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원작은 진수의 ‘삼국지 정사’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이다. 한국에서는 이문열, 황석영 등의 소설가가 번역한 삼국지가 유명하다. 삼국지를 다룬 2차 창작물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다시 말해, 삼국지 재해석은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 레드오션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를 알고 있는 독자는 이미 많고 그만큼 기대치와 보는 눈이 높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재해석이 고유한지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갈리게 된다.
그런데 무적핑크(글), 이리(그림) 작가가 만들고 있는 네이버 웹툰 <삼국지톡>은 매회마다 어떤 독자들이 와서 외친다. ‘조조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원소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논영회는 그런 장면이 아닙니다’… 다른 요구도 있다. ‘누구는 어디 갔나요?’, ‘누구는 왜 안 나오죠?’ 스킵에 대한 반발이 있는가 하면, ‘왜 이 인물은 많이 나오죠?’, ‘왜 이 부분을 질질 끄나요?’라며 스토리 진행에 번번이 지적을 한다. <삼국지톡>을 삼국지를 다룬 다른 만화, 웹툰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삼국지톡>이 왜 제대로 된 삼국지 만화가 아님을 기어코 증명해내려 한다.
결국 이들의 말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삼국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때 슬쩍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당신 것인가요?”
남자들의 삼국지
삼국지를 재해석한 웹툰으로는 마사토끼 작가의 <가후전>, 김달 작가의 <여자 제갈량> 등이 있었다. 가후라는 책사를 주인공으로 조명하거나, 삼국지의 책사들이 만약 전부 여성이었다면? 이라는 가정 위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식이다. <삼국지톡>이 가지고 있는 개성은 지난 무적핑크의 작품 <조선왕조실톡>과 마찬가지로, 모바일 대화 어플을 이용한 연출과 현대문물의 뜬금없으면서 절묘한 교차, 컷툰이라는 형식, 그리고 이리 작가의 아름답고 수려한 그림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톡>은 이제 만 3년이 된 장기연재 작품이다. (삼국지의 초반부라고 할 수 있는 관도대전이 끝이 났고, 조만간 돌아올 예정이다.) 그런데 독자들의 반응 중에 유독 튀는 말들이 있다. 작가의 진행 방향 자체를 문제시하고, 작품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뒤에 원소의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유명하다. 절친이자 적인 원소를 패퇴시킨 조조의 복잡한 심경을 내포하는 장면이기에 소위 ‘위빠’들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일 것이다. 무적핑크-이리 작가는 이 ‘무덤 오열’ 씬을 연출할 때 조조의 위선적인 울음과 그 뒤에 이어지는 진짜 오열에 텀을 두었다. 여기에 일부 독자들은 앞선 위선적인 울음만을 보고서, “작가가 조조 무덤 오열 씬을 왜곡시켰다”고 비난했다. 무적핑크-이리는 줄곧 ‘조조를 싫어한다’는 오해에 휩싸여있고(조조의 서주대학살을 계속 노출시키고, 그를 찌질하게 그린다는 게 이유다), 그것은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적핑크-이리의 해석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 여론이 작가의 자격 시비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를 해석하는 작품을 연재할 때 고증오류를 지적받는 일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작가의 고유의 해석은 존중받아야 한다. 작가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거나, 작품을 보길 중단할 수는 있어도, 매회 나타나서 잘못되었다고 끈질기게 댓글을 남기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리 : “『삼국지톡』 은 남성과 여성 비율이 7대 3정도 되거든요. 다른 삼국지 작품들은 거의 9대 1이에요.”> (채널예스, [무적핑크, 이리 “삼국지는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담이다”] 중에서, 신연선, 2020년 4월 23일)
이리 작가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삼국지를 향유하는 독자 층은 남성에 편중되어 있다. 앞서 삼국지 2차 창작이 레드오션이라고 했지만, 이 말은 남성 독자에 한해서만 진실인 셈이다. 삼국지를 즐기는 여성들의 수는 적고 그만큼 삼국지의 2차 창작물이 여성주의적 관점을 누락시키는 경우도 많다. 이런 와중에 삼국지톡은 뚜렷하게 젠더 감수성을 갖춘,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삼국지를 보여준다.
<“여자든 남자든 어린이든 성인이든 삼국지를 알든 모르든 무조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진짜 재미있는데 착한 삼국지, 딸에게도 읽힐 수 있는 삼국지고요. 무엇보다 정확하게 만든 삼국지예요.”라는 작가는 그래서 이 작업을 “삼국지의 패러디가 아니라 번역작업”이라고 말했다.> (채널예스 인터뷰 기사 중)
이 글에서 삼국지톡이 얼마나 고증이 정확한지를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도, 그럴 식견도 없으며,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삼국지톡의 번역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는 작품이 마무리될 때 즈음에야 제대로 다투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국지톡이 만들어낸 새로운 해석, 여성주의적 해석의 면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남성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은 황족, 부인, 미인계의 수단으로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삼국지가 무적핑크와 이리 작가로 인해 어떻게 ‘딸에게도 읽힐 수 있는’ 작품이 되었는지를 말이다.
여성이 된 캐릭터들이 빚어낸 명장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책사나 장수들의 성별은 모두 남자이나, 삼국지톡에서는 몇몇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기보다, 캐릭터가 여성을 수행함으로써 삼톡의 개성, 인물 간의 조화, 인물로부터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더욱 다채로워졌다.
순유는 조조, 위나라의 책사이다. 순유는 순욱의 (9살 많은) 조카이고, 순욱의 추천을 받아 조조 진영에 합류했다. 그는 여포와 싸울 때 둑을 터뜨려 하비성 안의 적군과 민간인을 모조리 수장시키는 전법을 펼치기도 했고, 조조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전장을 살피는 최고의 참모였다.
삼톡에서 순유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여포를 처형할 때(관도대전 54화 호랑이를 묶은 줄)이다. 결박당한 여포가 조조와 마주하며 내가 아깝지 않느냐, 자신을 살려달라 제안하고, 조조가 그의 제안을 고려해보려 하자, 순유는 ‘여기선 더 할 일이 없을 것 같으니’라며 허도로 귀환한다. 순유는 이미 조조가 여포를 살려두지 않을 것임을 꿰뚫었고, 죽을 사람을 희롱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떠난다.
이때 보이지 않던 순유라는 인물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재해 상황으로 밀어넣는 극악무도한 전법을 핀 인물이나, 그 동기가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싸이코패스여서는 아닌 것이다. 그는 대의를 위해 일하고, 그의 대의가 조조일 뿐이며, 조조를 승리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주군의 희롱질을 가만히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순유의 통찰력과 과감함, 동시에 그의 마지막 남은 주관과 양심을 입체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썬캡을 쓴 ‘아줌마’ 황개가 펼칠 적벽대전은?
황개는 손권, 오나라의 장수이다. 그는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 때부터 전장을 휘젓고 다닌 장수였으며 훗날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삼톡에서 황개는 썬캡을 쓴 ‘아줌마’의 형상을 하고 등장한다. 썬캡과 썬글라스에 쇠곤봉을 든 아줌마가 전장에서 싸우는 장면만으로 이미 흥미롭지만, 앞으로 나오게 될 적벽대전에서의 고문 연기도 기대를 품게 만든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 진영은 조조에 맞서 이기기 위해 황개를 스파이로 파견하려 한다. 오나라의 사령관 주유는 의심 많은 조조가 스파이를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황개가 오나라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고 확신하게 만들 계기를 만들고자 했고, 황개를 실제로 고문한다. 원작 삼국지에서 이때 장면은 나라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려 하는 전형적인 ‘남성성’이 부각되는 장면이나, 삼톡에서는 ‘아줌마’ 황개가 그 씬을 수행하게 된다. 곧 연재 재개될 적벽대전은 어떨지, 이 장면이 어떻게 연출될지 기대될 따름이다.
미축은 유비, 촉나라의 참모이다. 그는 서주의 대부호로 유비의 스폰서라고 할 수 있다. 유비는 조조의 침공을 받은 서주를 구해내 영웅이 되었고, 유비의 영웅됨을 알아본 미축은 자신의 전 재산을 유비에게 올인한다. 삼톡에서 미축은 대부호인 만큼 고급스러운 말투, 옷차림, 아우라를 지닌 엘리트 여성으로 등장한다. 미축과 미부인, 미방이 큰 언니, 작은 누나, 막내 동생으로 함께 모여 있는 씬은 절묘하게 조화롭다.
미축은 소위 간손미(간옹, 손건, 미축)라는 이름으로 묶여 자주 비하되는 삼국지 인물 중 하나이지만, 삼톡에서는 그가 정치적으로 아주 기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미축은 유비가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결정적인 조언을 하는데, 이를테면 조조의 진영 안에 있을 때 유비에게 황제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한 것이나, 조조를 떠나 서주로 도망치는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착한 삼국지’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민도 없지 않았겠지만, 삼톡에서 여성으로 바뀐 인물들의 모습은 원래부터 그들이었던 것처럼 명징하고 또 생생하다. 그들이 여성이기에 작품이 더 재미있고, 해석은 더 다양하게 펼쳐진다.
삼국지는 누구의 것인가
작품의 표현 자체에 제동을 걸어야 할 때에는 그 작품이 혐오를 조장하거나, 증오범죄를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관찰되어야 한다. 오히려 삼톡은 원작 삼국지의 윤리적 문제를 더욱 부각시켜 고발하고 있다.
조조가 저지른 서주 양민 대학살이 어떻게 당시 2세기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면밀히 묘사한다. 한 만화가이자 유튜버가 삼국지 썰을 풀면서 서주대학살을 ‘서주 대효도’ -조조의 아버지가 서주에서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라며 웃음거리로 삼은 것과는 대조되는 방식이다. 삼톡의 댓글에서 작품의 방향성과 작품성을 문제 삼는 이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그 문제 제기의 밑바탕에는 어떤 정서가 깔려있는지 역시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삼국지는 누구의 것인가? 삼국지는 지금껏 남성들의 것이었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삼톡의 댓글 창에서 작가에게 자격 시비를 걸거나, 심지어 나관중은 최고의 작가고 무핑-이리를 비하하는 저급한 비교질이나, 페미 냄새가 난다는 등 성차별적 반동은 지양되어야 한다. 삼국지는 나관중의 것도 아니고, 남성들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다. 모두의 것을 가지고 자기만의 해석으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작품 활동이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무적핑크-이리 작가가 뚝심 있게 자기들의 길을 걸어가길, 지금까지도 재미있었던 삼국지톡을 잘 이어가주기를 기대한다.
[필자 소개] 노창석. “유니브페미 활동가. 책을 만들고 글을 씁니다. 소하연이라는 이름으로는 시를 씁니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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