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 사건…‘죽음의 재’ 쏟아진 참치어선을 기억하라

제5후쿠류마루 전시관의 학예사 이치다 마리 인터뷰

무로타 모토미 | 기사입력 2022/04/10 [09:41]

비키니 사건…‘죽음의 재’ 쏟아진 참치어선을 기억하라

제5후쿠류마루 전시관의 학예사 이치다 마리 인터뷰

무로타 모토미 | 입력 : 2022/04/10 [09:41]

일본 사회의 반핵, 반전, 평화운동에서 ‘비키니 데이’(Bikini Day, 3월 1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54년 3월 1일, 미국은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Bikini Atoll)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소폭탄실험을 진행했다. 인근 섬 주민들은 핵실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방사능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16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항해하던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 ‘제5후쿠류마루’(the Fifth Lucky Dragon호) 선원 23명이 피폭되었다. 그중 무선 총괄자인 구보야마 아이키치 씨는 반년 후 사망했다. ‘비키니 데이’는 미국의 핵실험과 방사능 피해를 잊지 않고, 피폭자를 기리며 반핵 메시지를 전하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미국 핵실험으로 ‘죽음의 재’가 쏟아진 제5후쿠류마루 선체

 

도쿄 유메노시마에 있는 ‘제5후쿠류마루’(福竜丸) 전시관에는 쓰레기 매립지에서 인양된 바로 그 참치어선의 실물이 전시되고 있다. 도쿄도가 지어 1976년에 개관한 자료관이다.

 

“히로시마 원폭과 나가사키 원폭 피해에 비하면, 그로부터 9년 후에 제5후쿠류마루를 비롯해 많은 배가 방사능 피해를 당했던 비키니 사건은 잊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맨하탄 계획에 따른 원폭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 후 태평양 핵실험까지 이어진 것이었죠.”

 

이렇게 설명해준 사람은 ‘제5후쿠류마루’ 전시관의 학예사인 이치다 마리(市田真理) 씨다.

 

▲ 도쿄 유메노시마에 있는 ‘제5후쿠류마루’(福竜丸) 전시관 학예사 이치다 마리 씨. 1967년 홋카이도 출생. 책 『제5후쿠류마루는 항해 중』의 편집자이며, 『주머니 속 평화-나의 구전자 선언』을 집필했다. (촬영: 오치아이 유리코)

 

시민들에 의한 보존 운동으로 남겨진 제5후쿠류마루의 선체, 비키니 사건의 사진과 자료, 그날 하늘에서 쏟아진 ‘죽음의 재’, 세계 핵실험에서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당한 피해 등 모르고 있던 정보들이 참 많다. 이치다 마리 씨는 견학 온 초등학생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한다.

 

자료관 방문객들은 배의 엄청난 크기에 우선 놀란다.

“대박~ 하고 소리를 질러요. 기온이 높은 날에는 나무에서 냄새가 올라오기 때문에 아이들이 ‘냄새 난다’ 하죠. 제5후쿠류마루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전에는 이 전시관에 비키니 사건 당시를 증언하는 오이시 마타시치 씨가 있었다.(오이시 씨는 2021년 3월 사망했다.)

 

“오이시 마타시치 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입니다. 오이시 씨는 비키니 사건 후 ‘돈을 받았다’, ‘방사능이 전염된다’ 등의 말들 때문에 고향이 있지 못하고 도쿄에서 세탁소를 열었어요. 더 이상 싫은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잊고 싶다 하시며… 그런데, 제5후쿠류마루가 인양되고 전시관이 만들어진 거예요. 복잡한 심경이었겠죠. ‘배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말하셨으니까요. 그러다 그분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중학생들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14살에 어부가 되고, 스무 살에 피폭으로 고통 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는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오이시 씨가 50세가 될 즈음에, 자신들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를 물어오는 아이들에게 “세상일을 정면에서가 아니라 뒤에서도, 위에서도 보고, 자기 생각을 똑바로 갖길 바란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키니 사건의 ‘생존자’ 오이시 씨와의 콜라보

 

이치다 마리 씨가 전시관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학생 시절에는 제5후쿠류마루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버블 시대’(일본의 1880년대 거품 경제 시절) 한가운데에서 ‘무서운 일에는 다가가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으니까요”

 

대학 4학년 때인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건’(베이징 한복판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부패 척결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중국 정부가 유혈 진압하여 엄청난 희생자가 나옴)과,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치다 씨는 동시대의 세계 사람들이 사회를 움직이려고 싸우는 모습을 보며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 편집일과 시민운동을 거쳐 사진집 『핵의 20세기-세계 피폭자들의 호소』 출판에 관여했을 때, 처음으로 비키니 사건을 알게 되고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인이 데려간 제5후쿠류마루 전시관에서 일을 돕게 되었다. 2013년부터는 이 전시관의 학예사가 되었고, 대학에서도 교편을 잡게 되었다.

 

▲ 도쿄도 에도구에 위치한 제5후쿠류마루 전시관 홈페이지. http://d5f.org

 

“오이시 마타시치 씨의 첫인상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다가가기 어려워서 인사 정도 하는 게 최선이었죠.”

 

오이시 씨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은, 그가 수기 출판에 대한 상담을 청했을 때부터다.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다는 오이시 씨의 바람에 편집자 경험을 살려서 ‘무리예요, 오이시 씨만 쓸 수 있는 것을 썼으면 좋겠어요’ 라고 대답했죠. 서로 양보를 안 해서 자주 싸웠어요. 진짜 고집불통 아저씨예요.”

 

오이시 마타시치 씨의 이야기를 듣고, 불합리와 부정의에 그토록 분노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이시 씨는 말버릇처럼 ‘진지하게 공부해서 제대로 분노하라’고 말하곤 했다. 한편으론 오이시 씨도 “모르는 것은 이치다 씨에게 물어봐요”라고 할 정도로 이치다 씨를 신뢰하게 되었다.

 

이치다 씨가 비키니 사건을 설명하고, 오이시 씨가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콜라보 강연’은 50회 이상 진행되었다. 만년에 건강을 해치면서도 휠체어에 앉아 ‘중상모략을 당하고도 반론하지 못한 채 죽어간 동료들을 위해’ 증언하는 오이시 씨의 곁에는 항상 이치다 씨가 있었다.

 

비키니 사건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과도 이어진 문제

 

“비키니 사건은 지금으로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도, 태평양 인근 국가들은 ‘태평양은 이어져 있다’며 굉장히 예민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의견이 거의 보도되지 않고 있죠.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바꿔 말하거나 (후쿠시마) 지역만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어요. 제5후쿠류마루 때와 똑같습니다.”

 

‘방사능은 위험하지 않다’는 논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고 제대로 자료로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이치다 씨는 말한다. “당사자들이 점점 사라지니 오히려 더 해야 할 일이죠.”

 

학예사로서 방대한 자료를 해독하고 전시 기획을 하는 한편, 오이시 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구전자’ 역할도 맡게 된 이치다 씨.

“오이시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버린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밖에요.”

 

더 많은 사람들이 전시관(d5f.org)을 찾아 제5후쿠류마루를 보고 무언가를 느끼길 바란다.

 

-<일다>와 기사 제휴하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의 보도입니다. 고주영 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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