 난민들은 때때로 위협을 느낀다. “(특히 아랍권 출신) 난민에 대해 외국인 체류관리 및 동향조사라는 명목을 내세워 동의와 절차 없이 개인의 집, 휴대폰, SNS, 종교생활 등 가장 사적인 영역을 사찰하고 침범하기도 하고, 신분증 및 여권을 압수하기도 하고, 비자발적 동의를 받아 마약 검사, 범죄경력 조회를 하는 등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일부 난민들은 “다른 주거의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입소를 신청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실상 생존을 위해 다른 선택권이 없는 거다. 이들이 ‘자유’를 반납하고 ‘생존’을 선택하는 걸 자의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국가의 예산 사용과도 관련이 있다.

 

“국가는 약 200억 원의 예산을 소요하여 건립한 이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있으며, 매년 난민예산의 많은 부분이 이 시설의 운영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연주 활동가는 “난민신청자에 대한 유일한 지원제도인 ‘생계비’는 예산 부족의 이유로 전체 난민신청자의 3.2%만이 받을 수 있었는데,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입소한 경우엔 79%가 지원을 받았다(2017년 통계 기준)”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런 상황이 시설로 난민을 유인하게 되고, 지배 권력은 이 시설을 유지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이즈 환자의 경우에도, 질병관리본부가 위탁사업을 하는 요양병원으로 입소를 강요받기도 한다. ‘에이즈 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권미란 활동가는 “요양병원에 입소한 에이즈 환자들은 자유롭게 퇴원할 수 없다”고 했다. “요양병원은 ‘가족의 동의’ 혹은 ‘국가의 허락’을 받아오는 걸 요구하거나, 퇴원 의사를 묵살하기도 한다”는 것. 또 “간병인이나 간호사실에서 수시로 지켜보고 따라다니면서 병원의 규범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반면 “에이즈 환자를 입원시켰다는 말이 새어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에이즈’라는 말도 못 하게 하거나, 공간을 구분하고 이동을 제한하기도 한다. 다른 환자들과 교류하지 말라는 요구도 한다.” 이런 요구들은 환자들을 주눅 들게 하고, 사회적 낙인을 스스로도 내면화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

 

권미란 활동가는 심지어 “요양병원의 여건에 몸이 맞춰야 하기에, ‘월경으로 피가 많이 나오면 안 된다, 케어가 안 된다’는 이유로 자궁적출수술을 받은 경우가 있을 정도”로 개인의 기본권이 무시된다고 덧붙였다.

 

탈시설 운동의 동료들, 더 많아지길

 

포럼에 참여한 패널들은 각기 다른 맥락에서 ‘시설화되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공통적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주거 공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가 지켜져야 할 필요성 그리고 지역사회와 맺는 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조미경 소장이 탈시설의 목적과 의미를 “시설화를 유지하는 지배 권력은 무엇인지 분석하고 이에 대항하며 상실되었던 삶에 대한 주체성과 권리를 되찾고, 나아가 시설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상성 중심의 사회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포럼에서 던져진 “무엇으로부터 탈(脫)할 것이냐?”라는 질문은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시설화를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해체하기 위해서는 시설화를 경험하는 동료들과 함께할 공동행동이 무엇인지 논의하고 실천하는 게 필요”하다.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탈시설 운동을 하는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조미경 소장의 마무리 발언이 많은 이에게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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