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타투 시술을 받다 우연히 ‘재생산’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고민할 계기가 생겼다. 그날 처음 만난 타투이스트와 대선 결과에 대한 짧은 탄식을 나누고 시술대에 누웠는데, 마침 타투이스트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분석하는 팟캐스트 방송을 틀어놓은 상태로 시술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타투 시술을 받을 때면 아프다는 감각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잠이 쏟아지기 때문에, 이날도 잠들지 않기 위해 팟캐스트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다 흥미로운 대목을 듣고 잠시 졸음을 쫓았다. 윤석열의 대선 공약 중 ‘생식 건강’ 관련 공약을 분석하며 한 패널이 ‘생식’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여성의 ‘생식 건강’을 관리하겠다는 공약에 대해, 패널은 ‘생식 건강’이 아니라 ‘재생산 건강’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강한 어조로 정정했다. 이 공약이 왜 부적절한지에 대한 의견도 덧붙였다.
청소년기부터 여성의 ‘생식 건강’을 관리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윤석열 전 후보와 정당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지 않은 페미니스트가 있었을까? ‘여성의 몸을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삼아 저출생 현상을 타개하겠다는 거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주로 사용되는 ‘재생산’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신체의 특정 기능에 집중하는듯한 ‘생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니 더더욱 그렇다.
이런 생각에서 그 패널은 윤석열 전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며 ‘생식’이 아니라, ‘재생산’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강하게 주장했을 것 같다. 흥미로웠다. 재생산권 같은 말이 이제 꽤 익숙한 표현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단호하고 확신에 찬 태도로 ‘생식’이 아니라 ‘재생산’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도 그간 한국 사회에서 재생산권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온 페미니스트들 덕이 아닐까 싶다.
‘생식’보다 ‘재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
재생산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reproduction을 ‘생식’이라 옮길지, ‘재생산’이라 옮길지, 무엇이 좀 더 적확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방향의 토론이 있을 수 있다. 맥락에 따라 생식이라 쓸 수도, 재생산이라 쓸 수도 있다. 재생산권과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재생산이라는 단어가 너무 어렵다며 굳이 재생산이라는 말을 써야 하냐는 질문도 여러 번 받았다.
재생산권 운동이 주로 ‘생식’이 아니라 ‘재생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생산의 과정은 특정한 생식기능이 작동하는 시기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 임신/중지 및 출산, 양육을 경험하게 되는지는 성별, 나이, 장애, 경제 상태 등 당사자가 딛고 있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복합적으로 결정되며 지속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생식이 아닌, 재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재생산을 연속적이고 포괄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고 사회적인 사안으로 다루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아가 재생산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다시’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재생산이 첨예한 문제인 까닭은 무엇이 다시 생산될 만한 것이고, 무엇이 다시 생산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가치체계가 드러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정 인구의 재생산은 환영받고 장려되는 와중에 다른 특정 인구의 재생산은 금지되고 비난받는다. 즉 재생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사회가 어떤 가치의 재생산을 추구해 왔는지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시도해볼 수도 있다.
재생산이 인구정치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재생산권, 그러니까 재생산을 권리로써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페미니스트들은 오랫동안 ‘재생산’을 문제 삼아왔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갈래가 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 이론에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가치가 평가 절하되는 재생산 노동을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 문제로 이론화했다. 그리고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이론과 운동을 제시했다. 대표적인 것이 ‘가사노동에 임금을’(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과 운동은 이성애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를 ‘자연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재생산의 영역을 가사노동과 양육노동, 출산 등에 한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생산 연구자 중 한 명인 미셸 머피(Michelle Murphy)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인구’의 형태로 표현되는 재생산의 영역이 국가 경제에 필수적이고 집중적인 개입의 영역으로서 다시 배치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경제 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거시 경제’ 지표들이 등장했으며, 경제 발전을 위해 미래의 인구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피임약이 값싸게 전 세계에 배포되었다. 재생산의 영역은 이제 자본주의의 유지와 팽창을 위한 집중적인 투자의 영역이 되었다. 인구통제, 가족계획, 공중보건의 이름으로 새로운 통치성이 형성되었다. 머피는 20세기 후반에 와서 재생산은 저평가되고 무시되는 영역이 아니라, 자본의 형태에 따라 집중적으로 착취되고 포섭되는 영역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인구정치’나 자본의 팽창에 끊임없이 대항하며, 재생산이 인구정치와 자본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닌 ‘시민의 권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 결과, 재생산권 개념이 성문화되며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인권의 하나로 떠올랐다.
재생산권의 핵심 내용은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와 1995년 북경 세계여성대회에서 채택되고 확장되었다. 재생산권 개념은 여성의 신체가 학대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 아니라, 여성은 인구/건강/개발 프로그램의 수단이 아닌 주요 행위자 및 의사결정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재생산권 개념이 국제인권의 언어로 말해지는 국면에서도 여전히 재생산의 영역이 ‘인구정치’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재생산권 개념이 확립되는 중에도 여전히 ‘성적 권리(sexual rights)’는 국제인권규범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곤 했다. 한편으로는 재생산 건강이 개인적인 위험 관리로 탈정치화되고, 재생산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예방적 행동으로 초점이 변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재생산 정의(justice)와 페미니즘 정치
그렇다면 재생산을 권리로 주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실제 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 페미니즘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아마 우리의 과제는 재생산을 개인의 권리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정치적 의제로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연구자 미셸 머피는 ‘재생산은 몸 및 노동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것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재생산권은 개인의 선택권 차원으로 수렴되는 것 이상의 광범위한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산권의 개념은 때때로 임신/중지, 출산, 양육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 차원으로 수렴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임신중지에 대한 논쟁이 태아의 생명권과 개인의 선택권 사이 양자택일 논쟁으로 자주 귀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해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의 개념과 운동이 활발해지기도 했다. 재생산 정의는 기존의 재생산권 개념이 개인의 선택권에 초점을 맞추는 한계를 지적하는 개념이다. 재생산의 정치는 구조적 빈곤, 차별과 폭력, 삶을 취약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조건들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러한 구조적인 조건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재생산권이 온전히 보장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과 함께한다. 재생산 정의는 필연적으로 재생산을 정치적인 것으로 다루게 된다.
재생산의 정치는 ‘재생산’을 자연적인 것으로 구획하는 것을 의심하며, 그 구획 자체를 문제 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그리고 지금은 폐지된 ‘낙태죄’를 생각해보자. ‘낙태죄’는 임신중지를 ‘죄’로 규정하는 동시에, 어떤 집단의 임신중지는 모자보건법을 통해 오히려 장려해 오기도 했다. 누구의 삶은 재생산될만한 것이고 누구의 삶은 재생산될만한 것이 아닌지를 국가가 선별해온 역사가 바로 ‘낙태죄’의 역사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특정한 가족 형태의 재생산만을 용인하고,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재생산을 비난하고 가로막는 차별에 맞선 싸움이었다. 누군가를 낳고 기르는 것이 한 사람의 몸에 국한된, 그리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구조, 역사, 문화의 얽힘 속에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재생산 정치의 출발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재생산에 관한 여러 주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일상을 정치로 만드는 페미니즘의 힘으로, 재생산 정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보자.
[참고 자료] -실비아 페데리치(2013). 《혁명의 영점》(황성원 옮김). 갈무리 -조은주(2018). 《가족과 통치: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 창비 -하정옥(2013). <재생산권 개념의 역사화 정치화를 위한 시론>, 《보건과 사회과학》(34) -Michelle Murphy(2015). 「Reproduction」 in 《Marxism and Feminism》. New York: Zed Books -Rosalind P. Petchesky(2000). 「Sexual Rights Inventing a Concept, Mapping an International Practice」
필자 소개: 김보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 활동하고 있다. 근간 『턴어웨이: 임신중지를 거부당한 여자들』(다이애나 그린 포스터 지음)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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