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시위에서 국회까지’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것들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인터뷰(하)‘낙태죄’ 폐지 이후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이 다소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긍정적이고 재미있고 다양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셰어 활동가들은 이미 그걸 경험했다. 2020년에 ‘낙태죄’ 폐지 그 이후를 상상하며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를 제작하고, ‘검은 시위에서 국회까지: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과, 국회에 요구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논의하며 그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상상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 좋았다는 말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전문 읽기 http://srhr.kr/2020/1889)는 이름 그대로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임신중지에 대해서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을 텐데, 일반 대중을 위한 가이드북 보다 먼저 나왔다는 점이 좀 의아하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
셰어 기획운영위원이자 산부인과 전문의인 최예훈 씨는 지금 현장에서 필요한 건 여러 가지지만 “임신중지를 상담하는 태도에 관한 정보를 알려줌으로써 의료인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임신중지가 불법이었다고 해도, 현장에서 관련 시술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거든요. 자연적으로 임신중지가 되었을 때도 약물을 쓰거나 시술을 하기 때문에 관련 기술이 없는 건 아니에요. 사실 더 중요한 건 임신중지를 의료서비스로 받아들이고, 원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상담을 진행하는 거죠.”
가이드북에선 임신중지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고, 어떤 말은 하지 않아야 하는지, 또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담고 있다. 필요하다면 연계를 요청하거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다양한 단체들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비용의 장벽을 낮추기 위해 건강보험이 적용될 필요성”을 언급했다. “미페프리스톤(미프진) 등의 유산유도제 도입”도 빨리 해결되어야 하고, 이후 “약물을 어떻게 쓸 것인지 등을 포함하여 임신중지를 다루는 내용이 의료인들을 양성하는 교과과정에도 포함”되어야 한다.
나영 대표는 “약물 도입과 사용 방식에 대해선, 해외 사례 등을 참고하여 빠르게 관련 절차를 진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캐나다의 경우엔 약물 도입 후 보건의료인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매달 모여 임상결과를 공유한 결과, 11개월만에 불필요한 규제를 모두 없앴다는 것”도 언급했다.
‘모자보건법’이 아니라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 필요
의료 현장만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니다. 임신중지와 관련된 사회적 낙인을 없애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포괄적 성교육이 필요하다. 임신, 출산과 양육을 선택할 수 있는 노동권과 주거 환경 등의 논의도 빠뜨릴 수 없다. 그렇기에 ‘낙태죄’ 폐지 운동이 “‘낙태죄’ 폐지를 넘어 재생산권 보장”을 외쳤던 거다.
셰어는 성∙재생산 권리와 건강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내용을 담은 <검은 시위에서 국회까지: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들어 제시했다.
나영정 기획운영위원은 기본법(안)을 검토할 때 여러 단체의 의견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여성 단체뿐 아니라 장애인 단체, 성소수자 단체, 청소년 단체, 이주민 단체로부터 의식적으로 검토를 받고, ‘이 법안이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어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진 권리를 실현하는 법으로, 법이 향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점에서도 ‘모든’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어 나영 대표는 “어떤 법을 ‘대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분절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지금 모자보건법의 대상인 여성도 사실 여성 중에서도 비장애인이며 임신가능한 특정 연령대의 어떤 여성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결혼한, 아이를 낳을 것이라 예상되는 여성인 거죠. 그러니까 자꾸 장애여성, 이주민 여성 등을 다 따로따로 놓고 논의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사람의 삶은 다양한 생애주기의 연속성 상에 있는 건데, 그런 것이 고려되지 않는 게 현재의 모자보건법이죠. 때문에 성건강 따로, 피임 따로, 임신중지 따로, 임신 따로. 이렇게 생각되고 있고요. 그래서 ‘모든’이라는 표현은, 이 법이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 실현에 향하고 있다는 걸 중요하게 보여 주고, 포괄적으로 인식하게 해 준다는 의미가 있어요.”
“성은 기본적으로 관계에 기반한 것” 포괄적 성교육 논의 활발해져야
모든 사람의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위한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성교육이다. 최근 몇 년 간 미투(#MeToo) 운동, N번방 사건 등으로 성교육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대두되고 있지만, ‘성교육’의 의미와 범위에 대해선 각자가 생각이 다르다. 성교육 시간에 남학생들은 자위를, 여학생들은 월경을 질문한다(관련기사: http:// ildaro.com/8941)는 사실만 봐도 성교육과 관련하여 연상되는 주제는 제한적이며 젠더화되어 있다.
셰어의 기본법(안)은 모자보건법에서 형식적으로 성교육을 언급하는 것과 달리, 제9장에서 포괄적 성교육을 다루고 있고, 그 내용엔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또한 셰어의 포괄적 성교육은 ‘관계 형성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제공한다’는 말을 통해 “성이 기본적으로 관계에 기반한 것이라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전제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성교육에 대한 생각이 ‘자위’와 ‘월경’에서 멈춘다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성관계로 이야기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 성교육을 벗어나는 것이고,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관계 안에 불평등과 차별, 차이가 존재하며 그걸 어떻게 다룰 것인지 논의하는 건 공적인 논의여야 해요. 동시에 쾌락과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해야죠. 그 쾌락이 ‘정상적’인 남성과 여성의 정상체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인식이나 몸의 다양성에 기반한다는 것. 쾌락은 일방향으로 정해질 수 없다는 것까지 연결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셰어의 포괄적 성교육이에요.”
셰어의 기본법(안)은 포괄적 성교육의 관점과 방향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과 의무도 분명히 명시했다. 나영정 기획운영위원은 “포괄적 성교육이 실현될 수 있도록 기술과 정보,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라며,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같은 경우 이들에게 맞는 정보나 인프라를 얻기가 어렵다는 전제 하에서 이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 논의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교육에서 소외되어 있고 ‘관계 형성’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이라 할 수 있죠. 시설 거주 장애인들에게 허락된 성교육은 정말 자위와 월경뿐이거든요. 거기서는 관계를 이야기해봤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실현해서는 안 되는 조건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덴마크의 경우엔 장애인이 그룹홈에 입소했을 때, 이 사람의 성적 즐거움을 위해서 누구와 상담할 수 있는지, 누군가와 만나고 싶어할 때 그 만남을 위해서 조력자가 무엇을 조력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전화를 대신 걸 수 있는지 정보를 대신 알아올 수 있는지, 그리고 성관계에서 어떤 사람의 조력이 필요할 때 그 조력을 누가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프라이버시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으며 동의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논의한다고 하더라고요.”
정부와 지자체는 ‘저출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셰어의 기본법(안)을 읽다 보면, 사회의 여러 영역과 접점을 맺고 확장해 나가는 성·재생산권을 상상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를 그려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국가가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 ‘저출산’ 위기의 해답이 여기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출산하면 돈을 주겠다는 정책이 아니라, 성·재생산권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 순 없는 걸까?
나영 대표는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 하는 건, 일단 기본적으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사고방식 자체를 깨야 한다”고 일침했다. “어떻게 하면 결혼을 빨리 시키고 아이를 낳게 만들까. 어떤 사람이 결혼할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깨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성·재생산권 권리가 전반적으로 보장되고, 이 권리가 단순히 출산을 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차원의 권리가 아니라 다른 사회적 권리와 맞물려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걸 고민해야 해요. 어떤 사람의 연령, 노동 조건, 지역적 상황, 장애나 질병 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그에 맞는 권리 보장이 이뤄져야 다음 진전이 가능하죠.”
국가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작년 11월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공동 주최로 <모두를 위한 성·재생산권 이야기> 토론회를 열었다. 이후 12월 발표된 <제 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서도 성·재생산권이 언급되고 있다. 나영정 기획운영위원은 “저출산고령사회 패러다임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국가의 역할이 더 명확해 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영 대표는 “먼저 정부 지자체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여러분에게 성·재생산권 권리가 있으며 여러분이 찾아갈 수 있는 기관과 여러 사회경제적 지원을 문의할 수 있는 기관은 이런 게 있다. 성·재생산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어디에서 볼 수 있다’ 등의 내용을 담은 창구를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현재의 보건소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보건소를 성·재생산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각 지역의 허브의 역할로 만들자”는 거다.
“교육부는 포괄적 성교육이 어떤 학교 전반의 교육을 통해서도 반영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죠. 노동부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차원이 아니라, 재생산이라는 영역도 중요한 노동의 영역이라는 인식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 분명히 제도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에요. 여성가족부는 단지 가족과 청소년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내놓을 게 아니라, 정부와 각 부처들이 실질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과 재생산 권리는 당연한 것…당당하게 요구하자
셰어가 만든 기본법(안)은 ‘검은 시위에서 국회까지’라는 말이 함께한다. 많은 사람들이 외친 목소리가 이제 국회로 가야 한다는 의미일 테다. ‘낙태죄’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영역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모자보건법의 한계도 분명하다. 그렇기에 ‘낙태죄’ 폐지 운동에 참여해 온 활동가, 연구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성·재생산권 논의를 끌어모았다.
최현정 기획운영위원은 “이제 시민들이 정부지자체와 국회에 구체적인 역할을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걸 할 수 있는 건 시민이고,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영 대표는 “우리가 좀 더 당당하고, 권리에 대해 당연해지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 궁금하면 네이버에 물어보지 말고, 국가에 공식적인 절차 마련하라고 요구하며 민원도 진행하자고요.”
나영정 기획운영위원이 “이제는 금기나 죄책감 대신,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나아가자”고 말을 이었고, 나영 대표는 “지금은 그게 불평등하다”며 “누구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누구는 욕망대로 할 수 없고 그럴 가능성조차 없다. 그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그걸 적극적으로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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