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은 가볍지 않다

[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걸스 오브 막시>

신승은 | 기사입력 2022/03/07 [17:30]

하이틴은 가볍지 않다

[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걸스 오브 막시>

신승은 | 입력 : 2022/03/07 [17:30]

미국 하이틴 영화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풋볼 팀 주장과 그들을 응원하는 치어리더 팀 리더의 러브 스토리? 킹카 혹은 퀸카를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주인공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고 귀에 착용한 헤드폰에서 팝송이 흘러나온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옆모습과 앞모습을 번갈아 비춘다. 도착한 곳은 신학기의 학교. 저마다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킹카, 퀸카, 너드 등등. 

 

▲ 영화 <걸스 오브 막시>(Moxie, 에이미 포엘러 감독, 2021) 중 주인공 비비안과 베스트 프렌드 클로디아의 모습

 

<걸스 오브 막시>(Moxie, 에이미 포엘러 감독, 2021)는 하이틴 영화다. 하이틴 영화의 장르적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신학기의 학교를 등교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베스트 프렌드가 다가와 학교의 정보를 대충 읊어준다. 학교에서 갈등이 생기고, 이로 인해 베스트 프렌드와도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이내 주인공은 갈등에서 승리를 거두고 파티에 참가한다.

 

이 문단만 보면 당신은 <걸스 오브 막시>를 왜 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런 하이틴 영화의 아류작으로만 느껴져 넷플릭스에서 이미지를 띄워도 하이틴 영화광이 아닌 이상, 유난히 미국 하이틴 영화가 당기는 날이 아닌 이상 클릭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걸스 오브 막시>는 장르적 공식을 충분히 따르면서도 완벽히 새로운 영화다. 주인공의 갈등은 사랑과 우정도 있지만, 주된 갈등은 바로 교내 성차별이다.

 

스테디캠과 시점샷의 교차: 하이틴 영화의 페미니즘적 발전

 

미국 하이틴 영화에 꼭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대체로 전학생이거나 학교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학생일 확률이 높다)이 신학기 첫 날, 학교에 들어가는 씬이다. 학교에 들어가면 수많은 다양한 학생들로 인해 정신이 없다. 시선은 여기 갔다가, 저기 머물다가 한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많은 연출들이 스테디 캠과 시점샷의 교차 편집을 이용했다. 스테디 캠을 이용하여 인물의 뒤를 따라가거나, 앞모습을 보여주며 주인공의 긴장한 눈빛을 비춰준다. 그리고 인물의 시점샷은 여러 백인 학생들의 모습을 비춘다. 풋볼 팀 주장, 퀸카, 너드 등이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다양하다고 하기엔 역부족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교실로 들어가면 스테디 캠 씬은 끝이 난다.

 

<걸스 오브 막시>에서는 이 스테디캠과 시점샷의 교차 편집이 네 번 등장한다. 역시 학교에서 주목을 잘 받지 못하는 주인공 비비안이 등장하고, 베스트 프렌드 클로디아가 연이어 등장한다. 클로디아는 동양인이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는 차별성을 둔다. 그리고 치어리더 걸 무리들을 비추는데, 그들이 휠체어 통로를 막고 있다며 투덜대는 장애인 학생을 비춘다. 풋볼 팀 주장을 비출 때는 비비안이 그의 성희롱적 시선을 지적한다. 비비안과 클로디아를 따르는 스테디 캠과 시점샷의 교차 편집으로 둘은 무사히 각자의 교실로 들어간다.

 

학기 초 남학생들은 교내의 모든 여학생들에게 성차별적인 별명을 붙인다. 그리고 그 리스트를 전교생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페미니스트인 전학생 루시에게는 아주 끔찍한 별명이 붙는다(영화에서는 이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수많은 대학 내 성희롱 가해자 단톡방 사건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학교에서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비비안이지만 매년 이같은 현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비비안은 용기와 투지를 뜻하는 “막시”라는 프린트를 만들어 이 리스트에 반발하는 내용을 담아 여자화장실에 몰래 배포한다. 그리고 첫 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뜻에 동참한다면 손에 별과 하트를 그리고 와달라는 메시지다.

 

▲ 영화 <걸스 오브 막시> 중 비비안이 막시 잡지를 들고 있다

 

비비안은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서 손에 하트와 별을 그린다. 그리고 다음 날 등교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스테디 캠-시점샷 교차 편집 씬이 등장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교한 비비안이 시점샷에는 학생들의 손만 보인다. 헌데 아무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비비안은 여자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으려는데 여기서 손에 하트와 별을 그린 여자 풋볼 팀을 만나게 된다. 비비안은 환하게 웃는다. 백인, 흑인, 장애인 학생이 모두 참여했다.

 

와중에, 한 여학생이 난데없이 교장으로부터 복장 제재를 받게 된다. 심지어 옆의 학생과 똑같은 탱크탑을 입었을 뿐인데 가슴이 크다는 이유로 그 학생만 조퇴 조치가 취해진다. 비비안은 막시 2호를 만든다. 다함께 탱크탑을 입고 등교해 저항에 동참하자는 글이 담겨있다. 그리고 당일, 세 번째 스테디 캠 씬이 나온다. 이번에는 두 번째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탱크탑을 입은 주인공의 눈빛도 덜 불안하고 탱크탑을 입은 수많은 여학생들이 보인다.

 

헌데 주인공의 베스트프렌드 클로디아는 입지 못했다. 동양인인 클로디아는 서구권보다 문화적으로 더 심한 제재를 받는다. 입고 나가려 했으나 결국 어머니에게 혼이 나 후드티를 입고 등교하게 된다. 연출은 섬세한 문화적 차이를 놓치지 않는다.

 

막시에게 한 여학생이 편지를 보낸다. 풋볼 팀 주장 미첼 윌슨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비비안은, 막시는 최종 투쟁을 선포한다. 지금껏 상황을 외면한 교장의 트로피를 부숴버린다. 그리고 붉은 페인트로 학교 이름인 ‘록포트’를 변형해 ‘레이프(Rape)포트’, 즉 강간포트라고 학교 앞에 칠해버린다. 날이 밝고 학생들이 등교한다. 교내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시위를 시작한다. 여기서 마지막 스테디캠 씬이 나온다. 하지만 주인공만을 비추지 않는다. 시위하기 위해 뛰쳐나오는 모두를 찍는다. 그리고 목적지는 교실이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가는 스테디캠이 아니고 역주행이다. 밖으로 나가는 학생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짧게 보여준다.

 

이 네 씬만 모아 붙여 보아도 하이틴 영화의 페미니즘적 발전 순간을 단숨에 체험할 수 있다. 성차별적 문제가 있는 상태- 연대 사인- 연대 행동- 최종 시위로 이어지는 이 네 씬은 비비안의 변화이자 교내의 변화이자 역사의 변화다.

 

▲ 영화 <걸스 오브 막시>(Moxie, 에이미 포엘러 감독, 2021)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꿈보다 현실, 혼자가 아니라 여럿

 

영화는 비비안의 꿈으로 시작했다. 숲속에서 달리던 비비안은 소리를 지르려 하지만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답답해한다. 자신의 목을 잡고 소리를 쳐보지만 아무 소리 나지 않는 악몽인지 무엇인지 모를 꿈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최종 시위 씬에서 막시에게 편지를 썼던 학생이 말한다. “나는 그냥 악 지르고 싶어.” 그리고 악! 하고 정말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모든 학생이 다같이 악! 소리를 지른다. 이때 영화는 비비안의 꿈 장면 플래시백으로 넘어간다. 소리가 나지 않던 꿈에서 비비안은 시원하게 악! 소리를 지른다. 백인, 흑인, 아시아인, 장애인, 이민자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과 지지자들이 악을 지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은 다함께 소리 지르는 현실로 돌아온다. 숲속 꿈에서 소리를 거칠게 지르는 플래시백은 비비안에게 이미 이 구조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음을, 그리고 마침내 실현되었음을 강렬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해미를, 막시를 찾아서

 

영화를 보고 스쿨미투 사례들과 대학 내 단톡방 사건들 그리고 성폭력 교수들에 관한 기사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허지은, 이경호 감독의 단편영화 <해미를 찾아서>(2019)는 대학교 내 성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한 교수의 성폭력이 폭로되고 수많은 여성들이 ‘해미’라는 이름으로 연대 동아리에 사연을 보내고 동아리는 대자보를 붙인다. ‘막시’와 ‘해미’는 왜 쉽사리 이름을 밝힐 수 없었을까.

 

피해자들에게 연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항상 존재해왔다. 성폭력 피해자는 법으로도 잘 보호되지 않으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는 제도 또한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피해자로만 낙인찍히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일이 쉬운 일일까? 익명으로 말하는 것조차 두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비비안과, 수많은 해미들은 용기를 냈다. <해미를 찾아서>의 마지막 핸드헬드 카메라가 비춘 건, 실재하는 해미를 만났을 때의 떨리는 눈동자다. 비겁한 건 그들이 아니라 세상이다.

 

I Do Care

 

해미와 막시가 용기를 내 익명의 연대를 했다면, 클로디아의 연대는 다른 방식이다. 클로디아는 절차적으로 접근했다. 교내 장학생 선발 대회에 여학생 이름을 정식으로 올려 교장이 홍보물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비비안에게 다가와 말한다. “I Do Care” 나도 관심이 있고 나도 신경 쓰고 있고 나도 참여하고 있다고.

 

어떤 사회운동을 할 때 누군가는 타인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그 열정의 경중을 나누고 의도를 곡해하기까지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다양한 방식의 운동이 있으며, 존중되어야 한다. 페미니즘도 그러하다. 누군가는 시위에 가고 누군가는 후원금을 내고 누군가는 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 누군가는 주변 사람을 붙잡고 설득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는다. 다양한 방식의 관심(Care)을 납작하게 바라보는 순간 운동의 깊이는 사라질 것이다.

 

▲ 다양한 하이틴 영화가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영화 <반쪽의 이야기>(The Half of It, 앨리스 우 감독, 2020), <더 프롬>(The Prom, 라이언 머피 감독, 2020), <레이디버드>(Lady Bird, 그레타 거윅 감독, 2017) 포스터

 

다양한 하이틴 영화, 다양한 하이틴

 

최근 들어 다양한 하이틴 영화가 나오고 있다. <반쪽의 이야기>(The Half of It, 앨리스 우 감독, 2020)는 성소수자 이민자 아시아인이 주인공이다. <더 프롬>(The Prom, 라이언 머피 감독, 2020)은 하이틴 뮤지컬 영화로 <걸스 오브 막시>처럼 전형적인 클리셰를 따라가지만 성소수자의 이야기다. 근래에 다양한 하이틴 영화가 나오는 것은 다양한 10대들의 모습을 이제서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비참한 과거의 반증이다. <레이디버드>(Lady Bird, 그레타 거윅 감독, 2017)에는 화장을 안 한 10대 여성이 나오고 이는 <걸스 오브 막시>도 마찬가지다.

 

10대들은 꾸준히 싸워오고 있다. 선거권 연령 하향 조정을 위해서도 싸웠다. 스쿨미투를 통해 싸웠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차별금지법 제정, 여성 청소년 생리대 지급 등 다양한 이슈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이틴이, 하이틴 영화가 가볍다고 생각하는가? 하이틴들은 가볍지 않다. 당신이 성인이라면 10대 시절을 되돌아보라. 그 시절 치열했던 고민들을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가볍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중2병’이라는 혐오표현으로 뭉뚱그려 버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현재는 가벼운 과거가 되어버릴 것이다. 윤가은 감독 영화(우리들, 우리집) 속 어린이를 보라. 이경미 감독 영화(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속 중학생을 보라. 그들의 문제가 가벼워 보이는가. 지금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10대들에게 존경의 뜻을 전한다. 당신들의 고민과 사랑과 우정과 투쟁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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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가움 2022/03/12 [21:28] 수정 | 삭제
  • 레이디버드는 갓띵작이라 왜 좋은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 2022/03/09 [20:57] 수정 | 삭제
  • 하이틴은 가볍지 않죠. 오히려 압축 성장하고 있는데 생의 무게가 얼마나 힘겨울지... 지나버렸다고 다들 겪는 거라며 말이나 잘 들으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거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 OO 2022/03/08 [15:54] 수정 | 삭제
  • 글만 봐도 감동이 밀려오네요. 해미를 찾아서라는 영화도 있군요, 보고 싶으다. 미투 영화들 많이많이 나오면 좋겠다.
  • 리랑 2022/03/08 [11:42] 수정 | 삭제
  • 넷플릭스가 있어서 이쪽 사람들 다 기쁜 거 맞죠? ㅎㅎ 더 프롬도 재밌게 봤어요. 장르적 공식을 다 따라가는 것 자체도 일종의 패러디처럼 느껴지고 알만한 사람만 알 숨은 그림찾기가 있는 거 좋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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