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최후의 만찬

[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심조원 | 기사입력 2021/12/12 [12:53]

그 여자의 최후의 만찬

[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심조원 | 입력 : 2021/12/12 [12:53]

<팥죽할머니와 호랑이>는 혼자 사는 가난한 여자가 주인공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호랑이를 지게, 송곳, 달걀, 멍석 따위의 도움으로 물리치는 이야기인데, 산중의 왕이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꼴이 시원하고 유쾌하다. 얼개로 보면 영화 <나 홀로 집에>(Home Alone, 크리스 콜럼버스, 1990)와 비슷한데, 영화처럼 한바탕 웃고 넘기지 못할 진한 뒷이야기를 남긴다.

 

▲ 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출처: pixabay)

 

<넷날에 한 노친네레 팍앝(팥밭)을 메구 있누러니꺼니 백호 한 마리가 내리와서 잡아먹갔다구 하거덩.>(『한국구전설화: 평안북도편 2』 임석재 전집2: 평북 선천군 유준룡의 이야기)

 

주인공인 노친네나 할머니를 굳이 이빨이 몽땅 빠진 백발노인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옛날에는 마흔에도 할머니 소리를 듣는 사람이 적잖았고, 지금도 아줌마나 할머니라는 호칭은 ‘더 이상 섹시하지 않은 여자’라는 뜻의 멸칭으로 두루 쓰이고 있다. 얼마 전에도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이 4학년 여학생을 뒷담화하며 ‘조상’이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요컨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슨 사연인지 ‘정상 가족’을 꾸리지 못하고 궁벽한 산골에 혼자 살고 있으며, 보호자(?)는 물론 이른바 매력자본조차 없는 약자 중의 약자이다. 산밭을 일구거나 품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늙은 여자를 살뜰히 지켜 줄 안전망은 세상에 없다. 그녀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호랭이가, “밭을 할머니가 먼저 매면 고만 두고, 내가 먼저 매면 할머닐 잡아 먹겄다.” 그러거든. 아 내기를 하니깐 호랭이가 발톱으로 호비호비 다 맸잖아? “할머니! 잡아 먹것소.” 그라거든.> (「한국구비문학대계」: 경기 1982년 권은순의 이야기)

 

<하루는 뒷산으 호랑이가 와서 오늘 저녁에 할머니를 잡아먹겠으니 방 안에 불이나 환하게 켜 놓고 있거라 하고 갔다.> (『한국구전설화: 경기도편』 임석재 전집 5: 양평 이탁의 이야기)

 

호랑이가 노리는 것은 여자의 몸이다. 호랑이의 모습은 채록본에 따라 다양하게 그려진다. 다짜고짜 덤벼드는 파렴치한 놈일 때도 있고, 밭매기 내기를 올가미로 삼는 교활한 작자일 때도 있다. 심지어 “불이나 환하게 켜 놓고 있거라”면서 여자가 ‘잡아먹히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이 거들먹거린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몸뚱이를 먹어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는 뻔뻔함이다. 하긴 현실의 호랑이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야기에서는 호랑이가 나쁜 놈임이 처음부터 드러나 있지만, 현실에서는 번듯하고 점잖은 악마가 오히려 많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의 폭력은 좀처럼 드러내기 어렵고, 드러낸다 해도 폭력으로 이름 붙이기가 어렵다. 어처구니없게도 세상에는 팥죽할머니보다 호랑이를 위해 준비된 말이 훨씬 더 많다.

 

▲ 옛사람들은 팥의 붉은 색이 재앙을 막고 악귀를 물리친다고 믿었으며,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짓날 팥죽을 쑤어먹었다. (출처: pixabay) 


<그러느꺼니 노친네는 나는 죽을 델루(제일) 도와하느꺼니 죽이나 쒀 먹은 담에 잡아먹어라 하구 말했대. 그러느꺼니 백호레 그카라 하구서리 갔다 말이디.> (임석재 전집 2: 1934년 평북 선천군 유준룡의 이야기)

 

<“야야 불범아 내가 그리가 되겄나. 이 폿밧을 애트지기 매가지고 폿죽이나 낋이 묵고서나 자아묵어라.”> (『한국구전설화: 경상남도편 1』 임석재 전집 10: 1973년 진주시 손영숙의 이야기)

 

여자는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호소해봤자 돌아올 말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게 산 밑에는 왜 들어갔냐?’ ‘평소에 몸가짐을 어떻게 했으면 호랑이가 들락거리나?’ ‘위대한 산중의 왕이 고작 늙은 여자를 찾겠느냐?’ ‘먹혀본 경험이 많을 텐데 뭐가 문제냐?’...

 

주인공은 세상의 눈과 말이 호랑이 편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마을로 달려가지 못한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 일을 치르기 전에 팥죽이나 배불리 먹게 해달라고 협상해볼 뿐이다. 간신히 말미를 얻은 주인공은 온 여름 농사지은 팥을 몽땅 삶아 최후의 만찬을 준비한다. 그녀의 서러움과 분노는 거대한 가마솥에서 용암처럼 붉게 끓어오르고, 후끈한 김은 부엌을 빠져나가 잠자던 이웃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래서 그 이튿날 죽을 써서 한동이를 퍼놓구서는 앉어 울지.

우니까 달걀이 데굴데굴데굴 굴며,

“할머니, 할머니, 왜 울우?”

“오늘 저녁에 죽것어서 운다.”

“팥죽 한 그릇 주면 내 당하지.”

팥죽 한 그릇 줬지.

“부엌 아궁지에 묻어 주소.” 그러거든.> (이하 인용문 「한국구비문학대계」: 경기 1982년 권은순의 이야기, 아래 같음)

 

▲ 그 여자의 최후의 만찬: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일다

 

이웃이라야 달걀, 알밤, 송곳, 바늘, 지게, 멍석, 맷돌, 절구통, 자라, 가래, 파리, 물개똥처럼 누추하고 하찮은 것들이다.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소용을 기다리거나, 그나마 쓸모조차 증명하지 못한 잉여들로, 사람대접은 고사하고 기껏해야 ‘그것들’로 불리는 존재들이다.

 

자기 몫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인 그것들은 몸으로 말할 뿐이다. 몸의 말은 거칠고 투박하다. 파리처럼 성가시고, 송곳처럼 날카로우며, 절구통처럼 의뭉스럽고, 개똥처럼 무능하고 께름칙하게 대접받는다. 달걀이나 알밤처럼 자살폭탄테러를 무릅쓰는 무모한 몸짓도 있다. 무엇에 기대지 않고는 혼자 서지도 못하면서 산 같은 짐을 옮기는 지게나, 평생 남의 판만 깔아주는 멍석은 속이 있는지 없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들은 누구를 살갑게 위로할 줄도 모른다. 그저 이왕 쑨 팥죽이나 한 그릇 달라고 한다. 대신 호랑이를 감당해주겠다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 크고 무서운 호랑이를 파리나 개똥 따위가 무슨 힘으로 대적하겠는가. 팥죽 욕심에 빈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팥죽을 아낌없이 퍼준다. 혼자 다 먹지도 못할 죽을 한 가마솥이나 쑨 걸 보면, 죽기 전에 다 나눠주려고 애초부터 작정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밤, 뜨거운 팥죽 한 그릇으로 얼었던 몸을 녹인 ‘그것들’은 누추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호랑이를 기다린다.

 

<호랭이가 들어오거든.

들어오는데 불을 툭 껏지.

“할머니, 왜 나 들어 오는 거 불 껏소?”

“아이 내가 껏나?

범 들어오는 바람에 꺼졌지.”

성냥을 기다란 걸 주면서,

“이거 갖다가설랑에 아궁지에다 불을 다려가지고 밝은 데서나 잡아 먹어라.”구.

(...) 그래 아궁지에 불에 가 이렇게 다리니가, 아 달걀이 눈깔에가서 그냥 떡 이렇게 불덩어리가 뛰어 들어가설랑에, 물두덩에 자라가 팥죽을 먹고 들어가 앉았는데, 물두덩으로 씻을라고 손을 넣으니까, 이 손가락을 자라가 물고 늘어지지.

맷돌짝이 천장에서 떨어져 대가리를 깨뜨렸지.

송곳이 밑구녕을 치찔러 죽었지.

멍석이 들어오더니 뚜르르르 말거든. 

지게란 놈이 들어오더니 걸머졌으니까, 갔지.

가래란 놈이 구뎅이를 파구는 장사를 지내더랴.>

 

연대는 이런 것이 아니던가.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고, 공감을 앞세워 질문을 퍼붓지 않았으며, 피해자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처럼 오지랖을 피우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한 가지 몸짓을 보탰을 뿐이다. 호랑이는 바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무너진 것이다.

 

▲ 겨울이 꼭대기에 이른 동짓날, 그녀들은 손수 차린 만찬을 이웃과 나누고 봄을 약속하며 축제의 장을 만들었다. (출처: pixabay)

 

팥죽 할머니는? 당연히 잘 살았을 것이다. 구세주에게 거룩한 열두 제자가 있었다면, 하늘 아래 몸뚱이 하나만으로도 꿀릴 것 없던 여자에게는 열두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손수 차린 최후의 만찬은, 호랑이를 제사 지내고 봄을 약속하는 축제로 바뀌었다. 붉은 팥죽은 나눔과 약속의 뜨거운 징표가 되었다. 겨울이 꼭대기에 이른 동짓날, 그녀들의 검은 가마솥에는 붉은 팥죽이 설설 끓는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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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ez 2022/03/22 [05:39] 수정 | 삭제
  • 정말 잘 읽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풍성하고 깊게 다시 읽어 주시다니요. 최근 어떤 책을 읽어도 계속 메말라 있던 영혼이 촉촉해지는 느낌입니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읽으면서 뭉클해지고 가슴이 벅차서 울었습니다...! 두고 두고 읽으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웃음 2021/12/22 [21:15] 수정 | 삭제
  • 동짓날 밤입니다. 주옥같은 글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아쉬운대로 팥빵 먹었쪄요~
  • ㅇㅇ 2021/12/20 [12:47] 수정 | 삭제
  • 뭐야 울었따ㅜㅜ 너무 좋다ㅜㅜ
  • baobab 2021/12/16 [11:48] 수정 | 삭제
  • 팥죽할머니 얘기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멍석이 나오는 거 보니까.. ㅋㅋ 어렸을 적에도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호랑이가 잡아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는 게 왠지 더 무서웠던 기억도 났습니다.. ㅠㅠ 할머니의 부엌 친구들이 이 글에서는 정말 정감있게 느껴지네요. 달걀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귀엽고 소중하게 등장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어요.
  • 레모네이드 2021/12/14 [15:07] 수정 | 삭제
  • 할머니 할머니 왜 울우? 여기서부터 왠지 눈물난다
  • 은하 2021/12/13 [10:16] 수정 | 삭제
  • 작은 자들이 각자의 한 가지 몸짓을 보태는 것이 연대라는 말에 뭉클해지네요. 저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이고 싶습니다. ^^
  • 독자 2021/12/12 [20:52] 수정 | 삭제
  • 너무 좋네요!!
  • ㅇㅇ 2021/12/12 [16:24] 수정 | 삭제
  • 동짓날에 새알 동동 팥죽 쑤어먹어야겠네요. 이웃들 불러서 같이 먹어야겠네요. ㅎㅎ 넘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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