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많은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페미니즘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고,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과 차별, 위계 등에 문제 제기하며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새로운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노래 부르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소중한 ‘우연한 만남’. 이 묘약은 비건 식당과 퀴어프렌들리한 술집에도 있지만, 집회에도 있다.
공연을 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너무 늦게 시작했고 그만큼 꾸준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 함께하는 자리였고, 건물주의 횡포에 의해 쫓겨날 상황에 놓였던 연희동 카페 분더바와 이태원 테이크아웃드로잉, 재개발로 사라진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여관 골목’ 등등... 쫓겨난 사람들과 쫓겨난 공간들을 지키는 곳에 가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용기에 빚을 지며 살고 있다
2014년 ‘#예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을 때, 죄책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들었다. 여성혐오에 일조했다는 죄책감과, ‘여성스러움’이라는 단어가 펑 하고 사라지는 해방감이 교차했다.
평생 어느 정도의 ‘여성성’이라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해왔었다. 낮은 목소리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나를 특이한 사람 취급했고, 그것이 싫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여성성’을 가지려 애썼다. 하지만 아, 그냥 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삶에서 큰 숙제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지는 모르겠다. 이런 말 하면 사람들이 잘 안 믿겠지만 습관적으로 목소리 톤을 높이곤 한다.
2016년, 처음으로 여성운동 관련한 공연의 섭외를 받았을 때 나는 뛸 듯이 기쁘면서도 무슨 캡틴 마블이 된 양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어떤 공연에 가서는 말을 거의 못 하고(심지어 토크쇼였다), 또 어떤 공연에서는 너무 흥분해 눈 오는 겨울에 맨발로 공연을 했다. 내가 답답했고, 발이 간지러웠다.
같은 해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이 있었다. 모든 것이 무섭고 걱정되었다. 동네에 여성 사장님 혼자 운영하시는 단골 찻집이 있었는데 그분이 걱정되어 몸이 달달 떨렸다. 친구가 화장실에 가면 문 앞까지 따라가서 기다렸다. 내가 화장실에 갔다 나오면 문 앞에 친구가 있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열린 여성혐오 반대 집회에서 공연 섭외가 왔다. 거절했다. 너무 무서웠다. 별 상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집으로 오는 마을버스 안에서 집회 포스터가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보았다. 공연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 이랑님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내리막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난 누군가의 용기에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이 말만 계속 생각했다.
“당신은 성차별주의자” 후렴구가 있는 노래를 처음 부르던 날
연대 공연의 세트리스트(Setlist)를 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하지만 고민에 비해 결과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중 하나는 “당신은...”이라는 곡이다. ‘당신은 성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하는 밝은 톤의 후렴구를 가진 노래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구글에 내 이름의 연관검색어로 ‘신승은 성차별주의자’가 뜬다.
이 노래를 처음 공연에서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부른 날이 생생하다. 낙성대 쪽에 위치한 <사운드마인드>에서 한 공연이었다. 원래 세트리스트에 없었는데 그냥 갑자기 ‘제가 최근에 만든 노래인데요’ 하면서 조심스레 불렀다. 누군가는 싫어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라는 마음으로. 솔직히 좀 쫄렸는데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환호해주셨다. 누군가는 정말 싫어했겠지. 뭐 어쩔 수 없다. 이상하게 이 마음 이후로 ‘우연한 만남’이 더 많이 생기는 것만 같다.
얼마 전, 시민자치로 운영되던 경의선공유지가 결국 개발로 내몰리게 되었다. 공유지에 자리 잡았던 <아현포차>의 이주기금마련 및 마지막 인사를 위한 공연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정말 많이 만났다. 여기 다 계셨어요? 싶었다. 연대 공연에서, 집회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우리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싫어한다. 우리라는 말을 뱉는 순간 누군가와는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선을 뺀 우리’라는 말이 존재하면 좋겠다. 나도 끝없이 거기에 계속 가고 싶다. 우리가 없으면 불안하고 무서워 미칠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있고 누군가도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시간이 많다.
길가에 성범죄자의 노래가 울려 퍼질 때, 여성들의 분노에 꿈뻑도 안 하는 재판 결과를 볼 때, 그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 달린 갑갑한 댓글을 볼 때, 거기에 달린 추천 수를 볼 때. 맞다, 다 숫자가 문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숫자를 잊게 하는 묘약, 우리가 함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우연한 만남이 간절해진다. 꼭 오프라인 만남일 필요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만난다! 부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다음 구절은.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이다.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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